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의 식구들이 늘어나니까 자리 만들어주려고 손쉽게 할 수 있는 사업을 하는 게 아닐까요.”
10월7일에 만난 한 CHQ(냉간압조용선재)업체 사장 ㄱ씨는 담배부터 꺼냈다. CHQ업체들은 포스코로부터 받은 선재를 가공해 볼트·너트를 만드는 파스너(fastener)사에 납품을 한다. 선재는 국수 가락처럼 선으로 된 철강재를 말한다. 파스너사들은 이것으로 볼트·너트를 만들어 현대자동차와 현대차 협력업체에 납품한다. 주차장에 세워진 제네시스·쏘나타 한 대마다 이렇게 전국에서 만든 수천 개의 볼트·너트가 들어간다.
<font size="3">파스너사의 영업이익률 4%, CHQ업체 3% 이하로</font>
ㄱ씨는 현대차 쪽에 자신의 회사 이름이 알려지면 사업을 접어야 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가 담배를 끄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현대차가 올해 동부특수강 인수를 결정하고서 파스너사들 물량을 다 시장조사해갔다. 동부특수강을 인수하면 파스너사들에 원재료를 공급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의 말대로 현대차그룹이 동부특수강을 손에 쥐면, 다른 CHQ업체와 파스너사들은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짙다. 그동안 납품을 받던 수요처인 현대차그룹이 원재료까지 직접 공급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포스코→동부특수강→파스너업체→현대·기아차로 이어지는 공급 라인이 현대제철→동부특수강→파스너업체→현대·기아차로 바뀌게 된다(그림 참조).
인수 이후에 대해 ㄱ씨는 이렇게 전망한다. “파스너사들은 보통 원자재를 구매할 때 동부특수강이나 세아특수강 등을 경쟁시켜 원가를 절감한다. 현대차에서 납품단가를 낮춰도 이를 통해 원가경쟁력을 가지고 이윤을 남긴다. 그런데 현대차가 원재료 가격까지 알고 공급하게 되면 파스너사들은 원료 구매 결정권조차 잃게 되고, 납품단가를 조정해 이윤을 남길 폭도 사라진다.” ㄱ씨는 파스너사의 영업이익률은 4%, CHQ업체의 영업이익률은 3% 이하 수준이라고 했다.
동부특수강 인수는 현대차그룹 수직계열화 확장의 최전선이다. 동부그룹은 그룹 유동성 위기로 인해 올해 동부특수강을 팔기로 했다. 동부특수강 인수전엔 경쟁업체인 세아특수강뿐만 아니라 현대제철도 뛰어들었다. 현대차는 현대제철을 통해 자동차 강판을 만들어 ‘쇳물에서 자동차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뒤, 강판 이외에 남아 있는 철강재인 선재 등에도 진출을 노리고 있다. 10월23일 가장 높은 입찰가를 써낸 회사가 동부특수강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결정된다. 철강업계는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터 매입에 10조원 넘게 쓴 현대차그룹이 이번엔 또 얼마나 써낼지를 두고 관심이 많다.
현대차 핵심 계열사인 현대제철 입장에선 동부특수강 인수로 얻을 이점이 많다. 현대제철은 지난해 3고로를 완공하면서 쇳물 생산량이 늘었다. 지난해 하반기엔 당진제철소에 특수강 공장(100만t 규모)도 짓기 시작했다. 늘어난 쇳물을 소화하는 데 특수강 공장이 큰 몫을 차지하는데다 이 공장에서는 선재를 생산한다. 선재 시장은 그동안 포스코의 텃밭이었다. 포스코가 생산하는 270만t 가운데 동부특수강으로 가는 비중만 50만t에 이른다.
<font size="3">발등에 불 떨어진 세아그룹</font>현대제철은 동부특수강을 인수한 뒤 자신의 특수강 공장에서 나오는 물량을 현대차에 납품되는 볼트·너트를 만드는 데 공급한다는 입장이다. 지난 9월 박승하 현대제철 부회장은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국제 철강 및 비철금속 산업전’에서 “2차 공정(하공정)까지 확보해야 특수강 생산체계가 완성된다”고 말하는 등 적극적인 인수 의지를 드러냈다. 수직계열화를 위해 제철소를 만들었는데, 늘어난 생산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 또다시 수직계열화를 추진하는 셈이다.
세아그룹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세아특수강에서 만드는 선재 역시 대부분 현대차 쪽으로 향하는데, 동부특수강이 현대차에 넘어가면 납품 물량 경쟁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세아특수강은 동부특수강을 직접 인수해 현대차가 이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막고 싶어 한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의 현대하이스코가 자동차 강판 사업에 뛰어들면서 동국제강이 어려워진 사례가 있다”는 말로, 동부특수강 인수가 불러올 파장을 에둘러 설명했다. 동국제강은 전세계의 철강 공급 과잉 여파 속에 2011년 8조6667억원이던 매출액이 2013년 6조6908억원 수준으로 줄어든 상태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파스너업체의 임원 ㄴ씨 역시 “세아특수강의 타격이 가장 클 것이다. 납품하는 업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현대차 눈치를 보고 원자재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볼트·너트를 만드는 파스너업체들 역시 대기업의 시장 다툼 속에서 희생당할 가능성이 크다. ㄴ씨는 자신이 단순 임가공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현대차가 원재료를 만드니까 우리한테 싸게 줄 테니 (납품) 가격을 깎자고 나올 수 있죠. 처음에 싸게 풀면 저희 입장에서 손해날 게 없겠지만 나중에는 가공비만 주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볼트는 깎거나 두드리는 단조로 만든다. 파스너업체는 처음엔 깎다가 기술 개발을 통해 단조로 볼트를 만들면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원가가 크게 절감된다. 파스너업체들은 이를 통해 이익을 내고 투자를 한다.
“그런데 원재료 값을 아는 곳에서 과연 영세업체의 개발비를 인정해 좋은 값으로 쳐줄까요. 개발 당시에만 쳐주지 않을까요”라고 ㄱ씨는 되물었다. 결국 개발 의욕이 떨어져 원재료를 받아 가공만 하는 임가공업체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애초 특수강 공장을 건설하면서 “국내 부품산업의 글로벌 성장 기반을 강화하는 한 차원 높은 자동차산업 협력 생태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납품업체들의 반응과는 딴판이다.
또 다른 CHQ업체의 대표 ㄷ씨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현대차가 CR(단가 인하)를 하면 우리까지 타격이 있다. 파스너사들이 와서 ‘현대차랑 네고(협상) 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말하고 우리한테 네고 해달라고 한다. 2차, 3차 협력업체들이 CR 때문에 고민하는 걸 많이 봐서 걱정이다.” CR는 제조원가 절감을 위해 부품업체의 납품 가격을 해마다 낮추는 것을 말한다. 이제 원재료 값까지 현대차그룹이 통제할 수 있으니 단가 인하 폭이 더 커진다는 우려다. 이미 현대차 협력업체들 사이에선 현대차의 단가 인하 압력으로 적정한 영업이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많다. 영세한 업체들은 독일·일본 등 다른 자동차 회사에 부품을 수출하기 어렵기 때문에 현대차의 요구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다.
<font size="3">이미 영업이익 보장 안 되는데… </font>덤덤하게 말하던 ㄱ씨는 자신의 공장을 보여줬다. “저 기계로 파스너업체들이 원하는 규격을 맞춰 선재를 재가공합니다.” 공장엔 동부특수강에서 받아온 선재가 수북했다. “수직계열화를 해서 원가를 절감해 자동차 가격이 내려가면 현대차의 경쟁력은 높아지겠죠. 그런데 부품업체들은 현대차에 의존하면 할수록 힘들어집니다.” 20여 년간 파스너업체에서 일해온 ㄱ씨는 현대차의 수직계열화 여파를 직접 경험해보진 못했다. 그런데 그에게도 이제 거센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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