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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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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투표 합시다

골목복지·탈핵에너지 선거 공약 내세운 진보정당들,

보수층의 위험사회 막고 한국 사회 체질 바꿔가는 투표 호소
등록 2014-05-23 14:55 수정 2020-05-03 04:27
치타공 산악지대 반다르반 타운. 버마 정부와 라카잉 조직들은 방글라데시 라카잉족을 포함한 줌마족 불교도들을 아라칸 무슬림 주류 지역 ‘모델촌’으로 정착시키면서 갈등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치타공 산악지대 반다르반 타운. 버마 정부와 라카잉 조직들은 방글라데시 라카잉족을 포함한 줌마족 불교도들을 아라칸 무슬림 주류 지역 ‘모델촌’으로 정착시키면서 갈등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진보정당들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바지를 걷어올렸다. 쪼그라든 진보의 종아리를 호되게 치되, 싸리나무 회초리를 다시 땅에 심어 시든 진보의 싹을 틔워달라는 호소를 위해서다. 이들의 절박한 당부는 ‘줄투표’를 꺼리는 유권자들을 향한다.

예컨대 이런 유권자들. ① 안 되겠다. 정부·여당에 세월호 참사 책임을 물어야겠다. ② 그래.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등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광역단체장 후보들의 승리를 돕겠다. ③ 근데 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뭘 잘했다고? ④ 어림없지. 기초단체장, 광역·기초의원까지 죄다 새정치민주연합에 몰아주는 줄투표는 싫다.

진보정당들은 광역단체장 선거에선 ‘여권 심판 투표’를 하더라도, 광역의원·기초의원 선거에선 진보 후보를 키우는 ‘투자 투표’를 기대한다. 야권 지지자들의 ‘전략적 분리투표’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공익적 일꾼’의 필요성 공감

새삼 더 거론할 것도 없이 진보의 형편은 궁하다. 정당 해산 위기(통합진보당)에 처했거나, 당의 인지도가 낮은 원내정당(정의당)으로 있거나, 원외정당이란 벌판(노동당·녹색당)에 서 있다. “진보정치가 시대에 맞게 혁신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는 자기 고백의 상황에 내몰렸다. 진보정당의 위축은 국민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서민들의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과소 대표’되는 기형적 상황을 뜻한다.

세월호 참사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진보의 존재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도 됐다. 이번 참사는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력, 이윤 극대화, 자본을 위한 규제 완화, 공공성 경시 사회가 어떤 비극을 불러오는지 극명하게 각인시켰다. 마음속에 ‘노란 리본’을 단 많은 이들의 입에서 사람·인권·복지·생명·생태·공공성, 노동 존중 사회, 이런 가치를 우선시하는 ‘공익적 일꾼’의 필요성이 흘러나온다. 그간 양당 독점 구조에서 진보정치가 외쳐온 것들이다. 진보정당들은 바로 이것이 지방선거에서 ‘내 지역에 진보 심기’를 거듭 부탁하는 이유라 말한다. 천호선 정의당 대표의 얘기다.

“약자들을 지키고, 이윤이 지배하는 사회 원리를 바꾸는 것이 진보의 소명이다. 그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도 전에 진보정치가 주변화된 데 대해 국민에게 죄송할 뿐이다. 참사는 세월호만이 아니다. 기초수급 신청조차 못한 일가족이 목숨을 끊고, 홀로 남겨진 장애인이 화마 속에서 눈을 뜨고 고통스럽게 죽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 나라다. 진보정치가 이렇게 무너지면 이런 분들을 대변할 세력이 없어진다. 절실한 심정이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는 진보의 숨통을 열어줘야 한다고 했다. “진보가 제대로 혁신하지 못한 것은 부끄럽지만, 이윤·자본 논리에 저항해서 인간의 가치를 지키려는 진보세력에게 지방선거에서 한 번 더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노회찬 전 정의당 공동대표는 ‘우리 동네’ 지방자치부터 진보세력을 배양해 강자 독식 사회를 허물어야 한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강자가 더 강해지더라도 약자까지 함께 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됐다. 함께 사는 사회로 변화하려면 풀뿌리 지방자치부터 달라져야 한다. 지역 토호, 기득권 세력, 정치 자영업자들에게 지방자치가 모두 점령되면 안 된다. 지방자치에서부터 제대로 된 리더를 길러내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민주주의는 여러 개의 대안세력이 선거에서 경합하고, 시민들이 하나의 대안을 찾는 정치체제다. 하지만 많은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둘(여당·제1야당)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 유형에 익숙했다.

만약 원자력발전소가 터진다면

김경미 정치발전소 정책팀장은 대안세력을 위한 ‘장기 투자’를 강조했다. 지방선거는 광역단체장, 광역의원, 광역비례대표(해당 지역에 비례후보를 낸 정당에 찍는 투표), 기초단체장, 기초의원, 기초비례대표, 교육감 등 후보와 정당을 골라 분산투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노란 리본’을 단 많은 이들의 입에서 사람·인권·복지·생명·생태·공공성 등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공익적 일꾼’의 필요성이 흘러나오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엄마들 사이에선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터지면 공멸한다는 문제의식까지 느끼더라. 탈원전 등을 얘기해온 녹색당·노동당·정의당처럼 10~20년간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의 체질을 바꿔갈 정치세력을 키워야 한다. 제1야당은 여당과 1대1 선거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며 진보정당의 희생(선거 연대, 출마 포기)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제1야당이 정치제도 개혁을 통해 대안세력이 같이 설 수 있는 토대를 만들지도 않은 것 아닌가.”

손 교수는 진보의 존재 가치를 ‘소금’에 빗댔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의원 10명으로) 원내에 진출해서 우리 사회에 어떤 활력소가 됐는지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보수정당들이 정책 대결을 하지 않고 지역에 안주할 때 복지정책을 쟁점화한 것은 진보의 몫이었다. 당장 진보가 복지 문제를 관철할 힘을 갖지 못해도, 우리 사회와 정치 지형을 변화시키고, 보수정당이 귀를 기울이게 할 소금 같은 구실을 할 수 있다. 진보정치에 애정 있는 회초리를 때려달라.” 성장의 기회를 주는 회초리가 돼달라는 것이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온 듯’한 여건에서 선거를 맞은 진보정당들은 전국 모든 지역에 후보를 내진 못했다. 선택과 집중이란 이들의 전략은 곧 인물난과 낮은 당선 가능성이란 현실적 고민과 맞닿아 있다. 통합진보당은 여권의 종북 공세와, 성찰이 부족하다는 야권 내부의 시선까지 극복해야 한다.

통합진보당은 서울시장(정태흥)·경기지사(백현종)·인천시장(신창현) 후보 등 14명의 광역단체장 후보를 비롯해 진보정당 가운데 가장 많은 521명의 후보를 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선 당 소속 울산 동구청장·북구청장 재선과 함께, 전남 여수시·광주 광산구·전북 순창군 등에서 당선을 타진한다.

정의당·노동당은 5월13일 노동정치연대, 진보정치세력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 등과 함께 연대해 지방선거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서울·인천시장·경기지사 후보를 내지 않은 정의당은 전국 160여 명의 후보를 냈다. 정의당은 조승수 울산시장 후보의 선전과 배진교(인천 남동구)·조택상(인천 동구) 구청장의 재선을 노린다. 노동당은 울산·광주시장 후보를 포함해 100여 명의 후보군을 선보였다.

탈핵·생명권·성평등·땅과 사람을 살리는 농업·인권 등을 중시해온 녹색당에선 서형원 과천시장 후보를 포함해 전국 11명의 지역구 후보자(강원 춘천, 충남 홍성, 충남 천안, 경북 구미, 서울 서대문·은평, 경기 과천·의왕·이천, 전남 보성, 광주)와 12곳 시도의 광역비례대표 후보 등 총 23명이 출마한다.

구호가 아니라 정책에 반영돼야

진보정당들이 내놓은 공약은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정책 방향은 비슷하다. △안전규제 강화 등 재난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사회 △골목 구석구석까지 복지가 깃드는 골목복지 △탈핵 에너지로의 전환 △방사능과 유전자 조작, 유해 첨가물 없는 안전한 밥상, 방사능 걱정 없는 학교급식 조례 제·개정 △복지 공무원 확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무상급식 확대, 버스공영제, 동네 의료서비스 확대를 통한 공공성 강화 등이다. 이들 정책의 바탕에는 사람·생명 중시가 깔려 있다.

안동섭 통합진보당 사무총장은 “우리 당이 (시민들에게) 깊은 신뢰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정치에 대한 지지를 부탁드릴 것이다. 또 공안통치·유신세력을 심판해야 우리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전환도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회찬 전 대표는 ‘내 지역 진보 심기’는 감시망을 상실한 보수 일변도의 위험사회를 막는 출발점이라고 했다. “보수 기득권층이 계속 정치를 지배하면 감시·견제가 부실해진다. 그것이 부실해질 때 배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는 교훈을 세월호가 우리에게 주었다. 이번 선거는 돈보다 생명을 중시하는 것이 구호가 아니라 정책에 구체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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