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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48)씨는 내년 봄이 두렵다. 전셋집 재계약 때문이다. 경기도 과천의 30년 된 낡은 아파트 전세에서 지금의 신축 아파트 전세로 옮긴 1년6개월 전만 해도, 그는 삶의 질이 한결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가급적 이번 전셋집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재계약을 앞두고 공인중개소에 전세 시세를 물어본 뒤 시름에 빠졌다. 109㎡(33평) 아파트의 전세금이 3억7천만원에서 1년6개월 사이 5억2천만원으로, 1억5천만원이나 뛴 것이다. 매매가와 겨우 1억원 차이가 날 정도다. 남편과 맞벌이를 하는 덕에 한 달 200만원씩 꼬박꼬박 저축을 해왔지만, 지난 2년간 모은 돈을 탈탈 털어도 빚을 1억원은 내야 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하다. “20년 가까이 전세를 옮겨다녔지만 재계약 때마다 2천만원씩 올려주는 정도였다. 직장인이 어떻게 2년 만에 1억5천만원을 마련할 수 있겠나. 아직 계약 기간이 6개월 남긴 했지만 집주인이 1억원 넘게 올려달라고 곧 통보해올까봐 걱정된다.”
18개월새 1억5000만원 뛴 전세금전셋값은 이미 세입자의 ‘수용 능력’을 훨씬 넘어선 상태다. 세입자가 재계약 때까지 2년 동안 벌어들인 노동 소득으로는 전세금 인상폭의 절반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전셋값이 무섭게 치솟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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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국민은행에 따르면 전국 주택의 전셋값은 올 들어 지난 7월 말까지 2.1% 올랐다. 지난해 같은 기간(1.96%)과 비교해 가파른 상승세다. 그중에서도 전세난이 심각한 서울의 아파트 전셋값은 올 들어서만 2.86%(전년 동기 상승률 0.25%), 수도권 아파트는 2.69%(0.69%)나 급등했다.
매매가는 제자리인데 전셋값만 오르다보니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셋값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수도권 아파트의 전세가율은 7월 말 58.3%로 200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서울 아파트도 57.3%에 이른다. 통상 ‘전세가율 60%’면 전세 수요가 매매 수요로 전환될 정도로 전셋값이 매우 높은 수준을 뜻한다. 한마디로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의 평균 전셋값이 한계 수준에 이른 것이다.
전셋값 급등의 표면적 원인은 수급 불균형이다. 세입자는 전세시장으로 몰리는데, 집주인은 자꾸만 전세를 월세로 돌리니 가격이 뛸 수밖에 없는 것이다. KB전세수급지수(100이면 수요과 공급이 균형, 200에 가까울수록 공급 부족) 추이는 이런 진단과 맞아떨어진다. 서울의 경우 이 지수가 지난해 말 154.5에서 7개월 만에 187.9로 20% 이상 올랐는데, 그만큼 공급이 급격히 부족해졌다는 의미다.
이같은 수급 불균형은 부동산 거품이 빠지는 시기에 발생하는 전형적인 부작용이다. 허윤경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원의 설명은 이렇다. “전세제도는 주택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때 쓸모가 있는 제도다. 집주인이 주택 매매·관리 비용을 빼면 1년치 이자 수익도 안 생기는 전세를 놓아온 건, 집값 상승기에는 전세금을 종잣돈으로 (부동산 투자하면) 레버리지 효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값이 떨어진 지금은 부동산 투자로 시세차익을 볼 수 없으니 집주인들이 임대수익이 높은 월세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 지난 7월 5만47건의 전국 아파트 임대계약 가운데 전세계약은 66.7%로 한 달 전(70.8%)보다 4%포인트나 줄어들었다.
전세가 월세보다 연간 500만원 저렴세입자가 빠르게 쪼그라드는 전세시장에 남으려고 애쓰는 건 주거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다. 월세 물량이 늘어나면서 ‘월세전환율’(전세를 월세로 돌릴 때 적용되는 연간 이자율)이 과거 연 10%대에서 최근 연 6%대로 떨어지긴 했지만, 연 4%대인 주택담보대출 금리보다는 여전히 높다. 부족한 전세금을 빚을 내 충당하더라도 다달이 월세를 내는 것보다는 가계에 부담이 덜 가는 것이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14’는 서울 아파트의 경우 같은 규모라도 전세 비용이 월세 비용보다 2년간 1천만원가량 덜 들어가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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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입자에게 돈이 전부는 아니다. 일부 세입자는 집주인의 무리한 전세금 인상 요구를 감수하면서라도 안정적인 주거생활을 유지하길 바란다. 김형철(35)씨의 사례다. 그는 4년 전 서울 마포구의 79㎡(24평) 아파트에 보증금 1억9천만원을 주고 들어갔다. 2년 뒤 집주인은 9천만원이나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막 자녀가 태어난 탓에 집을 옮기기 꺼린 그는 전세금 9천만원 대신 월세 45만원씩을 주기로 하고 계약을 2년 연장했다. 그러나 최근 집주인은 석 달 뒤 재계약을 앞두고 5천만원을 더 올리거나, 월세를 30만원씩 더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월수입 400만원으로 이미 빠듯하게 가계를 꾸리고 있는 터라 이번엔 결정이 쉽지 않다. “부담이 너무 커져서 머리로는 시내 외곽으로라도 이사를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모님 댁도 가까이 있고 해서 생활권을 옮기고 싶지 않다. 나야 괜찮지만 환경이 변하면 아내와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다.”
집을 살 여유가 있어도 불안한 집주인으로 살기를 거부하는 세입자도 적지 않다. 부동산값이 다시는 급격히 오르기 어려울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굳이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겠다는 이들이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써브’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 고소득층의 자가 주택 점유율은 2006년 64.7%에서 2012년 58.6%로 6%포인트가량 감소했다. 이들 대부분은 전세로 옮겨갔다. 맞벌이를 하는 고희라(36)씨네의 한 달 수입은 1천만원이 조금 안 된다. 지금 거주하는 경기도 일산의 112㎡(34평) 빌라의 전세금으로 들어간 3억원 중에도 빚이 거의 없다. 어느 정도 대출만 받으면 중소형 아파트는 언제든 살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내년 1월 전세계약이 끝나더라도 집을 살 생각은 없다. 출퇴근이 편리한 서울 시내 아파트 전세로 들어갈 계획이다. “집을 사면 2년마다 이사를 가야 한다는 불안감은 확실히 사라지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집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쾌적한 환경에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서울에서 우리가 원하는 주거환경에서 살려면 적어도 6억~7억원은 필요하다. 집값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몇억원씩 대출을 지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고 돈에 맞춰 벌집 같은 아파트에 살고 싶지도 않다.”
반대로 구현도(42)씨는 이제 지긋지긋한 전세살이를 끝내고 싶다. 지난달 집주인이 계약을 연장하며 4천만원 인상을 요구했을 때 집 구매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2년 전에도 5천만원을 올려준 적이 있었던 까닭이다. 두 아들을 넓은 공간에서 키우고 싶어 서울 마포의 2억원짜리 106㎡(32평) 아파트에서 나와 같은 돈으로 146㎡(45평)에 살 수 있는 경기도 죽전까지 이사를 했지만, 전세금이 4년 만에 9천만원이나 오른 것이다. 그러나 집을 사려면 10년 전에 사둔 경기도 성남의 79㎡ 아파트가 팔려야 하는데 좀체 사겠다는 이가 없다. 그는 할 수 없이 집 구매를 포기하고 집주인의 요구에 맞춰 재계약했다. 부족한 전세금 4천만원은 성남시 세입자에게서 올려받은 전세금으로 메꿨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전세시장에 남으려고 또 다른 세입자에 부담을 지우게 된 것이다.
세입자를 궁지로 내모는 것처럼 비치는 집주인들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다. 상당수가 부동산 활황기에 무리하게 투자하는 과정에서 빚을 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부동산 시장이 가라앉는 시기, 무리한 전세금 인상은 그들의 생존 법칙인 것이다. 이철민(40)씨는 올 연말에 재계약을 하며 전세금을 2억9천만원에서 6천만원가량 올릴 계획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시세만큼이다. 그러지 않고선 은행빚 1억2천만원을 줄이기 어렵다. 사실 그는 아파트 전세를 두 곳에나 놓고 있는 ‘1가주 2주택’자다. 부동산 경기가 활황이던 2007년 서울 동작구의 109㎡ 아파트를 4억6천만원에 분양받았다. 그러나 전세를 끼고 산 탓에 한 번도 살아보지는 못했다. 지난해 초에는 서울 강동구의 30평대 재건축 아파트를 4억7천만원에 구매했다. 주거환경이 마음에 쏙 들어 평소 눈여겨보던 지역이었다. 첫 번째 아파트를 내놔도 팔리지 않는 상황이라 전세를 끼고, 그가 지내던 전셋집을 빼고, 은행 대출도 받았다. 그러고는 처가로 들어갔다. 그러나 1년6개월이 지나도록 첫 번째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 빚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두 아파트의 전세금을 받고도 수익을 내기는커녕 대출 이자로 한 달에 40만원씩을 꼬박꼬박 물게 된 것이다.
전세금 올리는 집주인도 괴롭다집주인에 대한 비판은 종종 집을 가진 베이비부머(1955~63년생) 이상 은퇴생활자에게 집중되곤 한다. 과거에는 전세를 끼고 집을 사들이며 부동산 거품만 키우더니, 지금은 저금리라는 이유로 전세금만 무자비하게 올린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집을 한두 채 가진 은퇴생활자들에게는 다소 억울한 비판이다. 2년 전 은퇴한 강호식(56)씨는 지난 6월 전세를 주고 있던 서울 서대문구의 79㎡ 아파트의 전세금을 2억3천만원으로 4천만원 올렸다. 고정적인 수입 없이 모아둔 돈을 까먹고 있는 터라 마음 같아서는 월세를 받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56㎡(17평)짜리 다세대주택 전세금에 1억1천만원이 묶여 있어 세입자에게 돌려줄 전세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4천만원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다. 1억원 정도를 은행에 넣고 있는데 정기예금 금리가 올 들어 연 2% 중반으로 떨어져서 이자 수입이 2년 전보다 연 100만원가량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4천만원을 올려봤자 이 손실을 회복할 수 있을 정도다. “남은 게 집 하나다. (세입자인) 젊은 신혼부부에게 전세금을 올려받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부동산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각자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의 고달픔을 덜어줄 묘안이 정부에 있기는 한 걸까.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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