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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야, 내 손을 잡아

<한겨레21> ‘평화의 소녀상 손잡기’ 기획연재 … 소녀상 확산 위한 시민운동 동참
등록 2016-01-12 21:04 수정 2020-05-03 07:17

‘소녀’의 머리카락이 화산도 제주 바람에 흩날렸다. 2015년 12월19일. 스물일곱 번째 평화의 소녀상이 제주시 노형동 방일리공원에 세워졌다. 소녀의 그림자는 제주 돌,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 소녀의 발치에는 제주 4·3 항쟁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붉은 동백꽃잎이 선연히 떨어져 있다. 이 희생과 그 오욕이 다르지 않음을, 함께하겠음을 뜻한다. 제주에 자리잡은 소녀는 4·3 항쟁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며, 아직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일본 정부의 법적 사과를 요구하며 작은 두 주먹을 굳게 쥐고 있다.
제주 평화의 소녀상이 선 자리는 원래 소녀가 서려던 곳에서 1km 남짓 비켜나 있다. 제주평화나비와 제주 4개 대학 학생들이 꾸린 ‘제주, 대학생이 세우는 평화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애초 소녀상을 노형동 주제주 일본총영사관 앞에 세우려 했다.
그러나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시청이 불허했다. 외교상의 이유 등을 내밀었다. 석 달간 싸우다 ‘광복 70주년’에 맞춰 2015년 소녀상을 세우겠다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약속을 생각해 학생들이 한 발짝 물러섰다. 제주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일본이라는 가해국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던 뜻은 그렇게 한국 행정부에 의해 저지됐다.
2015년에만 전국 18곳에 세워진 ‘소녀상’

올해 처음이자 1212번째인 수요집회가 1월6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싸고 열렸다. 정용일 기자

올해 처음이자 1212번째인 수요집회가 1월6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싸고 열렸다. 정용일 기자

첫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1천 회 수요집회를 기념해 세워졌다. 김운성·김서경 작가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대한 마음의 빚을 더는 방법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문의했다. 정대협도 1천 회 집회를 앞두고 ‘기념’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차였다. 그렇게 상징물을 세우자는 데 뜻이 모아졌고, 머리가 뜯기고 두 주먹을 굳게 쥐고,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해 발꿈치를 들고 있지만, 어깨 위 희망의 작은 새를 품은 소녀상이 만들어졌다. 누구나 소녀와 함께하자는 뜻의 빈 의자 하나도 소녀 옆에 놓였다.

빈 의자의 뜻이 통한 걸까. 일본대사관 앞 서울 율곡로에서 시민과 눈높이를 같이하는 소녀상이 모습을 드러낸 뒤 전국 각지에서 그 뜻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국내에서는 2014년 1월 처음으로 시민 모금을 통한 평화의 소녀상이 경남 거제시에 세워졌다.

당시 거제여성회 대표를 맡으면서 거제 소녀상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박명옥 시의원은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38명 가운데 가장 많은 할머니가 거주하는 지역이 경상남도이고, 그 가운데 인구 대비 등록 피해자가 가장 많은 곳이 거제·통영 지역”이라고 말했다. 거제에서는 시민들이 3천여만원을 내놓고 거제시가 1천만원을 보조해 소녀상을 세웠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으면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 운동이 더 확산됐다. 2015년에만 전국 18곳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지도 참조).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데는 재료비·작품비·토목공사비 등을 포함해 보통 3천만~7천만원이 든다. 주로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졌다.

세종시에서는 1269명이 참여해 100% 시민 모금으로 소녀상을 세웠다. 충남 천안에서는 시민 1200여 명과 170여 개 시민사회단체 등이 7700만원을 모았다. 천안 중앙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온라인 모금을 통해 300만원을 모아 힘을 보태기도 했다.

김용자 천안평화의소녀상건립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보통 진보·보수로 나눠져 있던 지역 시민사회가 소녀상을 계기로 처음 같이 회의하고 일하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김운성·김서경 작가가 제작한 소녀상이 아닌 다른 모습의 소녀상도 2015년 충북 청주, 전북 군산, 경남 창원 등 6곳에 세워졌다.

돈만 모은다고 소녀상을 쉽게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울 자리를 찾는 일도 어렵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 지지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른 평화의 소녀상이 2011년 그 자리에 처음 선 시각은 도시가 미처 깨어나기 전인 12월의 아침이었다. 소녀상은 새벽 이슬을 맞으며 세상과 만났다.

지역 상인들의 반대에 부닥치기도 한다. 창원에서는 지난해 8월15일 광복절에 맞춰 소녀상 제막식을 하기 위해 진행하던 공사가 중단됐다. 소녀상이 세워지려던 상권의 상인들이 ‘술집 거리와 소녀상이 어울리지 않는다’ ‘생업에 방해가 된다’ 등의 이유로 반대했다. 결국 소녀상은 광복절에 맞춰서 시민들과 만나지 못했다.

해외에서 위태로운 소녀상의 입지

국외의 소녀상은 더욱 애처롭다. 2년 전인 2013년, 경기도 화성시가 캐나다 버너비시와 양해각서를 맺고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려던 계획은 버너비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반대로 아직 실행되지 못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서는 애초 지역 공공장소에 세우려고 했지만, 디트로이트 소재 일본총영사관과 일본 기업들의 반대 로비로 결국 한인문화회관 앞에 자리했다. 캐나다 토론토시에 있는 소녀상이 한인회관 앞에 서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해외에서 유일하게 한국인 사유지가 아닌 곳에 세워진 소녀상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시립대학 중앙도서관에 세워진 것이다. 2013년 세워진 이 소녀상 역시 서 있는 일이 평탄치만은 않았다. 김운성 작가와 함께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 작가는 “일본총영사관이 글렌데일 시정부를 강하게 압박했고, 세워진 직후에도 일본 교민들이 계속 철거 서명을 받는 등 집단행동을 해 존립이 위태로웠다”고 말했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시민과 각 지방정부가 소녀상의 의미에 더욱 많이 공감할 때 소녀상이 더 쉽게, 더 가까이 우리 곁에 함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민과 각 지방정부가 소녀상의 의미에 공감할 때 소녀상이 더 가까이 우리 곁에 함께할 수 있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

왜 소녀상을 전국에 세워야 할까. 전국 각지에 세워진 소녀상은 그 지역사회 고유의 특색을 담아 지역 거점으로 자리할 수 있다. 제주에 소녀상을 세우는 데 적극적 역할을 한 제주 평화나비 김광철(27·제주대 4학년) 간사는 “제주에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아픔에 공감하는 행사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소녀상이 생기면서, 12·28 합의가 있은 뒤 한-일 굴욕 협상을 반대한다는 기자회견도 소녀상 앞에서 열었고, 1월6일 수요시위도 했다”고 말했다. 지역사회에서 ‘기억의 공간’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세종시민들은 행정자치도시로 계획된 세종시가 소녀상의 존재로 인해 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녀상 건립에 마음을 모았다.

지역적 특색을 더한 소녀상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경남 남해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남해의 위안부 피해 생존자 박숙이(94)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박 할머니는 1939년 열여섯에 조개 캐러 가던 길에 일본군에 끌려갔다. 할머니의 재현인 소녀상 발치에는 소쿠리와 호미가 흩어져 있다.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손에는 동백꽃을 쥐어줬다.

소녀상 전국 확산 위한 ‘평화비 전국연대’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28 합의’를 발표한 뒤 ‘10억엔의 전제는 소녀상 이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해국이 피해국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민간 조형물에 대해 이전을 요구하는 비상식적 태도는 국내에서 ‘소녀상을 지키고 확산하자’는 운동을 오히려 촉발하고 있다.

지난 1월6일 올해 처음 열린 1212차 수요집회에서는 정대협을 비롯해 수원평화나비, 평화나비대전행동, 원주평화의소녀상시민모임 등 각 지역 평화의 소녀상 관련 시민 연대체 20여 곳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날 ‘평화비 전국연대’ 결성을 선포했다.

이들은 각 지역 소녀상을 거점으로 지역에서도 연대 릴레이 수요집회를 하고, 전국·세계 각지에 소녀상 건립을 확산할 방침이다. 전국의 소녀상 건립 현황을 책으로 만들고 다양한 외국어로 번역·출판해 국제적으로도 소녀상 제작 의미를 알려나갈 계획이다.

도 ‘소녀상 지키기’에 함께 한다. 전국 39곳 소녀상 건립 과정과 의미를 알리는 ‘평화의 소녀상 손잡기’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더 많은 소녀상 건립을 위한 시민운동에도 적극 나선다. 자세한 내용과 참여 방법은 다음호에서 소개하겠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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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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