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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MB정부 출범 전후 사실상 새누리당 중핵 지역된 강남… 경제적 이익 높이려는 계급투표에 외부인 맞서 경계 확인하고 울타리 치려는 욕망의 발현
등록 2012-04-07 05:13 수정 2020-05-02 19:26
»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타워팰리스는 지난해 10·26 보궐선거에서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88%의 몰표를 줬다. 강남은 이명박 정부 출범을 전후해 새누리당의 중핵 지역이 됐다. 대구·경북이 지역적 코어(core)라면, 강남은 계급적 코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타워팰리스는 지난해 10·26 보궐선거에서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88%의 몰표를 줬다. 강남은 이명박 정부 출범을 전후해 새누리당의 중핵 지역이 됐다. 대구·경북이 지역적 코어(core)라면, 강남은 계급적 코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강이 가른 것은 단지 서울이란 공간의 남과 북이 아니었다. 돌진적 근대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강은 우리 의식 안에 중층화된 적대의 단층선을 새겨놓았다. 강은 때로 정치적 구획선이자 문화의 경계선이었고, 첨예한 계급의 대치선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대립적 공간 이미지는 다분히 만들어지고 상상된 것이었다. 현실의 서울에서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보수성, 문화적 구별짓기 욕망 등으로 표상되는 ‘강남성’은 규모와 강도에 편차가 있을 뿐 강의 남·북쪽 모두에서 관철되는 보편적 경향이었던 것이다.

서울 정치 구도, ‘강남 대 비강남’

문제는 강남과 강남 아닌 곳(비강남)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비단 경제력이나 개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의 크기 등에 머무르지 않는다. 차이들은 정치적 갈등의 영역으로 고스란히 이전되고 있다. 이 점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몇 차례의 선거 결과를 들여다보면 명확해진다.

2008년 쇠고기 촛불시위 직후 치러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공정택 후보는 ‘촛불 민심’의 후원을 받은 주경복 후보에게 17개 선거구에서 지고도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의 몰표에 힘입어 교육감에 당선됐다. 2010년 서울시장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 역시 17개 구에서 한명숙 후보에게 패하고도 강남 3구에서 벌인 압도적인 표차(오세훈 39만7064표, 한명숙 27만134표) 덕분에 0.6%포인트 차이로 신승할 수 있었다. 이런 추세는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층 명징해졌다. 서울시 전체에서 53.4%를 얻은 박원순 후보가 강남 3구에서만은 42%의 지지를 얻는 데 그친 것이다. 이런 흐름이 말해주는 바는 명확하다. 서울의 정치 구도가 ‘강남 대 비강남’ 구도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강남의 정치적 고립’이다.

유창오 새시대전략연구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을 전후해 강남이 사실상 새누리당의 중핵 지역이 됐다”고 말한다. 대구·경북(TK)이 새누리당의 지역적 코어(core)라면, 강남은 계급적인 코어라는 것이다. 그가 볼 때 강남은 19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서울에서 김영삼(YS)에 대한 지지가 가장 높이 나오는 곳으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자유주의’ 성향을 띠었다. 하지만 1990년 3당 합당과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반호남’과 ‘시장지상주의’가 결합하며 정치적 우경화가 뚜렷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실제 강남 지역에선 1992년 14대 총선에서 홍사덕 후보가 당선된 이후 단 한 번도 민주당 국회의원이 당선된 적이 없다. 홍사덕도 경북 영주 태생으로, 외모나 말투 역시 투박하고 전투적인 민주당 후보들보다 전형적인 강남 상류층에 가까웠다. 14대 총선 이후 새누리당 계열 후보와 민주당 후보 간 격차는 갈수록 벌어졌다. 심지어 2008년 18대 총선에선 그나마 강남갑에 비해 민주당 지지층이 많다는 강남을에서조차 40%포인트 차로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압승했다.

민주통합당 등 야권은 이번 선거를 강남의 정치 흐름에 반전을 가져올 수 있는 변곡점으로 삼으려 한다. 정동영·천정배 등 대통령 후보와 최고위원까지 지낸 거물급 전·현직 의원들을 ‘강남 벨트’에 포진시킨 것을 봐도 그렇다. 총선이나 지자체 선거 때마다 강남 지역을 사실상 ‘버린 곳’ 취급했던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다. 하지만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음에도 현지 분위기는 지금까지의 흐름을 역전시킬 만큼 야권 후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강남은 19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서울에서 김영삼(YS)에 대한 지지가 가장 높이 나오는 곳으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자유주의’ 성향을 띠었다. 하지만 1990년 3당 합당과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반호남’과 ‘시장지상주의’가 결합하며 정치적 우경화가 뚜렷이 진행됐다.

“포퓰리즘 세력 집권 막아야”

정동영 후보가 출마한 강남을은 서민 아파트와 빌라·다세대주택이 밀집한 수서·일원동을 끼고 있어 강남구 안에서도 그나마 야당이 발붙일 여지가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정 후보는 이곳에서도 악전고투하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치 신인인 김종훈 새누리당 후보에게 10~15%포인트 뒤지는 것으로 나온다. 그는 이 격차를 높은 인지도와 특유의 친화력을 무기로 차근차근 좁혀가겠다는 구상이다. 당의 공식 선거 의상인 노란색 점퍼 대신 진회색 정장 차림을 고집하는 것도 당색보다는 인물론으로 승부해보겠다는 셈법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그의 이런 구상이 얼마나 먹혀들지는 미지수다.

3월29일 대청역 앞에서 만난 윤아무개(75)씨는 “정동영씨가 거물이고 야심이 큰 인물이긴 하지만 걸어온 길을 보면 미덥지 못한 구석이 많다”며 “이번에도 여당 후보가 무난히 이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원동의 소형 임대아파트에 15년째 살고 있다. 대치역 은마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이아무개(53·인테리어업)씨는 “정동영 후보가 서울시와 우호적 관계를 내세우며 재건축 문제로 사람들을 꾀고 있는데, 강남 사람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했다. 그의 논리는 나름대로 정연했다. “반(反)개발론자인 박원순이 시장으로 있는 한 누가 국회의원이 돼도 강남의 재건축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기는 어렵다. 방법은 대통령을 잘 뽑아 위에서 압박하는 것 말고는 없는데, 그러려면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하도록 강남에서부터 힘을 실어줘야 한다.”

전형적 강남 부촌인 강남갑 지역은 아예 야권 후보가 발붙일 여지가 없어 보였다. 도곡동에 사는 양아무개(46)씨는 “포퓰리즘으로 나라 망쳐먹을 세력이 집권하는 걸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명박 정부가 실정을 했다고 하지만, 노무현 정부 5년보다는 그래도 나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청담동의 한 증권사 지점장인 차영도(42·가명)씨는 이런 강남의 정치 정서를 이렇게 풀이했다.

“밖에선 수구 꼴통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누구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 야당에 표를 던짐으로써 현재의 불만을 표출하는 것보다, 당장 만족스럽진 않지만 새누리당을 찍는 게 자신의 지위와 가족의 부를 지키고 키우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거다. 내가 볼 땐 강남에 아파트가 있고 지방에 땅도 있으면서 선거 때면 민주당 찍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다.”

» 강남을 선거구는 서민 아파트와 빌라·다세대주택이 밀집한 수서·일원동을 끼고 있어 강남구 안에서도 그나마 야당이 발붙일 여지가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정동영 민주통합당 후보는 이곳에서도 악전고투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 강남을 선거구는 서민 아파트와 빌라·다세대주택이 밀집한 수서·일원동을 끼고 있어 강남구 안에서도 그나마 야당이 발붙일 여지가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정동영 민주통합당 후보는 이곳에서도 악전고투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부동산 계급동맹’ 무너진 분당

강남은 어떤 연유로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에게 ‘넘사벽’이 돼버린 것일까. 유창오 소장은 지난해 손학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한 분당을과 강남을 비교하며 흥미로운 진단을 내놓는다. “분당도 강남처럼 새누리당의 아성이었지만, 그것은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까지만 그랬다. 집값이 떨어지고 전세금이 오르자 하우스푸어인 30~40대와 50대 이상 세대의 균열을 봉합해온 ‘부동산 계급동맹’이 무너졌다. 반면 강남은 부동산 경기 하락에도 불구하고 세대 간 계급동맹이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야권 지지자로 돌아선 분당의 30~40대는 집을 구하며 비용의 상당 부분을 금융대출에 의존했던 반면, 강남의 30~40대는 강남에 사는 부모의 지원으로 집을 장만한 경우가 많아 어지간한 경기변동에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강남의 계급 구성은 서울이나 수도권의 어떤 지역과 비교해도 뚜렷한 차별성을 보여준다. 2002년에 발표된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정치인·고급 공무원·교수·금융인·법조인·의사·군 장성 등을 포함한 상류층 저명인사(표본 4만6842명)의 48%가 강남·서초·송파구에 살고 있다. 이 가운데 압구정1동은 상류층 주거 비율이 서울 평균보다 17.4배나 높다. 그 뒤를 반포본동(10.46배), 잠실7동(10.42배), 압구정2동(9.24배) 등이 잇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강남의 형성 초기부터 서울 지역의 고소득·고학력층이 대거 이주해온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1975년 조사를 보면 강남·서초 지역의 초기 이주민의 76.6%는 서울 강북에서 이주해온 경우였는데, 회사원이 40%로 가장 많고, 공무원(16.4%), 상업(16.4%), 사업(10%) 순이었다. 당시 서울시의 평균 근로소득이 9만2천원이었는데, 강남 이주민 중에는 10만~20만원이 36.6%, 20만원 이상이 17.7%에 달해 고소득자가 많았다. 이들은 이주 동기로 ‘쾌적한 환경’(35.2%)과 ‘지가 상승 기대감’(33.5%)을 주로 꼽았는데, 잘 정비된 격자형 도로망과 중·대형 아파트 중심의 쾌적한 주거환경, 막 이전을 시작한 명문 중등학교들이 서울 시내 중·상류층의 이주를 촉진했다.

이후의 과정은 예상할 수 있는 경로를 따랐다. 높은 인프라 수준이 부유층 이주를 촉발하고, 이들의 욕구와 생활수준에 맞춰 인프라가 향상되다 보니 진입과 거주에 필요한 비용이 급격하게 상승해 신규 진입자를 배제하는 높은 장벽이 만들어지는 구조다. 그 결과는 강남 지역의 사회·경제적 지표에서도 드러난다.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강남구의 대학 재학 이상 고학력자 비율은 무려 75.4%에 이른다(서울 평균은 53.7%). 80%가 넘는 동만 대치1동(89.8%)·도곡2동(88.6%)·압구정동(87.8%)·대치2동(84.6%) 등 9개 동(전체 22개 동)이다. 월평균 가구소득을 봐도 강남·서초·송파구 평균이 399만원으로 서울의 나머지 지역 평균(323만원)보다 77만원 정도 많고, 부동산을 포함한 총자산 규모도 강남 가구가 6억2711만원으로 비강남 가구(3억7763만원)보다 2억5천만원가량 많다(2009년 서울시 복지패널조사). 이는 강남 지역의 높은 아파트 가격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아파트 단위면적(1㎡)당 평균 가격은 강남구가 935만원으로 서울시(504만원)와 전국(259만원) 평균보다 월등히 높다(국민은행 부동산 시세).

» 수서동 종합복지관에서 급식 봉사 중인 김종훈 새누리당 후보. <한겨레> 김명진

» 수서동 종합복지관에서 급식 봉사 중인 김종훈 새누리당 후보. <한겨레> 김명진

강남 안에 존재하는 ‘구별짓기’

이런 사회·경제적 지위의 우월성은 주민들의 사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를 강남에 사는 ‘상류시민’으로 정체화하며 삶의 양식과 사고 자체를 끊임없이 차별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구별짓기’ 전략은 심지어 강남 내부나 같은 주거단지 안에서도 일어났다. 도곡2동 타워팰리스에 10년째 살고 있는 최정연(45·가명)씨는 “먼저 들어온 1차 입주민들이 2·3차 입주민들에 대해 ‘우리는 대기업 임원과 의사·변호사·교수 등 지적 수준이 높은 고소득층이 대부분인데, 2·3차 입주민들 중에는 근본 없는 장사치가 많다’며 은근히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구별짓기가 ‘강남의 범위’(어디까지가 강남인가)를 인식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지난해 2월 발표된 한 연구논문(‘강남의 심상규모와 경계짓기의 논리’)을 보면, 강남 거주민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신의 생활수준과 유사하거나 그 이상인 경우만을 ‘강남 주민’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한 예로 서초구 잠원동에 사는 30대의 ㅎ씨는 “아파트값이 비싸지만 문화적 수준 차이가 크다”며 “송파는 강남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서초구에선 양재동과 내곡동, 강남구에서도 세곡·개포·일원·수서동은 강남에서 제외된다. 그에게는 아파트값보다 거주민의 문화·상징자본의 크기가 강남의 경계를 가른다. 1982년부터 강남구 압구정동에 살아온 고위 공무원 출신의 60대 남성은 대치·도곡동마저 ‘오리지널 강남’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동네(압구정·청담·삼성동)는 집값이 비싸서 아무나 못 오니까 젊은 사람들이 집값 싸고 평수 작은 은마나 대치로 가서 그쪽이 발전한 거다. 그런데 송파와 대치동, 도곡동이 다 비슷하다. 분위기도 그렇고 수준도 그렇고.”

반면 취재 중 개포1지구 입구에서 만난 장영환(52)씨의 말은 달랐다. “여기가 평수는 좁아도 평당 아파트값으로 따지면 압구정동 이상이다. 여기 사람들도 자식을 8학군 보내고 명문대학 진학시킨다. 수서나 송파는 몰라도 여기는 확실히 강남이다.” 이를 두고 도시연구자 이동헌(영국 런던대 박사과정)씨는 “강남은 지리적으로 고정된 공간이라기보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부단한 구별짓기·경계짓기 전략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공간”이라고 진단한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이 속한 생활세계에 대한 친밀감과 계층 사다리의 위칸으로 올라서고자 하는 상승 욕망이 타협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가 강남이란 얘기다.

이런 이유로 강남 사람들이 소속감을 느끼는 공동체(근린)의 범위는 좁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학력과 소득수준, 문화적 취향이 동질적이어야 하는데, 이 경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구별과 배제의 정치가 작동한다. 전문가들은 강남의 새누리당 몰표 현상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높이기 위한 ‘경제 투표’의 성격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들이 설정한 경계를 넘어오려는 외부인에 맞서 경계를 재확인하거나 담장을 높게 세우는 ‘울타리 치기’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대치동 선경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퇴직 공무원 조영기(66·가명)씨의 말도 이런 진단을 뒷받침한다.



도시연구자 이동헌(영국 런던대 박사과정)씨는 “강남은 지리적으로 고정된 공간이라기보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부단한 구별짓기·경계짓기 전략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공간”이라고 진단한다. 자신이 속한 생활세계에 대한 친밀감과 계층 사다리의 위칸으로 올라서고자 하는 상승 욕망이 타협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가 강남이란 얘기다.

“재건축 규제 푼다 해도 표 안 줘”

“강남 사람들이 한나라당(새누리당) 찍는 건 결코 부동산 가치를 올려줄 것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강북 서민들이나 근본 없는 젊은 아이들이 지지하는 좌파 정당에는 절대로 표를 줄 수 없다는 자존심이다. 이런 동네에서 민주당이 재건축 규제를 풀어주겠다고 하면 표를 줄 것 같나. 호남 사람들은 한나라당이 정권 잡는 걸 막으려고 민주당에 몰표를 준다고 하던데, 여기도 마찬가지다. 강남을 적대시하고 강남이 일궈온 성공과 가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 끔찍한 상황을 피하려고 악착같이 투표장에 가는 거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강남의 탄생
명문고 강남 이전이 결정적
오늘날 강남으로 불리는 지역이 탄생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그전까지 이곳은 한적한 농촌이었다. 한강 주변 땅들 대부분은 논이었고, 군데군데 야트막한 구릉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사이를 구룡산, 대모산, 우면산 등 남쪽 산지에서 발원한 탄천과 양재천, 반포천 등이 곡류를 이루며 한강으로 흘러들어갔다.
1960년 서울 인구가 200만 명을 돌파하자, 서울시는 인접한 경기 지역의 12개 면 90개 리를 시에 새로 편입한다. 이때가 1963년이었다. 3년 뒤 서울시는 편입된 한강 이남 지역에 10년에 걸쳐 12만 가구 60만 명을 수용하는 내용의 ‘남서울 도시계획’을 발표했고, 같은 해 착공한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1969년 말 완공돼 강남은 비로소 서울 생활권에 들어오게 됐다.
강남 개발은 서울시 인구분산정책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었다. 서울 인구를 한강 이북 40%, 이남 60%로 분산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여기엔 안보적 고려도 작용했다. 북한 무장공작원의 청와대 습격사건 1년 뒤인 1969년 서울 요새화 계획과 함께 한강 남쪽에 ‘제2서울’ 건설 계획이 발표된 사실을 봐도 그렇다.
그러나 개발사업은 좀체 활기를 띠지 못했다. 정부는 강남 개발을 행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1975년 강남구를 신설하고, ‘부동산투기 억제세 면제’ 조처를 단행했다. 동시에 개발 수요가 강남으로 집중되도록 한강 이북의 택지 조성을 불허하는 한편, 인구 집중을 유발하는 명문 고등학교와 법원 등 국가기관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1976년 경기고를 필두로 시작된 학교 이전의 효과는 확실했다. 명문고가 입지한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강남 8학군’이란 말이 등장했다. 이때부터 정부 공식 문서에나 등장하던 강남이란 지명이 일반인 사이에서 ‘남서울’ ‘영동’(영등포의 동쪽이란 뜻)보다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강남 개발은 1980년대 지하철 2·3호선의 개통과 더불어 완성됐다. 지하철은 사당·강남·양재 등 시외버스와 연결되는 지역 거점을 성장시켰는데, 여기엔 강남에서 1시간 거리에 신설된 종합대학 분교들의 구실도 컸다. 88올림픽을 앞두고는 변방 국가의 발전상을 세계에 과시하려는 각종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테헤란로 집중 개발도 그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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