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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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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펼치는, 소통과 공감의 책읽기

황량한 시대를 건너는 방법으로 ‘함께 읽기’를 택한 이들이 이야기하는 공독의 즐거움과 의미
등록 2014-11-21 15:45 수정 2020-05-03 04:27
함께 책 읽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내밀한 개인적 독서에서 소통하는 사회적 독서로, 독서의 패러다임도 변하고 있다. 지난 11월12일 서울역 인근 숭례문학당 사무실에서 낭독모임을 하고 있는 독자들의 모습. 정용일 기자

함께 책 읽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내밀한 개인적 독서에서 소통하는 사회적 독서로, 독서의 패러다임도 변하고 있다. 지난 11월12일 서울역 인근 숭례문학당 사무실에서 낭독모임을 하고 있는 독자들의 모습. 정용일 기자

독서가 스펙이 되는 시대다. 기업에서는 직급별 필독서를 통해 인사관리를 하고 학교에서는 입학사정관 전형을 통과하기 위해 아이들이 독서 포트폴리오를 관리한다. 한때 기성 권력에 균열을 내는 전복의 무기로 기능했던 책이 오늘 한국 사회에선 잘 짜인 자기계발의 틈새를 메꾸는 이음새로 추락한 처지다.
“책을 읽은 뒤 최악의 독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최악의 독자라는 것은 약탈을 일삼는 도적과 같다. 결국 그들은 무엇인가 값나가는 것은 없는지 혈안이 되어 책의 이곳저곳을 적당히 훑다가 이윽고 책 속에서 자기 상황에 맞는 것, 지금 자신이 써먹을 수 있는 것, 도움이 될 법한 도구를 끄집어내 훔친다.”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저자와 소통하지 못하는 독서, 지식을 체득하지 못하고 정보를 약탈하는 독서는 죽은 독서일 뿐이다.
다시 책의 복권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함께, 소리내어 읽고, 책에 대해 말하는 이들이다. 골방의 독서에서 벗어나 광장의 독서를 꿈꾸는 이들이다. ‘나’를 위한 독서를 넘어 ‘우리’를 위한 독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이들은 도처에서 ‘공독’(共讀)을 통해 다시 책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이 황량한 시대를 건너는 방법으로 ‘함께 읽기’를 택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공독의 의미를 짚어보았다. _편집자


지난 11월12일 늦은 저녁, 서울역 앞 작은 사무실에 8명의 남녀가 모여들었다. 낭독이 시작되자 누군가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책을 반듯하게 쥔다. 누군가는 빠르고 리드미컬하게 책을 읽어 내려가고 누군가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의미를 새긴다. 책 읽는 모습이 모두 다르듯 얼굴에 새겨진 세월의 무늬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모두 다른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600쪽 분량의 두툼한 인문서적 (강유원)를 손에 쥔 모습이다.

낭독모임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주부터다. 5년차 회사원 경민성(34)씨는 “고갈되고 공허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책을 좋아해 소설을 한 편 쓰는 것이 삶의 목표일 정도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제대로 책 한 권 들춰보기 어려웠다. 온종일 엑셀 파일 속 숫자만 들여다보는 삶이 고단했다.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같이 해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찬반의 논리를 곱씹어보기도 하고

“고미숙 선생이 쓴 를 보면 혼자 밥을 먹으면 그 에너지가 다 흡수가 안 되고 책도 마찬가지라는 취지의 문장이 나오거든요. 저도 집에서 혼자 책을 읽는 것보다 사람들 속에서 책을 읽어야 기운을 받는 것 같더라고요.”

단순히 혼자 독서하기가 어려워서 모임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책읽기 모임을 통해 다양한 이들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처음에 인문·사회 분야 서적을 두고 토론을 할 때면 반대 논리를 펴는 분들께 답답함을 느꼈어요. 그렇지만 책이라는 매개가 있으니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더군요. 토론을 위해 직접 논제를 뽑는 과정에서 객관적으로 찬반의 논리를 곱씹어볼 수도 있고요.” 그는 낭독모임 외에 또 다른 독서토론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일주일에 두 차례 저녁 시간을 책읽기 모임에 안배한다.

‘함께 읽기’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적어도 현대의 많은 독자들에게 독서는 내밀한 자기 체험에 가깝다. 세계적 작가이자 ‘책 덕후’인 알베르토 망구엘이 저서 에 적은 독서 체험은 ‘혼자 읽기’와 ‘함께 읽기’의 차이를 잘 설명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공부를 위한 독서, 지식을 쌓기 위한 독서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매체의 발달로 지식은 어디에나 널려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대단치 않습니다. 이제 소통을 위한 독서를 해야 합니다.” -신기수 숭례문학당 대표


그는 원래 혼자 읽기의 예찬자였다. “나는 나 자신의 독서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독서 장소는 바로 나의 방바닥이었다. 독서는 나에게 은둔의 구실을 제공하거나 적어도 어린 시절 내내 나를 짓눌렀던 고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책 읽기는 원래 낭독이고 대화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휴대 가능한 상품이 되면서 독서는 개인의 즐거움으로 의미가 퇴색됐고 독자는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했다. 박승화 기자

고대 그리스에서 책 읽기는 원래 낭독이고 대화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휴대 가능한 상품이 되면서 독서는 개인의 즐거움으로 의미가 퇴색됐고 독자는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했다. 박승화 기자

망구엘이 ‘함께 읽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은 서점 점원으로 일하던 시절, 작가 호르헤 보르헤스를 만나고 나서다. 시력을 잃어가는 문호에게 대신 책을 읽어주며 알게 된 함께 읽기의 즐거움을 같은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보르헤스가 나에게 안겨준 텍스트 그 자체였다기보다는 광범위하면서도 전혀 막힘 없이 해박하고, 매우 재미있고, 가끔은 잔인하지만 거의 언제나 무시할 수 없는 그의 논평이었다. 그 작품들은 보르헤스의 반응과 나 자신의 반응에 대한 기억으로 더욱 풍요롭게 되었다.”

반드시 대문호와의 독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자기만의 체험을 넘어, 책을 매개로 한 소통이 이뤄질 때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감격이 그의 문장에 각인돼 있다. ‘소통하는 책읽기’를 향한 욕구는 한국 사회에서 급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학교와 지역 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독서토론 모임은 지난 몇 년 사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2년 10만 독서마니아 클럽을 결성해 150만 명의 독서마니아를 양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성인의 한 해 독서량 평균 9.2권(2013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독서량 꼴찌인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에 대해 한 출판 전문가는 “대개의 독서토론 모임이 입시 준비용 내지 자기계발식 독서에 초점을 맞춘 모임으로 꾸려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독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최근 를 펴낸 신기수 숭례문학당 대표는 “독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강조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공부를 위한 독서, 지식을 쌓기 위한 독서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매체의 발달로 지식은 어디에나 널려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대단치 않습니다. 이제 소통을 위한 독서를 해야 합니다.” 신 대표는 이런 독서야말로 “자신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지 고민하는 개인적인 활동으로서의 독서와 구별되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하는 사회적 활동으로서의 ‘공독’”이라고 설명한다. 단순한 자기계발식 독서토론을 넘어 ‘사회적 독서, 집단독서’일 때 공독이 가치 있다는 이야기다.

과학 교사 김선미(31)씨는 공독을 통해 안온한 일상 바깥을 고민하게 됐다. 그는 최근 책읽기를 넘어 신문읽기로 영역을 확장했다. 대학 때도 신문은 거의 읽지 않았다. 정치는 잘 모르는 이야기였고 신문이 다루는 대부분의 소식은 우울했다. 문학·자기계발서 위주의 독서 모임에 반년 가까이 나가면서 ‘현실’과의 접점이 아쉬웠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 사회와 동떨어진 책만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지난 9월 김씨는 칼럼 공부모임을 시작했다. 김씨는 즉각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읽다보니 시사 이슈의 벽도 그리 높지만은 않았다. 멀게만 느껴지던 정치·국제 뉴스와의 거리도 좁힐 수 있었다. 김씨는 “나와 직접 관련된 사람의 일이 아니면 큰 관심이 없었다”고 돌이켰다. “칼럼 읽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 현실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어떻게 하면 이 세계가 좀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고민하며 읽고 있어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상처를 견뎌낼 힘을 키워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책읽기 모임이 가진 힘입니다.” -하승우 땡땡책협동조합 공동대표


공독은 근대 인쇄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출판업의 상업화가 퇴색시킨 ‘독서’의 가치를 되찾아오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서양의 고대와 중세에 읽기는 소리내어 읽기, 즉 낭독을 의미했기 때문에 필사 문화에서 저자와 독자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화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공유된, 즉 같이 나누는 담론이라는 대화를 포장된 정보, 휴대 가능한 상품으로 번역’한 인쇄술은 근대인을 획일적이며 복제 가능한 물품의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시켰다.” 의 저자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근대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원래 ‘낭독’과 ‘대화’에 가까웠던 독서 문화가 개인적이고 내밀한 경험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자율과 자치를 추구하는 독서 공동체

독서가 가진 힘은 한때 혁명의 동력이었다. “구체제 프랑스의 보통 사람들이 금서 문학에 심취함으로써 지배 계층을 지탱하는 신성한 권력 구조를 균열, 붕괴시켰다.”(로버트 단턴) 살롱과 카페 등을 중심으로 여론이 형성됐고 혁명 발발 직후까지 프랑스의 시골 민중은 카바레에 가기보다 바깥의 모임에서 책읽기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육 교수는 “각 개인이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해 사회와 정치의 현안에 대해 비판하고 논쟁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독자들의 공동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꾸려진 땡땡책협동조합은 육 교수가 설명하는 ‘책 읽는 공동체’의 비전을 실천한다. 단순히 책을 읽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이웃과 연대하며 자율과 자치를 추구하는 독서 공동체”를 지향한다. ‘국가폭력’ ‘기본소득’ 등 굵직한 사회 이슈를 중심으로 한 기획독서회를 만들고 경남 밀양 송전탑처럼 연대가 필요한 공간을 함께 찾아간다. 공식 발족한 지 1년밖에 안 됐지만 실회원이 192명이다. ‘평범한’ 시민과 ‘운동하는’ 시민의 눈높이를 맞춰 모임을 꾸려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읽기 모임은 건조한 지식의 공동체가 아니다. 하승우 땡땡책협동조합 공동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화 이후의 공론장에서 지식과 담론을 나눌 순 있었지만 (인간적으로) 서로를 지켜볼 수 있는 장은 좁아졌습니다.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상처를 견뎌낼 힘을 키워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책읽기 모임이 가진 힘입니다.”

강정은(39)씨에게도 책읽기 모임은 우정과 위로의 공동체다. 그는 지난 6월부터 또래 엄마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인문·사회 분야의 책을 읽고 있다. “세월호 사고 이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참여하게 됐어요. 아이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그는 학교에 다닐 때도 손에 잡지 않았던 책을 이웃과 함께 읽으며 ‘종교적 체험’만큼 스스로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경쟁의 대상이던 엄마들과 공동체가 된다는 게 좋은 경험”이다.

자원봉사, 집회, 토론…. 모두 세월호 이후 처음 참여한 일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세상이 내 아이에게 좋은 세상인 걸 전에는 말로 표현을 못했어요. 막연하던 가치들을 책으로 읽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니까 전에 모르던 ‘내’가 생기고 ‘우리’가 생긴다고 해야 하나요.”

‘내’가 생기고 ‘우리’가 생기고

신기수 대표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연이은 보수 정부 체제에서 진보 진영에도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80년대 이후 국민을 설득하기보단 도덕적 우위를 중심으로 계몽하려고만 하면서 지지를 잃어온 게 아닐지…. 원점에서 자신을 돌아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정치 학습의 장이 있긴 하지만 일반 시민에게 문턱이 높습니다. 문턱을 낮추고, 정치적 인문 교양을 갖출 수 있는 공간이 더 늘어나야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 참고 문헌 (알베르토 망구엘·2000), (신기수 외·2014), (육영수·2010), (경기도중등독서토론교육연구회교사모임·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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