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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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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지금 인생을 베팅한다

등록 2001-11-28 00:00 수정 2020-05-02 04:22

대박의 꿈 부추기는 사행산업 대호황… 정부 세수욕심에 마구잡이 허가

무직 21명, 회사원 및 자영업자 각 7명, 공무원 4명, 기사 4명. 강원랜드 카지노가 자리잡은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 최근 개설된 도박중독센터의 상담자 명단이다. “저 아래 전당포에 가보면 저당잡힌 택시가 한둘이 아니라니까. 서울에서 손님 태우고 왔다가 도박에 손을 댄 뒤 택시를 잡히고 돈 빌려서 죽치고 있는 거야.” 카지노장으로 향하는 택시 운전기사는 정선의 카지노 열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시설 늘려야 한다는 ‘즐거운’ 불평

산간지역이라 벌써부터 설핏하니 눈이 내리던 지난 11월13일. 깊은 산 속에 자리잡은 카지노장은 휘황한 불빛 아래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로 밤새도록 북새통을 이뤘다. 초저녁부터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찬 객장의 게임테이블을 볼거리가 생긴 시장바닥마냥 몰려든 사람들이 겹겹으로 둘러쌌다. 곳곳에서 탄성과 한숨이 엇갈렸다. 배당이 터진 슬롯머신에서 한참 동안 와르르 쏟아지는 동전을 손으로 내려받는가 하면 수북이 쌓인 동전을 한 움큼씩 쓸어담느라 바쁜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강원랜드 관계자는 “한마디로 도떼기시장”이라며 “매일같이 손님으로 꽉 차서 서둘러 시설을 늘려야 할 판”이라고 을 털어놨다.

강원랜드 카지노의 하루 평균입장객은 2500여명으로 지난해 10월 개장 이래 90만명이 찾았다. 주말에는 입장객이 다소 늘긴 하지만 평일과 주말이 따로 없다. 화요일인 이날도 강원랜드 호텔객실 199개는 모두 찼고 카지노장은 밤새 끊이지 않고 드나드는 손님들로 비좁아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다보니 강원랜드는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이드베팅(테이블게임에서 정해진 자리에 앉은 고객 외에 주변에 선 고객도 베팅하는 것)까지 허용하고 있을 정도다. 호텔 투숙객도 하룻밤 묵고 떠나는 게 아니라 2박 이상 장기투숙자가 대다수다. 강원랜드는 개장 당시 하루 입장객을 1500여명, 매출을 3억∼4억원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요즘 하루 매출액은 예상치의 4배 가까운 12억5천만원에 이른다. 개장 이후 지난 9월 말까지 강원랜드의 카지노 매출액은 4319억원. 이는 고객한테 돌려준 환급금을 뺀 금액이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는 총베팅액 기준으로 할 경우 강원랜드의 올해 매출액을 3조원, 1회 입장시 1인당 베팅액을 290만원으로 추정했다.

객장은 새벽이 가까울수록 한산해지기는커녕 대박을 좇는 열기로 더욱 달아오른다. “이제 나 밑(돈을 다 날림)이야. 죽어야 할 판인데…”라며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20대 청년, 다 날리고 마지막 남은 10만원을 어디에 베팅할지 고민하는 넥타이 차림의 중년,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 채 칩(현금 대신 사용하는 일종의 카지노 화폐)을 만지작거리는 중년 아주머니…. “야, 슛(베팅) 다 했지. 이제 제발 그만 털고 나와!” 새벽 3시 무렵, 밤이 깊어가면서 고객의 주머니가 시나브로 바닥을 보이기 시작해서일까.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졌고 헛짚었다는 한숨은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바뀌고 있었다. 돈을 다 털리고 허탈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몇명은 슬롯머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래도 얼마 전 1억8천만원짜리가 터졌던 강원메가잭팟(슬롯머신)은 시시각각 불어나 어느새 8500만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번만 제대로 터지면 하룻밤에 8500만원을 거머쥘 수 있다. 그래서일까? 1만원권 뭉칫돈을 쥔 채 연신 슬롯머신을 돌리는 사람들은 좀체로 줄어들 줄 몰랐다.

새벽이 다가올수록 지갑은 비어가고

카지노를 찾는 사람들은 어떤 부류일까? 카지노 입장객 중 고급 승용차말고 열차를 타고 고한까지 오는 사람도 상당수다. 이는 늘 손님으로 가득차는 고한역-카지노 셔틀버스가 그대로 보여준다. 카지노가 돈있고 시간있는 소수 유한계급의 전유물에서 국민생활 속으로 급속히 파고들면서 대중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민 카지노객을 노린 전당포도 고한역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한때 67개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대박이 터질 것이라는 생각에 너나 할 것 없이 전당포 간판을 내걸었다가 과당경쟁으로 문을 닫은 곳도 한둘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전당포는 단박에 큰돈을 거머쥐겠다며 불나방처럼 모여들었다가 주머니를 죄다 털리는 고객과 닮은꼴이다. 금딱지는 물론 차까지 헐값에 맡기고 돈을 빌려 카지노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허황한 꿈은 한 다이너스티 택시기사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다이너스티도 여기서는 조랑말이 된 지 오래야. 리무진 택시 9대가 새로 들어왔거든. 그야 다 서울가는 손님들 모시는 택시들이지.”

강원랜드 카지노의 출입제한자는 232명으로, 가족이 요청해 출입이 금지된 사람만 125명에 이른다. 특히 8명은 본인 스스로 “나를 들여보내지 말라”고 요청했다. 강원랜드쪽은 “오랫동안 집에 안 들어오자 소문을 듣고 카지노에 와 있는지 확인해 달라는 전화도 심심찮게 걸려온다”고 말했다.

사행(射幸)은 말 그대로 ‘행운을 쏜다’는 뜻이다. 사행산업을 꼭 ‘패가망신’이 뒤따르는 노름이나 도박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작은 돈을 베팅하며 즐기는 ‘놀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1년 초겨울, 한국은 ‘도박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대박이 터진다는 곳마다 사람들로 들끓고 있다. 특히 사행산업에 대한 고삐가 여기저기서 풀리면서 돈이 있건 없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큰돈을 베팅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한해 매출액이 무려 4조5천억원에 이르는 경마는 폐쇄회로TV를 통해 실시간으로 경기를 보면서 판돈을 걸 수 있는 장외사업소가 전국 26군데에 퍼져 있다. 지난 2월부터는 유선방송 채널을 통한 경마 실황중계를 시작해 방 안에 앉아서 미리 터놓은 계좌를 이용해 전화로 마권을 구입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경마 이용객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1150만명이었던 이용객이 올해 들어 지난 9월까지만 이미 975만명을 돌파했다. 이에 대해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골방에 하우스를 차려놓고 고스톱판을 벌이는 주부도박단의 성행보다는 카지노, 경마, 경륜, 복권 등을 합법적으로 열어주는 게 더 낫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레저스포츠가 아니라 거대 도박판

그러나 현실은 ‘건전한 레저스포츠’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경륜은 5만원, 경마는 10만원으로 베팅액을 제한하고 있지만 경기장마다 1천여개에 이르는 경주권 구매창구를 옮겨다니며 고액을 거는 꾼들로 넘쳐난다. 한국마사회 관계자는 “베팅한도를 제한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며 “하루 15만여명이 이용하는데 일일이 확인해 한도를 제한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사행산업은 불황을 타지 않는다. 오히려 불황기일수록 더 잘된다. 그러나 한국의 사행산업이 브레이크 없는 고속 팽창을 거듭하고 있는 데는 정부의 방관 또는 조장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의 정선 카지노는 임시 스몰카지노다. 내년 말에 지금보다 3∼4배 시설이 큰 메인카지노가 개장될 예정이다. 게다가 내년 4월 경정(모터보트 경주)까지 도입되고 온라인복권사업이 시작되면 5대 사행산업(경마, 경륜, 카지노, 복권, 경정)의 연간 매출액이 10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행산업이 국가 기간산업화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에 따르면, 경륜의 경우 한달 12번의 경주 중 10번 이상 경륜장에 가는 사람이 고객의 30%며, 한번 갔을 때 평균베팅금액도 30만원대에 이른다.

안방서도 경마·경륜에 베팅 가능

지난 11월16일 낮,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경륜장 주변 주차장. 쌀가게 로고가 적힌 차량이며 배추 트럭, 개인택시 등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물론 공원 산책을 나온 차량이 아니다. 주차관리인의 설명은 간단했다. “저 차량 주인들요? 뻔하죠 뭐. 저기 경륜장에 다 가 있죠.” 경륜장 안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발 옮길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댔다. 층계마다 철퍼덕 주저앉아 적중 예상지를 펴놓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며, 아기를 들쳐업은 채 경주 중계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아주머니, 그리고 한쪽에는 젖병 문 아기를 차가운 바닥에 눕혀놓고 배당률을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는 젊은 여성도 있다. 경주권 구매창구 앞에 줄을 선 넥타이 차림 중년 남자의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내가 지금 좀 바쁜데. 서류는 팩스로 보내세요. 일 때문에 지금 다른 데 와 있거든요.”

탕, 하는 총성과 함께 경주가 시작됐다. “야, 7번 파이팅!” “치고나가, 나가! 3번.” 결승선을 앞두고 불꽃 튀는 막판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들어간다∼아, 2번 좀더, 더.” 거의 동시였다. 그야말로 깻잎 한장 차이로 1, 2위가 판가름나자 환호와 탄식이 엇갈렸다. “여기서 보니까 스릴도 있고 재미있네.” 처음 경륜장을 찾은 듯 누군가 혼잣말처럼 내뱉자, 경주권을 신경질적으로 찢어버리며 뒤돌아서는 다른 사람이 쏘아붙였다. “스릴은 무슨 스릴. 다 돈 먹으러 오는 거지….” “아무리 연구해도 우리는 속게 돼 있어. 결국 저 애들(선수들)끼리 하는 작전을 우리가 알아맞히는 게임이지.” 이렇게 말하던 중년 남자도 베팅 마감이 다가오자 어느새 투표소 앞에 줄을 서 돈을 들이밀고 있었다. 경주권 발매 마감을 5분 남겨두고 4억원이던 이날 4번째 경주 매출액은 마감이 임박하면서 6억, 7억, 그리고 10억원으로 숨가쁘게 올라갔다.

잠실경륜장 입장객은 지난 한해 동안 354만명이었으나 올 들어 11월 중순까지 428만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매출액도 지난해 1조2천억원이던 것이 올해 이미 1조5천억원을 돌파했다. 경마와 마찬가지로 폐쇄회로TV를 통해 경주를 중계하는 장외사업소 12곳이 속속 문을 열면서부터다. 장외사업소는 서울과 수도권을 거쳐 최근 대전에도 개설됐다. 지난해 11월에는 경남 창원경륜장이 개장했다.

이런 와중에 잠실경륜장 앞에서는 즉석복권 판매 좌판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사행산업 종목 가운데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게 복권이다. 현재 9개 기관에서 추첨식, 즉석식을 포함해 14종류가 나와 있는 복권 총매출액은 지난해 5247억원이었다. 올 상반기에는 3414억원을 기록했다. 내년에 온라인복권 ‘로토’가 등장하고 복권 발행기관마다 인터넷 즉석복권을 내놓을 경우 매출액이 1조2천억원으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로토는 당첨자가 안 나올 경우 당첨금이 누적되기 때문에 수백억원까지 당첨금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복권 열풍을 예고하고 있다.

복권은 ‘찍어내기만 하면 가만히 앉아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로 각 기관마다 앞다퉈 발행에 나서고 있다. 아예 시장질서라는 게 없다시피한 상태다. 최근 주택은행이 20억원의 당첨금을 내걸고 ‘밀레니엄 복권’을 발행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자 다른 기관도 수십억원대의 고액 당첨금을 내걸고 이벤트복권을 남발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은 복권발행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채 국내 최고의 당첨금인 40억원짜리 ‘플러스 플러스복권’을 발행하고 있는 형편이다. 경쟁적인 당첨금 인상 등 과열경쟁은 재정 낭비로 이어진다. 올 상반기에 찍은 13억8천만장의 복권 가운데 65%가 폐기처분됐다.

서민 호주머니 털어 재정수입 챙긴다

정부가 재정수입만 노리고 각종 사행종목을 마구 허용하다보니 명분과 논리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정부관계자는 경정 도입 이유를 묻자 “비싼 돈을 들여 조성한 조정경기장을 활용하고 수상스포츠를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물은 고이면 썩게 마련이므로 경정이라도 벌이는 게 낫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러한 재정수입이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채워진다는 점이다. 이미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한 것일까? 정부관계자는 “사행산업을 규제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정부가 이제 와서 막겠다고 나선다면 반발만 불러일으키지 않겠느냐”고 털어놨다.











































































국내 사행산업 시장규모 추이
1997년1998년1999년2000년2001년
(추정치)
매출액
(억원)
경마32,10328,63132,95444,39250,000
경륜3,0003,3845,95612,24318,000
카지노---90945,000
복권3,6643,2143,3314,0276,000
연간이용객
(만명)
경마8249561,0081,1551,300
경륜161210340354360
카지노---2083

자료 : 한국레저산업연구소, <레저백서2002>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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