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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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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뺏고 정부가 울리다?

키코 판매한 은행에 울고, 편파적인 검찰과 무성의한 금융 당국에 또 우는 중소기업들… 감사원 감사에 마지막 희망 걸어
등록 2013-10-05 15:45 수정 2020-05-03 04:27

“처음엔 키코(KIKO) 문제가 금방 해결될 줄 알았다. 애초 계약이 너무 허황됐던 터라 중소기업 사장들은 집단적인 실력 행사를 하지 않고 점잖게 있어도 정부가 나서 정리를 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정부에는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오로지 당사자인 기업에만 문제 해결을 맡겼다. 완전한 직무유기다.”( ㄱ업체 사장)
“정부가 중소기업을 위해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철저히 은행 편을 들었고, 오히려 진실을 규명하려는 우리를 방해했다. 기업에 거액의 피해를 안긴 건 은행이지만, 기업은 오히려 정부의 그런 행태 때문에 가슴에 더 멍이 들었다.” (ㄴ업체 부사장)

‘무혐의’ 전력 감추려 은행 감싸는 검찰?

법정 다툼에서 진 중소기업들이 느끼는 절망과 분노는 깊다. 그러나 원망의 화살이 키코 상품을 판매한 은행으로만 향하는 건 아니다. 중소기업들은 지난 5년여간 검찰과 금융 당국이 무성의하고 편파적인 태도로 일관한 탓에 은행과 제대로 된 싸움을 벌일 기회조차 없었다고 주장한다.
중소기업의 원망은 먼저 검찰에 닿는다.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지난해 12월부터 검찰과도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계기는 지난해 10월 대검찰청을 대상으로 한 국회 국정감사였다. 이 자리에 키코 사태와 관련한 증인으로 출석한 박선종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강사는 “한 (은행) 본점 직원이 지점 직원한테 ‘지금 우리가 키코 가입 계약자들을 일본으로 초대해가지고 골프 접대를 해야 되는데 절대로 우리가 돈이 많이 남는 것을 알게 되면 안 된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파생상품 전문가인 그는 검찰이 키코로 피해를 입은 기업들이 은행을 사기 혐의로 고소한 사건을 수사 중이던 2010년에 검찰 쪽 전문가로 활동했는데, 당시 검사가 건네준 수사기록에서 이같은 은행 직원 간 전화 통화 요약본을 본 것이었다.
이 전화 통화 내용은 중소기업에는 “은행이 키코를 판매하면서 상품의 실체에 대한 핵심 정보를 의도적으로 숨겼으니 사기 행위에 해당한다”는 그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었다. 곧바로 중소기업의 변호인단은 검찰에 전화 통화 내용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검찰은 “개인의 사생활 침해”라며 정보공개를 거부했다. 이에 변호인단은 행정법원에 ‘정보공개거부처분 취소소송’을 내 승소 판결을 얻어냈지만, 검찰은 항소로 맞대응하며 지금까지도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검찰이 이처럼 은행에 불리한 수사기록을 끝까지 제출하지 않으려는 데는 특별한 의도가 있다는 게 공대위의 주장이다. 검찰이 앞서 은행의 사기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했던 찜찜한 전력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실제 서울중앙지검은 은행의 불법행위를 수사한 지 1년5개월 만인 2011년 7월 “은행이 기업을 속이려 했다고 볼 수 없다”고 불기소 처분을 결정했다. 당시 수사를 맡은 검찰은 주미대사관을 통해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와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공식적인 질의까지 한 뒤 “키코가 미국에서 발생했다면 은행을 사기 혐의로 기소했을 것이다”는 취지의 답변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던 터라 은행이 기소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예상 밖의 결과에 검찰 윗선의 ‘외압설’ 의혹이 국회와 언론에서 제기됐다. 줄곧 ‘기소’ 의견을 유지하던 담당 수사 검사가 수사 결과 발표 직전 갑자기 공판부로 전보 조치된 뒤 사직서를 제출하자 의혹은 더 커졌다. 그러나 이미 은행에 대한 형사처벌은 물 건너간 뒤였다. 중소기업을 대리하는 한 변호사의 설명이다. “은행의 본점과 지점 간 전화 녹취록처럼 우리 쪽에 유리한 증거가 있었다. 그런데도 검찰이 당시 은행을 무혐의로 결론 냈으니 검찰에겐 치부다. 그래서 애써 숨기려고 하는 것이다. ”

정확한 피해 규모도 못 밝히는 금감원

금융 당국도 비판의 한가운데 서 있다. 금융감독원은 일단 키코 계약으로 중소기업이 입은 피해 규모부터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 발표 때마다 오락가락이다. 가장 최근의 공식적인 자료는 2010년 10월에 발표됐다. 734개 기업(2010년 6월 기준)이 14개 은행과 키코 계약을 체결했고 그로 인해 3조2천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 국정감사 때 민병두 의원실(민주당)에 제출한 자료에선 776개 기업(2009년 6월 기준)이 7개 은행과 키코 계약을 체결했다고 집계했다. 앞서 발표 때보다 조사 대상 은행은 절반으로 줄었는데도, 오히려 이들과 계약했다는 중소기업은 더 늘어난 것이다. 피해 규모는 제출하지 않았다. 공대위에선 키코 피해 기업이 1천 개사가 넘고 피해 규모는 1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재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다. 매년 국감 때마다 여야 의원을 가리지 않고 “정확한 진상 조사를 하고 은행의 과실에 대해선 제재를 하라”며 금감원을 질타할 정도다. 금감원 관계자는 이에 대해 “2010년 10월 이후 업데이트한 자료는 없다. 당시 피해 금액이 3조2천억원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키코 계약으로 인한 손실만 평가한 금액이다. 이후 기업이 보유 중이던 달러 현물을 팔아 이득이 발생했을 수 있기 때문에 (손실과 이득을 상쇄하면) 실제 손실은 (집계보다)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감원도 키코를 부실하게 판매한 은행에 제재를 가하기는 했다.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는 2010년 8월 9개 은행의 임직원 72명에게 감봉·주의 등 징계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주된 징계 사유는 은행이 키코 계약을 맺으면서 중소기업의 손실 감당 능력을 제대로 심사하지 않아 은행의 건전성을 해쳤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정작 중소기업이 진상 규명을 요청했던 핵심 쟁점에 대한 판단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은행이 중소기업에 키코 상품을 판매하면서 수수료가 없는 ‘제로코스트’ 상품이라고 왜곡해 설명했는지, 키코에 내재된 위험성을 충분히 고지하지 않았는지 여부를 따져보지도 않은 것이다.
이는 금감원이 2005년 도이체은행·BNP파리바·바클레이스 등 외국계 은행이 한국전력·한국도로공사 등 15개 공기업에 외환파생상품을 판매하면서 “위험과 관련한 중요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 총 2700여억원의 평가손실을 입혔다”는 이유로 ‘기관 경고’ 조치를 내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소기업 쪽의 한 변호사는 “2005년 외국계 은행에 대해 금감원이 제재한 이유가 애초 파생상품 계약이 (기업은 적은 이익을 가져가고 은행은 큰 이익을 가져가는) ‘마이너스 시장가치’로 설계됐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은행의 영업 행위가 불건전하다고 제재를 해놓고, 그와 유사한 키코 사건에서는 정반대로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다”고 지적했다.

대법 판결에 유리한 증거 마지막 기대

형사처벌, 금융 당국 제재, 민사상 손해배상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해도 은행에 제대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 중소기업들이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있는 건 금융 당국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다. 민주당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지난 6월 감사요구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국회 의결로 감사원의 감사가 이뤄진 뒤 그 과정에서 금융 당국이나 은행의 과실이 새롭게 드러난다면 아직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기업들의 소송에선 다소 유리한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키코 문제를 방치하다시피 했던 국회가 이제 와서 감사요구안 의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은행에 맞선 중소기업들의 외로운 싸움은 이대로 끝인 걸까.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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