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절한 관광버스에 앉은 김정호(64)씨는 창밖을 바라봤다. 흑백의 결혼 사진 속 아버지(1950년 숨짐, 당시 25살) 모습이 어김없이 떠올랐다. 울산을 출발한 버스는 5시간 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 도착할 것이다. ‘상고 기각과 파기 환송.’ 정반대 결과에 대비해 쓴 두 개의 성명서가 그의 품에 있었다. 버스에 앉은 머리 하얀 노인들은 제각기 창밖을 내다봤다. 법원을 향한 11번째 상경길이었다.
50년이 넘도록 인정 받지 못한 진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 8월5일에서 같은 달 26일 사이, 경남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의 17개 구덩이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의 6개 구덩이 앞 어딘가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모두 10번의 집단 총살이 확인됐다. 그것은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라 불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좌익 관련자를 통제하려고 설립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정부가 집단 학살한 것이었다.
김정호씨는 당시 3살이었다. 13살이 되던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동네 어른들은 유족회를 결성했다. 같은 해 8월, 구덩이에서 두골 825구가 발견됐다. 김씨의 할머니는 “교육이 있다고 해서 내가 새벽에 도시락까지 싸서 보냈는데…” 하며 가슴을 쳤다. 학살자 처벌을 주장하고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그런데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는 합동묘를 해체하고 유족을 처벌했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숨진 지 오래인 2007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유족 508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9부(재판장 지영철)는 2009년 원고 승소 판결했다. 민간인 학살의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18일, 서울고법 민사8부(재판장 김창보)는 1심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국가 책임이 인정돼 이제라도 다행”이라는 내용의 성명서 하나만 준비해온 노인들은 말문이 막혔다. 유족들을 대리한 김형태 변호사 얼굴만 봤다. 김 변호사 역시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소멸시효’가 문제라고 했다.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소멸시효는 사건 발생으로부터 5년, 알게 된 날로부터 3년이다. 고법은 유족들이 진작 알았고, 그때 소송을 냈어야 한다고 봤다. “1960년 유족회가 결성돼 진실 규명을 지속적으로 요청했다”는 이유였다.
1심의 판단 근거와 차이가 있었다. 1심은 “전시 중 경찰이나 군인이 저지른 위법행위를 객관적으로 외부에서 거의 알기 어렵다”며 진실화해위 결정일을 ‘안 날’로 봤다. 그 판단이 합리적으로 보였다. 근거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에서는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 재심 사건이 진행 중이었다. 유족회 활동으로 처벌받은 이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50여 년 만에 낸 재심이었다(지난 3월 이들에 대한 첫 무죄가 대법원에서 확정됐고, 민사소송에서 국가 배상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유족회를 만들었다고 처벌받던 시대에 국가를 상대로 어떻게 소송을 내겠느냐”는 항변은 당연해 보였다.
이제 관심은 대법원에 집중됐다. 청주·청원 보도연맹 사건 등 유사 사건을 맡은 하급심의 관심도 그랬다. 재판부들은 심리를 중단하곤 “대법원 판결을 먼저 보겠다”고 했다. 결과를 보고 소송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다른 지역의 유족들도 있었다.
그리고 지난 6월30일 대법원 선고 기일이 잡혔다. 고법 선고 뒤 2년 만이었다. 그사이 20여 명은 소를 취하했다. “고법에서 안 된다는데 되겠느냐”는 실망감에, 인지대 부담이 겹쳐서였다. 원고 5명은 고령으로 숨졌다.
“소멸시효 이유로 거부는 부당”
그날 오후 2시, 대법원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이제 와서 뒤늦게 ‘유족들이 집단 학살의 전모를 어림잡아서 미리 소송을 제기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해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1심과 같은 판단이었다. “나라가 책임져야 한다는 거지요? 이제 맞지요?” ‘파기환송’이라는 주문을 들은 노인들은 거듭 물었다. 법정 복도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노인들은 끄억끄억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참으며 김씨는 품속에 지닌 두 가지 성명서 중 하나를 꺼냈다.
송경화 기자 탐사보도팀 freehw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