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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응찬의 검, 라응찬을 베다

신한은행 사태의 뿌리는 두 실세의 주도권 다툼… 경쟁자 흠집 내려 정·관계 인사 금융정보 무차별 열람
등록 2013-10-22 09:10 수정 2020-05-02 19:27
2010년 신한금융지주 경영권 경쟁자인 신상훈 사장 주변 정·관계 인사의 개인정보를 무차별 조회한 것으로 드러난 라응찬 회장.

2010년 신한금융지주 경영권 경쟁자인 신상훈 사장 주변 정·관계 인사의 개인정보를 무차별 조회한 것으로 드러난 라응찬 회장.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차명계좌로 (돈을) 관리했음을 확인했느냐.”(주성영 한나라당 의원) “그런 것으로 안다.”(이귀남 법무부 장관)

2010년 4월 주성영 의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라응찬 회장의 차명계좌를 재조사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달 전 네 번째 연임에 성공한 라 회장에겐 날벼락이었다. 현행법에 금융회사 임원은 “신용질서를 해칠 우려가 없는 사람”이라고 명시돼 있어서다. 라 회장 쪽은 “신상훈 신한지주 사장이 외부 세력과 협작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신한지주는 라 회장과 신 사장이 각자 대표이사를 맡은 2인 체제여서 라 회장이 중징계를 받아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면 신 사장이 홀로 대표이사로 남기 때문이다. 라 회장 쪽이 신 사장과 가까운 사람들로 추정되는 내부 인사와 정·관계 인사의 개인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조회하기 시작한 건 이런 다금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협작의 증거, 정확히는 흠집을 찾아내려는 표적 사찰을 시작한 것이다.

2010년 4월부터 9월까지 신한은행 경영감사부 등은 내부 고객정보파일(CIF) 등을 이용해 매월 약 20만 건의 고객정보를 조회했다. 박지원(원내대표), 정동영·정세균(최고위원) 등 민주당 지도부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정무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 조회 대상에 포함됐다.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등 전·현직 경제관료와 금융 당국 인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한은행 조회 기록을 입수해 공개한 김기식 의원(민주당)은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한다. “당시 민주당은 ‘영포라인’에 의한 라응찬 회장 비호 사실을 연일 문제 삼고 있었다. 당내 특위로 ‘영포게이트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라 회장의 50억원 비자금을 추적했다.” ‘영포라인’은 이명박 정부 시절 권력 실세로 꼽혔던 영일·포항 출신을 말하며, 라 회장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상촌회’(상주촌놈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앞서 2008년 12월 검찰은 라 회장의 차명계좌 일부를 찾아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을 파헤치다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라 회장이 50억원을 건넨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라 회장은 신한은행장 임기 마지막 해인 1998년부터 2008년까지 23명의 이름으로 차명계좌를 만들어 관리했다. 관리 금액은 11억원(1998년 1월)에서 출발해 96억원까지(2004년 1월) 오르락내리락했다. 이 가운데 46억원은 아들들에게 건네졌다. 하지만 2009년 5월 검찰은 무혐의 처분했다. 영포라인이 라응찬 회장을 비호한다는 의혹을 민주당이 제기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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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형사처벌을 피했던 라 회장은 2010년 4월 주성영 의원의 차명계좌 재조사 발언으로 다시 위기를 맞는다. 2010년 8월 금감원은 라 회장의 차명계좌를 밝혀냈고 중징계가 기정사실화됐다. 그해 9월2일 신한은행은 느닷없이 신상훈 사장을 고소한다. 신한은행장으로 재작하던 2006~2007년 부실 기업에 부당대출(배임)을 해주고 창업주 이희건(2011년 사망)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료를 빼돌렸다(횡령)는 혐의였다. 위기를 돌파하려고 라응찬 회장이 휘두른 칼날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역풍이 불어왔다. 진흙탕 싸움에 분노한 신한지주 대주주들이 동반사퇴를 이끌어냈다.

이제는 공수가 뒤바뀌었다. 2년간 법정 다툼 끝에 2013년 1월 신상훈 전 사장은 신한은행이 고소한 혐의에 대해 1심 법원에서 모두 무죄를 받았다. 반면 금감원은 라응찬 전 회장의 추가 차명계좌를 지난 9월 확인했고, 검찰은 그가 차명으로 거래한 수백억원의 행방을 쫓고 있다. 국회에는 ‘라응찬 봐주기 의혹’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 요구 청원이 제출돼 있다. 역사는 그렇게 반복된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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