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TK(대구·경북) 출신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주말 산행 모임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대학 친구들 모임인 ‘정담80’이고, 또 하나는 고등학교 동기 모임이다. 두 모임의 친구들은 생각도 정서도 많이 다르다.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다. 박근혜가 무너진 뒤로는 다른 목소리가 다소 덜해졌다. 아직 길이 멀지만,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나의 아버지는 4형제의 장남이다. 한국전쟁 때 고등학생이던 바로 아래 삼촌이 좌익이었다. 국방군에 잡혀갔다. 그때, 교사를 하던 아버지는 경찰로 옷을 갈아입었다. 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논밭 다 팔아 뇌물을 장만했고 동생을 감옥에서 빼냈다. 그래서 우리 집엔 선산이 없다. 삼촌은 감옥에서 나왔지만 좌익의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마음의 한이 깊었던지, 마흔한 살에 돌아가셨다. 팔자에 없는 경찰을 했던 아버지도 환갑을 넘기지 못했다.
좌와 우 가르는 분열과 갈등의 극복
1987년 제13대부터 이번까지 일곱 번째 대통령선거를 경험한다.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한 삶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란 강한 예감이 든다. ‘정담80’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지나온 우리 ‘박정희 세대’가 이제는 통합을 소망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번 촛불 대선을 통해 내가 바라는 가장 큰 변화 또한 좌와 우, 그리고 동과 서를 가르는 분열과 갈등의 극복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삶과 의식을 단선적으로 지배했던 박정희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것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국가와 재벌이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다원주의를 억누른 것. 그렇게 대통령 한 사람한테 권력을 집중했던 국가주의 체제가 박정희 패러다임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박정희 체제의 유지를 위해 분열과 갈등이 효과적인 도구로 동원됐던 것이다.
나는 이번 대선에서 다섯 후보가 각자 박정희 패러다임의 극복을 추동하는, 나름대로 긍정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직관한다. 아무래도 대통령 자리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라는 사람과 그의 정책 지향이 여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검증도 매서웠다. 한쪽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빨갱이라 매도하고, 다른 쪽에선 도대체 대통령이 되면 무얼 할지 알 수 없다고 정치적 신념에 대한 의구심을 감추지 않는다. 그래도 문재인 대통령을 상상하면서 적어도 박정희가 뿌려놓은 제왕적 대통령 시대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합리적 믿음은 가져도 될 것 같다. ‘인간 문재인’과 ‘정치인 문재인’에 대한 안팎의 평가도 그런 점에서 대체로 일치한다. 노무현 정부 이상으로 반칙과 특권을 깨고 나아갈 것이라는 데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문재인 세력이 거꾸로 패권 세력이 됐다는 지적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패권 정치 청산을 걸고 제3세력화 또는 독자세력화에 나섰다. 양당이 독점하는 여의도 정치를 탈피해 중도·합리주의 노선을 걷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양당 체제가 지역을 뿌리로 한 기득권 세력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뚜렷한 문제의식이다. 문재인 지지자들이 선을 긋고 편을 가르는 패권적 근본주의에 빠져 있다고, 공개적으로 도마 위에 올려 비판했다. 보수의 패권에 맞서 결집했던 문재인 세력이 거꾸로 패권 세력이 됐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지금의 양당 체제는 시대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현실적으로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다. 이는 분열과 갈등을 조장했던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다. 아직은 양당의 기득권 체제를 극복하기에 안 후보의 정치적 역량이 충분치 않은 것 같다.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상식파”라는 안 후보의 구심력도 고만고만하다. 그래도 안 후보가 패권 청산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에 인색할 이유는 없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한국 사회의 진보세력에 대한 편협한 고정관념을 단박에 깨버렸다. “색깔론 그만 우려먹어라”고 다른 후보들을 꼼짝 못하게 호통치는 장면이 상징적이다. 당당하고 실력 있는 진보세력이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진보정당은 ‘비타협적이고 대책 없이 목소리만 높인다’는 부정적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안 있는 진보, 합리적 진보의 등장과 심상정의 의미 있는 득표율은 연합정권 출범 따위의 새로운 정치 실험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당제와 비례대표제 확대를 향한 선거법 개정을 앞당기는 강력한 촉매제이기도 하다. 진보의 정책이 박정희 시대를 넘어 더 나은 세상을 열어가는 견인차가 될 수 있을까. 이번 선거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정책 연대 펴는 세상 기대할 수 있을까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현실의 벽에 막혀 선거 기간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박근혜를 저버린 배신자라는 TK 지역의 비난에 맞서야 했고, 바른정당 내부의 흔들기에 심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유 후보는 보수가 부자와 기득권만 편든다는 세간의 인식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약자를 감싸안는 정의롭고 따뜻한 보수를 표방하고 그에 상응하는 정책을 용감하고 일관되게 내세웠다. 보수를 싫어하는 사람들한테도, 꽉 막힌 안보관은 답답하지만 유 후보와는 대화가 가능할 것이란 믿음을 주었다. 심상정 후보가 TV토론에서 사면초가에 몰린 유 후보한테 “힘내세요”라고 공개 응원을 보내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때로 정책 연대를 펴는 세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지지자들의 막판 결집은 우리 주위의 냉엄한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그 지지자들은 탄핵에 반대한 20%의 국민과도 많이 겹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분단 이후 반공 세대일 것이다. 해방 뒤 최근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이들은 촛불을 거치면서 한순간에 소수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 속에 남아 있는 박정희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는, 경상도 아니면 전라도, 진보 아니면 보수, 우군 아니면 적으로, 단순 구분하는 세상에서 살았다. 그런 점에서, 다섯 후보가 짬짜미하지 않고 각자의 신념으로 완주해 우리 사회의 다원적인 공명을 일으켰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기득권자들이 권력을 분점하던 구시대를 현실 정치인들이 자의든 타의든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아날로그 태극기에서 디지털 촛불로 넘어가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다. 돈없고 빽없는 이들, 몸과 생각이 다른 소수자들도 제 목소리 낼 수 있는 진정한 정치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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