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서 나와 여기로 온 거요.”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물었다. ‘행복’이란 단어에 곤란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말했다.
‘그 집’은 김혜연(35·가명·표 ❽번)씨가 7살부터 20년 동안 살았던 서울 화곡동 집. 방 한 칸에 엄마, 여동생 셋이 함께 지냈다. 화장실이 집 밖에 있어 추운 겨울 아침, 턱을 딱딱 부딪치며 볼일을 봤다. 바가지 목욕 대신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 샤워기로 목욕하고 싶었다. 엄마를 찾는 빚쟁이들을 견뎌야 했다.
‘여기’는 서울 금천구 가산동 구로직장여성아파트. 1988년에 지어진 39.4m²(11.9평)의 작은 집이다. 방 두 칸에 작은 거실 겸 부엌, 욕실이 딸려 있다. 한집에 2명이 산다. 김씨가 쓰는 건 그중 서너 평 남짓한 큰 방이다. 2008년, 28살에 이곳으로 왔다. 보증금 6만3천원(당시 가격, 현재는 40만원), 임대료 6만원(당시 가격, 현재는 7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 때문에 ‘그 집’을 떠나 ‘여기’로 올 수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하는 직장여성아파트는 1988~89년에 지어졌다. 집이 없는 여성노동자 가운데 월평균 소득이 210만원 이하이면 선착순으로 입주할 수 있다. 서울 200명을 포함해 부산, 대구, 인천, 경기도 부천, 강원도 춘천 등 모두 6곳에 1632명이 살 수 있다. 미혼 여성에게 우선순위가 있고, 실제 거주자 대부분도 미혼 여성이다.
그런데 거주한 지 8년에 접어드는 김씨는 ‘여기’를 나가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2012년부터 근로복지공단은 1·2차로 나누어 그녀를 포함한 47명에게 아파트에서 나가라고 명도소송을 제기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정한 관리규정은 계약 기간 2년에 한 차례 갱신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원칙에 따라 김씨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다.
2014년 9월 대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아파트 공실이 있거나 대기자가 없을 경우 계약을 연장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에 따라 형편이 어려운 입주자들은 계약을 연장해가며 살 수 있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2014년 12월 관리규정을 고쳐 ‘(거주 기간) 최장 4년’이라는 원칙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명록이 근로복지공단 임금채권부장은 말했다. “구로직장여성아파트는 대기자가 163명에 달합니다. 그분들과의 형평성도 고려해야지요. 지금 남아 계신 분들 가운데 길게는 20년 넘게 여기서 살고 계신 분도 계세요. 마치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지만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월세 25만원 “어떻게 낼지는 모르겠다”
김씨도 나가려고 다른 곳을 알아봤다. 2014년 10월 서울시가 마련한 1인 여성가구를 위한 ‘천왕여성안심주택’은 96가구만 모집했다. 월평균 소득이 230만원 이하인 경우 우선순위가 있었다. 그러나 동일 순위 내 경쟁시 ‘연령이 낮은 자’에게 우선순위를 줬다. 96가구 공급에 810명이 몰렸다. 입주 신청자 가운데 서류 심사 대상이 된 사람의 연령을 보니, 중소기업 근무자에게 우선 공급되는 28가구는 1989년 이후 출생자, 일반 공급 68가구는 1986년 이후 출생자만 입주할 수 있었다. 서울 면목동에 있는 미혼 여성 전용 임대아파트 역시 만 26살 이하만 살 수 있다. 서울에 있는 여성 전용 아파트 가운데 30살이 넘은 여성이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없다. 구로직장여성아파트가 유일한 예외다.
명도소송에서 승소한 근로복지공단은 지난해 겨울 떠나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강제퇴거 집행을 하겠다’는 통지를 보냈다. 예고했던 지난해 12월16일, 주거단체·시민단체 등이 입주자들과 함께 강제퇴거 집행을 막아서면서 공단은 강제집행을 2월 말, 3월 말 등으로 보류해왔다. 그러나 “사정은 다 어렵다. 나가야 한다”는 공단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
소송 과정에서 34명은 이미 아파트를 떠났다. 떠난 사람들의 주거는 어떻게 됐을까. 근로복지공단의 ‘퇴거 방침’에 따라 아파트를 떠난 34명 가운데 연락이 닿은 14명의 주거비용과 주거상태를 알아봤다. 2명은 문 열면 바로 방이 나오는 근처 쪽방으로 이사갔다. 1명은 월 25만원짜리 고시원으로 갔다. 다세대주택이나 원룸으로 떠난 5명 가운데 3명은 보증금을 대출받아야 했다. 갈 곳이 없어 결혼한 동생네 방 한 칸에서 더부살이하게 된 이가 1명,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전남 장흥)과 친척집(충남 논산)으로 내려간 사람이 2명이다. 다른 3명은 결혼과 함께 이주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인 이지영(39·가명)씨는 근육무력증으로 종일제 일은 하지 못하고 시간제 일만 할 수 있다. “자꾸 날아오는 강제집행 통지서가 불안해서” 아파트를 떠났다. 구로직장여성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이면 가는 곳에 있는 원룸을 구했다. 보증금 600만원은 대출받았다. 아직 갚지 못한 학자금 100만원 빚은 따로 있다. “매달 월세 25만원을 내야 한다. 어떻게 낼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남아 있는 13명 그녀들도 ‘여기’에서 나가면 비슷한 경로를 밟을 수밖에 없다. 김혜연씨는 천왕여성안심주택 입주심사에 떨어진 뒤 다른 집을 알아봤다. “쪽방이나 고시원이 아니라면, 보통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40만원 수준이에요. 매달 월세 40만원을 내야 하면 저는 아마 신용불량자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고시원 평당 월세 평균가격은 15만2585원(민달팽이유니온 2014년 실태조사)이다. 고시원에 살아도 한 달에 15만원 이상은 내야 한다. 최하 수준의 주거를 선택해도 주거비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빚진 가족이 기대는 미혼의 딸
김씨의 월급은 160만원이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2000년, 지금 다니는 회사에 들어갔다. 직원 30여 명의 작은 제조업체다. 회사를 다니면서 야간 전문대학을 다녔다. 100만원에서 시작한 월급은 이제 160만원이다. 15년 동안 60만원 올랐다.
그녀는 가족의 덫에 걸려 있다. 엄마는 2007년 김씨와 여동생을 데리고 한 오피스텔을 찾았다. 2천만원을 빌린다고 했다. 엄마니까, 문서에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문서를 내민 사람은 “보증 함부로 서면 안 된다”고 말했다. 몇 달 뒤부터 돈 갚으라는 독촉 전화가 왔다. 그때 찍은 지장이 “함부로 서지 말라던” ‘연대보증’이었음을 독촉과 협박 전화를 받은 뒤에야 알았다.
연이자가 24%지만, 법정 이자를 넘지는 않는다. 합법의 영역 안에서 그녀는 엄마가 빌린 2천만원의 이자 40만원을 매달 갚고 있다. 아직 원금은 갚아보지도 못했다. 신용불량자가 된 엄마의 생활비 30만원, 엄마의 휴대전화 요금 7만원도 매달 김씨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언젠가 이 아파트를 떠나야지’라는 생각에 꼬박꼬박 내고 있는 청약저축 10만원, 아파트 임대료와 공과금 10만원, 보험료 17만원 등을 제하고 나면, 월급에서 남는 돈은 50만원이 채 안 된다.
가족의 덫은 나머지 12명도 비슷하다. 결혼한 형제가 있어도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사고의 해결사 역할은 결혼하지 않은 그녀들에게 돌아온다. “결혼한 오빠는 새언니 눈치를 보면서 돈을 마음대로 못 써요. 여동생은 맨손으로 결혼한데다 일도 하지 않아서 친정 문제로 제부한테 손을 벌리기 힘들죠.”
13명은 마치 같은 부모와 같은 형제를 가진 듯 비슷한 말들을 쏟아냈다. 부모님 병원비를 대야 해서(표 ❷·❻·❾·❿번), 동생이 횟집을 차려야 해서(표 ❾번), 절도·폭력 등으로 경찰서에 드나드는 동생 합의금을 마련해야 해서(표 ❻번) 그녀들은 전화만 걸면 몇백만원씩 내주는 대부업체에 손을 벌렸다.
연이자 2~3%대 저리 대출은 그녀들의 몫이 아니다. “신문이 매일 떠들어대는 전세자금대출 등은 직장이 탄탄한 대졸자 이야기예요. 그 대출도 뭐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저희는 한번 받아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네요.” 보험설계사로 일하며 헌 옷을 주워다 벼룩시장, 온라인 중고장터 등에 팔며 벌이를 마련하는 안지영(38·가명·표 ❶번)씨가 말했다. 저축은행 10% 이상, 대부업체 20% 이상. 그녀들에게 익숙한 이자율이다.
월급 역시 쉽사리 오르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고졸 여성의 일자리는 경력을 인정받는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경영자는 채용을 부담스러워한다. 일하면서 자기계발을 하기도 쉽지 않다. 문은희(41·가명·표 ❷번)씨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1993년 서울 신림동 한 회사의 경리직에 취업했다. 그때 월급이 30만원이었다. 20대 때는 급여를 올려가며 방이동, 도곡동 등의 회사로 이직할 수 있었다. 대림동 회사에서 5년 동안 일하면서 급여는 80만원에서 120만원까지 올랐다.
오래 일하며 신뢰관계를 쌓아온 터여서 사장에게 “야간 전문대를 다니려고 한다. 1시간만 일찍 퇴근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했다. 다음해 전문대를 졸업한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그녀와 같은 일을 하고 그녀가 더 잘 아는 일을 하는데, 신입사원의 월급이 더 많았다. 올해 초 2년 계약기간이 다해 계약이 종료된 회사에서의 월급은 125만원이었다. 2006년 이후 10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월급은 5만원 올랐다. 지난 1월 해고된 뒤부터 지금까지 20여 곳에 원서를 냈다. 연락이 온 곳은 서너 곳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면접을 본 뒤 채용되지 못했다.
아파트를 나가지 못하는 13명의 그녀들 가운데 5명이 실업계 고등학교를 마쳤다. 1명은 중학교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나머지 7명 중 4명은 회사를 다니면서 야간 전문대나 학점은행제를 통한 사이버대학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전문대를 나와도 첫 월급이 조금 더 많을 뿐, 급여가 오르지 않는 건 비슷하다.
박지현(40·가명·표 ❻번)씨는 1997년 무역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며 어렵게 야간 전문대를 마쳤다. 90만원 월급은 10년 뒤 180만원까지 올랐다. 회사가 폐업해 옮기면서 월급은 200만원까지 올랐다. 역시 회사가 폐업해 옮겨온 지금의 회사에서 월급은 다시 180만원으로 내려갔다. 일하는 사업장의 규모는 점점 작아져 지금 일하는 곳은 직원이 4명이다.
국가는 저소득·저학력 미혼 여성의 주거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 근로복지공단이 ‘장기 거주자 퇴거’를 종용하는 배경에는 기획재정부와 감사원의 재촉이 있다. 기획재정부는 2013년 근로복지기금 존치 평가를 하면서 직장여성임대아파트 사업과 관련해 “중기적으로 리모델링 등 재투자가 필요한 시점에서는 종료를 사전 전제하거나, 가격이 일정 수준을 상회할 경우 매각하는 원칙을 세워 구조조정하는 조건으로 사업을 유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근로복지공단은 수익이 나지 않는 아파트의 매각 등을 검토했다. 아파트 입주 대상자 소득 기준을 점차 완화하고 임대료를 올리는 것 역시 수익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한 방침이다. 명록이 부장은 “내년에 또 근로복지기금 평가가 예정돼 있다. 내년에 또 지적된다면 우리는 또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정책에 밀려 공단으로서도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 삶은 나아지지 않는 거죠”
입주자 황영희(36·가명 표 ❿번)씨는 “애초 복지로 마련된 아파트지만, 지금 우리의 복지보다는 수익만 생각하느라 입주자들의 사정도 생각하지 않고 내보내는 데만 급급한 것 같다”고 말했다. 30살 이상 저임금 독신여성을 위한 주거 공간을 늘리면 좋겠지만, 정부는 그런 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 “열심히 사는데 왜 삶은 나아지지 않는 거죠.” 그녀들이 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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