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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파업, 2라운드 시작

야권의 청문회·국정조사 추진, 시민사회의 새누리당 압박 등 새국면 맞은 방송사 파업… 견고한 투쟁 대오 유지와 시민들의 지지가 관건
등록 2012-05-02 17:45 수정 2020-05-03 04:26

“사위어가던 불길에 휘발유를 부었다. 김(인규) 사장, 이번 결정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다.”

비장함을 기대한 건 오판이었다. 지난 4월23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본관 앞으로 삼삼오오 촛불을 들고 모여든 새노조(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 조합원들의 상기된 얼굴에선 묘한 활력이 느껴졌다. 다큐멘터리국 소속의 한 PD는 “김 사장이 외려 고맙다. 자칫 가라앉을 뻔한 파업 분위기에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을 마련해줬다”고 했다. 사흘 전 회사 인사위원회가 새노조 공정방송추진위원회 간사인 최경영 기자를 해고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최 기자는 이날로 49일째를 맞은 한국방송 파업과 관련해 회사 쪽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첫 번째 조합원이었다. 이날 촛불집회에는 평소보다 2배 이상 많은 350여 명의 조합원이 자리를 지켰다.

야권 “독립적 사장 선출 위한 법 개정”

이튿날인 4월24일에는 드라마와 교양 프로그램 제작을 총괄하는 책임PD 16명 등 보직팀장 22명이 최 기자 해고에 반발해 보직을 사퇴했다. 팀장급 간부의 70%에 해당하는 규모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위)과 김인규 한국방송 사장.  두 방송사 구성원들의 절대 다수가 사퇴를 요구하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두 김씨의 얼굴이 지겹다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한겨레 자료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위)과 김인규 한국방송 사장. 두 방송사 구성원들의 절대 다수가 사퇴를 요구하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두 김씨의 얼굴이 지겹다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한겨레 자료

라는 게 새노조 쪽 설명이었다. 4월25일에는 러시아 모스크바, 중국 베이징·상하이, 독일 베를린 등에 주재하는 특파원 6명이 회사 쪽의 해고 결정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김현석 새노조위원장은 “파업이 50일을 넘긴 것도 기적에 가깝지만, 시간이 갈수록 동력이 커지고 있다는 게 우리로선 더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4·11 총선이 새누리당의 과반 확보로 끝나 기세가 한풀 꺾이는 듯했던 방송사 파업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경영진의 무리한 징계 조처가 조합원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19대 국회 개원을 앞둔 야당이 언론노조·시민단체와 연대해 정부·여당을 상대로 본격적인 공세의 칼날을 벼리면서부터다. 4월25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언론단체·시민사회 대표와의 간담회에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방송사 파업 사태 해결을 위한 적극 행동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이 채택한 공동발표문에는 △19대 국회 출범과 동시에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와 국정조사 추진 △공영방송·통신사의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사장 선출 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방송법과 미디어 관련법 개정 △야당과 시민사회, 언론단체들 대표가 참여하는 공동정책협의회 구성 등의 합의 사항이 담겼다.

민주당 언론정상화특위 위원장 자격으로 간담회에 참석한 김재윤 의원은 “19대 국회 개원의 전제조건으로 청문회와 국정조사를 내걸기로 했다”며 “곧 꾸려질 원내대표단에 이런 내용을 정식으로 올릴 것”이라고 했다. 통합진보당의 박원석 당선인도 “19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청문회와 국정조사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며 “새누리당이 거부할 경우 야당은 개원을 위한 원 구성에 협조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여당의 태도다. 새누리당은 총선 전부터 방송사 파업에 대해 “자체적으로 해결할 문제”라며 거리두기 전략을 취해왔다. 방송사 파업이 선거 쟁점으로 떠오를 경우 청와대와 대통령 측근들이 주도한 언론 장악을 방조·비호해왔다는 책임론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총선이 여당의 압승으로 끝난 뒤에는 야당 승리를 전제로 파업 전략을 짜왔던 노조의 기세가 머잖아 꺾일 것이라는 낙관론이 지배했다.

노조 “국회에만 기대지 않겠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언론정책의 최고책임자였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수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고, 총선 결과에 위축됐던 방송사 노조도 전열을 재정비하고 정치권·시민사회와 공동 대응에 나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19대 국회 개원을 앞둔 상황에서 방송 파행이 장기화하는 것에 집권당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대권을 노리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선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4월24일 야당과 언론노조, 시민단체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이명박 정권의 방송 장악과 MB 낙하산 사장의 비리와 부도덕성에 대해 새누리당이 직접 입장을 밝히고 책임 있는 수습에 나서라”고 압박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방송사 노조들이 우려하는 상황은 19대 국회에서 청문회나 국정조사가 열리더라도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한 채 흐지부지 마무리되는 경우다. 무엇보다 자사 사장들이 출석해 야당 의원들의 집중 추궁을 당하는 곤혹스런 상황을 방송사들이 생중계할 가능성이 낮다. 방송사 파업에 적대적인 주류 보수 신문들이 청문회 보도에 적극적일 이유도 없다. 문화방송 노조의 문소현 대변인은 “청문회 같은 국회 전략에만 기대를 걸다 낭패스런 상황에 맞닥뜨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며 “결국 성패는 내부의 투쟁 대오를 얼마나 견고하게 지탱하고, 경영진의 부도덕성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폭로해내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4·11 총선이 새누리당의 과반 확보로 끝나 기세가 한풀 꺾이는 듯했던 방송사 파업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경영진의 무리한 징계 조처가 조합원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19대 국회 개원을 앞둔 야당이 언론노조·시민단체와 연대해 정부·여당을 상대로 본격적인 공세의 칼날을 벼리면서부터다.

두 방송사 노조 공동 노숙투쟁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노조는 5월을 총력투쟁 기간으로 설정하고 집중 투쟁을 벌인다는 구상이다. 야당·시민사회와 공조를 강화하는 한편, 총선을 거치며 유야무야됐던 두 방송사 노조의 연대 투쟁도 재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한 ‘진지’가 다시 구축됐다. 파업 52일째인 4월26일, 한국방송 새노조는 ‘한국방송을 점령하라’(오큐파이 케이비에스)라는 구호와 함께 서울 여의도공원 주변에 텐트 47동을 세웠다. 애초 새노조는 텐트로 한국방송 사옥 주변을 둘러싸려 했지만 미리 배치된 경찰의 방해로 여의치 않자 여의도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방송 새노조는 이날 전국에서 올라온 조합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합원 총회를 열어 ‘제2의 파업투쟁’을 결의했다. 5월2일부터는 문화방송 노조와 공동으로 노숙투쟁을 이어갈 계획이다.

무기한 노숙투쟁을 위한 ‘참호’가 아스팔트의 단단함을 뚫고 깊게 파였다. 기자와 PD들은 ‘야전’ ‘야생’에 강하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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