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베리아 100%, 가봉 86%, 필리핀 49%, 시에라리온 41%, 우크라이나 36%, 파푸아뉴기니 33%, 모잠비크 28%, 우루과이·탄자니아 18%, 마다가스카르 10%….’
독일 시사주간지 이 지난 2월19일 인터넷판에 올린 목록이다. 뭘까? 2012년 말 기준으로, 나라별 경작 가능한 토지에 대한 외국 자본 소유 비율이다. ‘라이베리아 100%’라고 쓰여 있으니, 그 나라의 농토 100%가 외국 자본의 손에 넘어갔다는 얘기다. 이른바 ‘땅 뺏기’(랜드그랩·Land Grabbing) 현상이다. 은 “인구 급증으로 인한 식량 수요 증가에 따라 선진개발국의 자본이 제3세계 국가를 상대로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사들이거나 장기 임차하는 사례가 급격히 늘고 있다”며 “외국 자본의 이같은 행태는 현지 주민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화”라고 지적했다.
“땅이 새로운 황금이 됐다”
“부유한 국가가 자국의 미래 식량 수급을 원활히 할 목적으로 가난한 나라의 농토를 매입 또는 장기 임차하는 행위. 그 결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한편 식량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마저 있다.” 레스터 브라운 미 지구정책연구소(EPI) 소장은 세계미래학회(WFS)가 내는 격월간 1·2월호에 기고한 ‘식량, 연료, 그리고 지구적 차원의 땅 뺏기’란 제목의 글에서 ‘랜드그랩’을 이렇게 정의했다.
랜드그랩 현상이 지구촌 차원의 문제로 떠오른 것은 세계 식량시장이 폭등세로 치달았던 2007~2008년 이후부터다. 당시 밀·콩·옥수수 등 주요 곡물값이 2배 이상 치솟자, 식량 수출국들은 앞다퉈 자국 내 식량값 오름세를 차단하기 위해 반출 물량을 줄였다.
값은 뛰고 양은 줄었으니, 식량 수입국 처지에선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주요 수출국들과 장기 계약을 맺는 방법으로 안정적인 물량 확보에 나섰지만, 공급이 달리는 시장에서 공급자가 이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식량 수입 국가들이 차선책으로 찾아낸 게 나라 밖 땅에서 식량을 생산해 자국으로 들여오는 방법이었다. ‘랜드그랩’ 현상이 최근 5년 새 집중적으로 벌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부족한 농토를 해외에서 ‘보충’하는 건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남의 나라를 힘으로 차지한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땅에 세운 대규모 농장(플랜테이션)이 그 사례다. 브라운 소장은 “지난 150여 년 동안 농업 부문에서 이뤄진 대규모 해외투자는 주로 선진개발국들이 사탕수수·차·고무·바나나 등 특정 열대작물을 중심으로 시도했다”며 “21세기 랜드그랩 현상이 이전과 달라진 것은, 투자가 밀·쌀·옥수수·콩 등 주요 곡물과 바이오연료 생산용 작물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세네갈의 구호단체 ‘액션에이드’의 활동가 파투 음바예의 말을 따 “땅이 새로운 황금이 됐다. 21세기판 ‘골드러시’는 이미 시작됐다”고 꼬집었다.
세계은행이 2011년 1월 내놓은 최신 자료를 보자. 2008년 10월부터 1년 남짓 동안 ‘랜드그랩’으로 볼 수 있는 대규모 토지거래는 지구촌 전역에서 모두 464건 이뤄졌다. 이 가운데 거래 대상 토지의 면적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203건에 그친단다. 이들 거래의 총면적만도 약 5700만ha, 최대 식량 수출국인 미국 전역의 옥수수와 밀 재배 면적을 훌쩍 넘는 규모다. 아예 매매계약을 체결한 사례도 있고, 짧게는 25년에서 길게는 99년까지 장기 임대차 계약을 맺은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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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그랩 대상 토지의 절반 이상은 사하라 사막 남쪽 아프리카 국가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에티오피아·가나·라이베리아·마다가스카르·모잠비크·남수단·잠비아 등 7개국에 대한 편중 현상이 심했다. 외국 자본에 땅을 내준 나라 대부분은 굶주림이 만연한 가난한 나라다. 세계적 인도지원단체 옥스팸은 지난해 10월4일 내놓은 ‘우리의 땅, 우리의 삶’이란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2000~2010년 지구촌 차원에서 이뤄진 대규모 토지거래의 총면적은 영국 국토의 8배가 넘는다. 이 지역에서 식량을 생산한다면 10억 명의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다. 현재 지구촌에서 굶주리는 인구도 약 10억 명이다. …이들 거래의 60% 이상은 굶주림이 심각한 가난한 나라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그럼에도 이들 국가에 진출한 외국 자본 가운데 3분의 2는 생산량 전량을 수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계은행의 자료를 다시 들여다보자. 분석 대상 464건 가운데 ‘거래 목적’이 공개된 405건을 살펴보면, 야자·자트로파 등 바이오연료용 작물 생산과 고무·목재 등 상업용 자재 생산용이 각각 21%씩으로 나타났다. 식량 생산용은 전체의 37%에 그쳤다. 브라운 소장의 지적처럼, 식량값과 궤를 같이해 원윳값 폭등세가 장기화하면서 바이오연료에 대한 수요가 큰 폭으로 늘어난 것도 랜드그랩 현상을 부추겼다.
유럽연합(EU)이 시행하는 ‘재생 가능 에너지법’에 따라 회원국들은 2020년까지 수송용 에너지의 10%를 재생 가능 자원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에 따라 유럽 시장을 겨냥한 바이오연료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서 바이오연료용 작물 재배 면적이 급속히 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이오연료용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선 기존에 곡물을 생산하던 땅에 야자·자트로파 등을 심거나, 개간을 위해 삼림을 파괴해야 한다.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선진개발국의 노력이 가난한 나라에 가져온 후폭풍이다.
땅을 가져오면, 물도 따라온다. ‘땅 뺏기’는 ‘물 뺏기’(워터그랩)와 같은 말이다. 물 부족 국가에서 랜드그랩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이유다. 수자원 전문 인터넷 저널 (WA)가 내놓은 최근 자료를 보면, 2012년 현재 에티오피아에서 진행 중인 12개 대규모 토지거래 사업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약 14만ha의 면적이 새롭게 관개농지로 탈바꿈한다. 이건 뭘 뜻할까?
자원 노린 ‘땅 뺏기’도 늘어나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보면, 흔히 ‘아프리카의 젖줄’로 불리는 나일강은 총연장 6650k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에티오피아의 타나 호수에서 발원한 청나일(블루나일)과 탄자니아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흘러나온 백나일(화이트나일)이 수단의 수도 하르툼 인근에서 합쳐져 지중해로 나아간다. 워터 올터너티브 쪽은 자료에서 “(에티오피아 농지개간 사업이 계획대로 마무리되면) 농토에 끌어다 쓴 물 때문에 청나일의 수량이 연간 4%가량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일강 상류인 에티오피아에서 벌어진 랜드그랩이 하류인 이집트에서 물 부족 사태와 식량 생산량 감소를 부를 수 있다는 얘기다.
자원을 노린 ‘땅 뺏기’(이른바 리소스그랩)도 늘어나는 추세다. 선진개발국뿐 아니라 에너지와 광물자원 확보에 비상이 걸린 신흥개발국들도 앞다퉈 전세계를 무대로 랜드그랩에 골몰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이다.
제5차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정상회의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3월25일 중국 베이징의 ‘힐튼 베이징 왕푸징’ 호텔에 에콰도르 정부 고위 인사들이 나타났다. 중국 국영정유회사(CNPC) 간부들과 만나기 위해서다. 앞서 이들은 에콰도르 수도 키토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3차례 협상을 벌였단다. 은 3월26일치에서 이날 면담에 배석한 워싱턴 아고 중국 주재 에콰도르 대사의 말을 따 “두 나라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미 환경·인권단체 ‘아마존워치’(AW)가 이날 베이징발로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두 나라가 협상에 나선 이유는 ‘토지거래’다. 대상 토지는 아마존강 지류인 나포강 남쪽 일대, 약 300만ha에 이르는 광대한 열대우림 지역이다. 이 지역은 하루 50만 배럴가량의 원유를 생산하는 산유국인 에콰도르의 주요 미개발 유전지대 가운데 한 곳이다.
아마존워치 쪽 자료를 종합하면, 두 나라 간 협상은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영정유회사의 남미 지역 자회사인 ‘안데스석유’가 유전개발 계약을 따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도 나온다. 에콰도르 정부도 이미 “오는 5월까지 계약을 매듭지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마존워치는 “거래가 성사되면 천혜의 열대우림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 그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 부족들도 삶의 터전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외채 조달 어려운 에콰도르에 손 뻗친 중국나포강 남쪽 일대에는 슈아르·아추아르·키추아 등 7개 부족이 살고 있다. 이 부족들은 지난해 11월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유전개발 추진을 중단할 것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에게 보낸 바 있다. 그럼에도 ‘인민의 대통령’을 자처하며 지난 2월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 코레아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코레아 대통령은 집권 초기인 2008년 말 32억달러 규모의 에콰도르 국채에 대한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다. 부패한 권력이 쌓아놓은 빚더미를 국민의 피땀으로 갚을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이후 에콰도르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외채를 조달하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양자 협상을 통한 국채 발행이 유일한 우회로인데, 중국 쪽이 손을 내민 것도 이 무렵부터다.
“최근 대규모 수력발전소 2기를 건설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던 중국 쪽이, 국영정유회사를 통해 에콰도르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파시피코 정유시설 건설공사에 125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은 지난해 7월20일 이렇게 보도했다. 파시피코 정유시설은 에콰도르 국영정유회사인 페트로에콰도르와 베네수엘라의 국영정유회사(PDVSA)가 합작한 개발사업으로, 오는 2015년 안에 본격 양산 체제에 들어갈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산유국임에도 자체 정유능력이 부족한 에콰도르는 정유제품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해 7월까지 에콰도르는 국채와 원유 수출대금 선지급금, 에너지 분야 개발사업 투자금 등을 포함해 중국에 모두 73억달러의 외채를 지고 있었단다. 통신은 “이는 에콰도르 국내총생산(GDP)의 10%를 넘는 규모”라고 전했다. 그래서다. 에콰도르 정부 당국자는 나포강 일대 유전개발 사업과 관련해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빈곤과의 싸움을 위해선 개발이 필요하다. 유전개발 사업을 반대하는 것은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제국의 시대에, 자원은 ‘저주’였다. 자원을 노린 외세가 군대를 몰고 왔다. 21세기엔 ‘땅’이 저주를 부른다. 가난해 땅을 내준 나라들은, 저주의 사슬을 풀 길이 더욱 막막해졌다. 미 환경·인권단체 ‘자원과 권리 이니셔티브’(RRI)는 지난 1월 초 펴낸 연차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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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중국 등 브릭스 국가가 최근 이룬 눈부신 경제성장을 본보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은 아시아의 신흥경제국을 뜻하는 ‘타이거 경제’에 빗대, 자국을 ‘라이언 경제’로 부르고 있을 정도다. …신흥경제국들과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엔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신흥경제국과 달리 아프리카 각국은 토지와 자원에 대한 정치·경제적 통제권을 외국 자본에 내주고 있다. 그러니 견줄 대상은 신흥경제국들이 아니다. 토지와 자원을 수탈당했던 식민지배 시절의 역사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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