① 박철·최옥자 부부의 싸움
②국선변호사들이 말하는 개혁
54차례 재판, 470시간 넘는 재판 시간, 증인 59명. 8월25일 1심에서 징역 5년형이 선고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 기록이다. 범죄 혐의를 입증해야 하는 박영수 특별검사팀도, 이 부회장의 변호인도 법정에서 공격과 방어를 아낌없이 주고받을 기회가 충분했다.
하지만 한국의 형사절차 속에서 이 부회장의 재판은 아주 특이한 사례다. 대부분의 형사사건 재판은 2~3차례를 넘지 않는다. 특별히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는 한 재판 시간도 수분에서 수십 분으로 짧다. 그 짧은 시간 안에 판사는 누군가의 유무죄를 가려야 한다. 결국 서류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서류의 대부분은 경찰이나 검찰이 작성한 것들이다. 이 때문에 평범한 시민들이 피고인이 되는 일반 형사사건의 경우 수사기관이 작성한 서류가 재판에 미치는 영향이 언론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리는 ‘대형 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은 국선 사건을 맡은 경험이 있는 변호사 5명에게 일반 형사사건 수사와 재판 절차의 문제점을 물었다.
수사 관행에 가장 취약한 집단은 외국인다섯 변호사는 한국 형사절차의 가장 큰 문제로 ‘경찰 수사’를 꼽았다. ‘자백’을 통해 수사를 마무리하려는 수사기관의 관행 때문에 피의자의 말은 왜곡되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경찰 피의자신문조서’(경찰 조서)에 남는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서울남부지법에서 국선전담변호사를 했던 김지미 변호사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 가장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변호사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은 자백을 얻기 위해 피의자를 회유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가령 피의자에게 적용된 범죄 혐의에는 벌금형이 없는데 ‘그냥 여기서 인정하고 가면 벌금 정도만 나온다’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는 사실상 상대를 속이는 겁니다. 또 ‘별것 아닌 일’이라고 말하면서 피의자를 안심시키고 자백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9년간 국선전담변호사를 한 정명숙 변호사 역시 수사과정에서 제대로 항변하지 못했던 사건을 종종 접했다. 한번은 많은 물건을 도난당했는데 그중 일부는 버리는 물건인 줄 알고 의뢰인이 가져간 사건이 있었다. 경찰은 그의 의뢰인에게 무엇을 얼마나 가져갔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알리는 대신 “물건을 가져간 것이 맞냐”는 질문만 해서 자백을 받아냈다. 그런 뒤 경찰은 의뢰인에게 사라진 물건 전부에 대해 절도 혐의를 적용했다. 정 변호사는 “수사기관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묻고 피의자가 항변할 수 있는 내용은 조서에 담지 않았다. 항변 내용에 따라 무죄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말은 재판에 와서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한국 경찰의 수사 관행에 가장 취약한 집단은 외국인이다. 김지미 변호사는 국선전담변호사 시절 외국인 전담으로 중국동포 관련 사건을 많이 맡았다. 그는 경찰이 외국인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그냥 가면 된다”고 말한 뒤 기소하는 경우를 상당수 경험했다. 김 변호사는 “사건을 맡은 다음 피의자한테 연락하면 ‘다 끝난 일인데 무슨 말이냐’라고 되묻는 일이 많았다. 이 경우 피의자에게 왜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부터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사기관 편에 선 통역사또 다른 문제는 통역이다. 경찰이나 검찰에서 제공하는 통역은 좀처럼 피의자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국선 사건을 맡아온 최정규 변호사는 “외국인이 수사받는 경우 통역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문제가 생기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2009년쯤 중국인 유학생들이 보이스피싱(전화 금융사기)으로 기소된 사건이 있었어요. 모두 4명인데 이들은 ‘자신은 보이스피싱인지 모르고 돈을 인출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것뿐이다. 너무 억울하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런데 조서를 보니 경찰에서 모두 자백한 것으로 돼 있더군요.”
최 변호사가 사정을 알아보니 원인은 통역이었다. 검찰 통역을 증인으로 불러 조서를 한줄한줄 통역했냐고 물어보니 ‘시간상 그렇게 하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취지만 알려줬다’고 솔직히 답했다. 최 변호사는 “외국인이 수사기관에 불려가면 의지할 사람이 통역밖에 없다. 통역이 수사기관 편에 서서 ‘자백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 거기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경찰 조서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부인하면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물론 피의자가 변호사의 도움 없이 내뱉은 불리한 진술이 법정에서 튀어나오는 우회로는 많다. 특히 검사는 피고인이 경찰에서 어떤 진술을 했는지 알기에 법정에서 피고인 신문을 할 때 ‘경찰에서는 자백해놓고 왜 지금은 부인하냐’ 식으로 질문한다. 피고인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고 공격하는 수법이다.
문제는 경찰 조사 다음에 이어지는 검찰 조사다. 조수진 변호사는 “경찰 조서와 달리 ‘검찰 피의자신문조서’(검찰 조서)는 재판에서 곧바로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그 때문에 경찰에서 물어본 내용을 똑같이 검찰에서 한 번 더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2011년부터 올 3월까지 서울중앙지법에서 국선변호사를 했던 김수진 변호사는 “검찰 조서는 곧바로 증거능력이 인정되기 때문에 진술을 잘못하면 재판에서 뒤집기가 무척 어렵다”며 “일반인은 자신이 무슨 혐의로 수사받는지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고 구속된다는 두려움도 있다. 수사 단계에서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한국의 형사재판이 꼼꼼히 이뤄지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발생 사건에 견줘 이를 감당하는 판사와 법정의 수가 턱없이 적기 때문이다. 피고인의 말을 잘 들어주는 판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판사들도 있다. 그로 인해 수사기관에서 잘못 진술하면 재판에서 역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변호사들은 특히 ‘고정’ 사건이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고정 사건은 검찰에 의해 약식 기소된 사건이 피고인의 이의제기 등으로 정식 재판에 회부될 때 붙는 사건명이다. 검찰은 보통 가벼운 벌금형이 나오면 약식 기소하고, 이런 사건의 경우 피고인은 재판에 출석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고정 사건의 경우 수사 기록이 미리 법원에 다 가게 된다는 점이다.
원래 판사는 검찰 기소 시점에 ‘공소장’만 받아 볼 수 있다. 수사 기록을 다 살펴보면 판사가 미리 피고인의 유무죄에 대한 심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원칙대로라면 형사사건의 유무죄에 대한 판사의 심증 형성은 법정에서 직접 조사해 이뤄져야 한다. 이를 ‘공판 중심주의’라고 한다. 하지만 약식 기소 땐 판사가 피고인의 유무죄를 서류로 판단하기 때문에 수사 기록을 첨부해 법원에 보낼 수 있다. 최정규 변호사는 “고정 사건을 변호하다 판사가 경찰 조서를 보고 피고인이 유죄임을 확신한 뒤 정식 재판을 취하하라고 종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 경우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일부 판사들은 피고인이 부인하면 증거능력이 사라지는 경찰 조서를 더 신뢰한다. 조수진 변호사는 “일부 판사들은 경찰 진술이 초기 진술이라는 이유로 더 신빙성 있게 본다. 법정 진술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하므로 믿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판사와 법정 수 늘려 충실한 재판 받도록”취재에 응한 변호사 5명은 한국 형사절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조수진 변호사는 “판사와 법정 수를 늘려 시민들이 충실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정규 변호사는 “경찰 조사 때 영상녹화나 음성녹음을 해 진술 과정을 더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미 변호사는 “경찰 수사 단계부터 의무적으로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형사공공변호인 제도를 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모든 대안은 결국 한곳을 가리킨다. 시민들의 방어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새 정부의 과제로 떠오른 검찰 개혁과 사법 개혁은 검찰·경찰 등 기관 간 권한 조정이나 이 조직에 오랜 시간 쌓인 적폐를 해소하는 것뿐 아니라, ‘시민들의 권리 보장’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야 한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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