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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진재 뒤 한국·일본인 구분 없이 구호활동 벌인 재일동포들… 내셔널리즘 뒤로하고 휴머니즘으로 내딛는 젊은 그들
등록 2011-09-07 09:58 수정 2020-05-02 19:26
» 지난 5월17일 일본 도쿄 청년상공회와 'NPO 우리학교' 등 재일동포들이 후쿠시마 조선초중급학교에서 파워레인저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로 분장해 공연을 펼치고 있다. NPO 우리학교 제공

» 지난 5월17일 일본 도쿄 청년상공회와 'NPO 우리학교' 등 재일동포들이 후쿠시마 조선초중급학교에서 파워레인저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로 분장해 공연을 펼치고 있다. NPO 우리학교 제공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 바로 그 소외의 상황을 의식하는 일이야말로 전진을 가능케 한다. 그 전진이란 다름 아닌 답답하고 옹색하게 굴절된 일상에서 광활한 보편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서경식 교수(도쿄경제대학)가 자전적 에세이 에 쓴 이 말은, 자이니치(재일동포)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인식하는 일이 더 큰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단초가 된다는 원래 뜻보다, 마치 도호쿠 진재 이후의 재일동포 사회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듯하다. 지진을 겪으며 재일동포 사회가 더 큰 ‘보편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지진이 발생한 지 반년을 앞두고, 재일동포들은 서로 돕고 보듬으며 대지진이 남긴 고난을 극복하고 있다. 거기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도 상관없었다. 일본인이냐, 조선인이냐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이름으로 서로를 보살피고 있다.

한국·일본인이 함께한 불고기 파티

지난 3월11일, 미국 지질조사국의 지진 규모 기준으로 근대적인 지진 진도 관측이 시작된 이래 4번째 규모이자 일본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인 진도 9.0의 대지진이 미야기현 센다이 해역을 강타했다. 지진의 여파로 거대한 쓰나미가 도시를 집어삼켰다. 인근의 모든 도로와 통신은 두절됐다. 속수무책이었다. 지진 당일 자위대와 경찰 병력이 피해지역으로 급파됐다.

지진 소식을 전해들은 도쿄의 재일동포들은 급히 지원단을 꾸려 구호물자를 챙겼다. 도쿄에서 자영업과 사업을 하는 재일동포들이 모인 도쿄 청년상공회와 민족학교를 지원하려고 설립된 ‘NPO(비영리법인) 우리학교’가 주축이었다. 대재앙 앞에서 이들은 너나없었다. 지진이 일어난 지 닷새 만인 3월16일, 이들은 생수와 라면, 담요 등 생활용품과 구급약 등 구호물품을 큰 트럭 2대에 싣고 후쿠시마로 향했다. 당시 구호활동에 함께한 ‘NPO 우리학교’의 김영훈(37) 간사는 “현지에 들어갔더니 군인과 경찰 다음에 우리가 온 것이었다”며 “민간으로서는 우리가 처음인 셈”이라고 말했다. 전시를 방불케 했을 당시 상황에서 구호물자를 싣더라도 피해지역까지 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 터. “도로가 차단돼 현지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도호쿠와 후쿠시마 조선학교의 의뢰를 받아서 가는 것으로 현지 경찰의 허가를 받았죠. 방사능 때문에 다들 피해지역에서 멀리 가려는데, 우리가 간다고 하니 현지 경찰도 놀라는 눈치더라고요.”

» 지난 3월23일 재일동포들이 미야기현에서 야키니쿠(불고기)를 이재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NPO 우리학교 제공

» 지난 3월23일 재일동포들이 미야기현에서 야키니쿠(불고기)를 이재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NPO 우리학교 제공

동포들이 도착하기 전 도호쿠와 후쿠시마 조선학교에 모인 이재민들의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김 간사는 “2~3일분의 응급식량이 거의 바닥났을 무렵, 우리가 도착했다”며 “빨리 간다고 했는데도 5일이 지난 거였다”고 말했다. 학교에는 재일동포뿐만 아니라 현지 일본인도 다수 피난을 와 있었다. 그들도 똑같은 구호와 지원의 대상이었다. 역차별은 없었다. “동포를 먼저 돕자고 갔지만 구분은 없었어요. 모두가 다 같은 사람이니까요.”

지난 3월23일에도 도쿄의 재일동포들이 미야기현의 도호쿠 조선학교를 찾았다. 도쿄에서 야키니쿠(불고기) 음식점을 하는 소상공인들이 주축이었다. 그들은 가게에서 파는 불고기 400여인분을 가져와 현지에서 파티를 벌였다. 일본인을 포함해 600여 명의 이재민이 고기와 정을 나눠 먹었다. 동포들과 일본인들은 정말 고맙다며 행사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지난 5월17일에는 후레시맨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로 분장해 공연을 펼쳤다. 지진과 방사능 공포로 떠는 현지 아이들을 위한 이벤트였다. 김영훈 간사는 “아이들이 모처럼 밝게 웃었다”고 말했다. 현재 도쿄 청년상공회와 ‘NPO 우리학교’는 지원활동과 더불어 트위터·페이스북·인터넷 등을 통해 현지에서 행방불명된 이들의 안부를 수소문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00여 명을 찾았는데, 그 가운데엔 사망자도 있다.

» 지난 7월24일 의사·교원 상공인 등으로 이뤄진 니가타의 30~40대 동포 80여명이 후쿠시마를 찾아 직접 방사능 제거 작업을 거들고 있다. NPO 우리학교 제공

» 지난 7월24일 의사·교원 상공인 등으로 이뤄진 니가타의 30~40대 동포 80여명이 후쿠시마를 찾아 직접 방사능 제거 작업을 거들고 있다. NPO 우리학교 제공

변화하는 동포들, 여전한 일본 정부

이재민 지원은 전국에서 이어졌다. 도호쿠 지방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홀로 구호물품을 싸들고 갔는가 하면, 교토에 사는 한 동포는 기름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탱크로리에 기름을 가득 싣고 센다이까지 가서 주민들에게 기름을 나눠주었다. 재일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도 도움의 손길로 분주했다. 진재 이후 민단도 총련도 아닌 제3의 재일동포들이 모여 만든 오사카 코리아엔지오센터와 재일코리안청년연합(KEY)도 숨가쁘게 움직였다. 코리아엔지오센터의 곽진웅 대표이사(45)는 “지진 이후 곧바로 지역의 젊은 동포들과 함께 성금과 구호품을 모아 후쿠시마와 미야기현에 보냈다”며 “동포들을 돕는다는 마음과 더불어 피해를 입은 모든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에 부지런히 나섰다”고 말했다. 오사카 재일코리안청년연합 지부 다나카 조 미나코(30) 대표는 “동포들뿐만 아니라 피해를 입은 모두를 위해 성금을 모금했으나, 일본 주류 언론에 동포들의 피해가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여전한 벽을 느낀다”고 말해 동포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무관심을 떠올리게 했다. 동포들은 더 유연하고 넓게 변화하는데 일본 정부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일본 정부의 여전함을 보여주는 것은 널려 있다.

후쿠시마 조선학교는 평균 방사능 수치가 0.8~0.9마이크로시버트(μSv)에 달하지만, 방사능 수치가 1μSv가 넘어야 제거 작업을 해준다는 일본 정부의 규정 때문에 공식 지원은 전무한 상태다. 지난 7월24일 의사·교원·상공인 등으로 이뤄진 니가타의 30~40대 동포 80여 명이 후쿠시마 조선학교를 찾아 직접 방사능 제거 작업을 거들었다. 늦은 정부 대응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도움을 주러 간 동포들에게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NGO가 먼저 뜨고 제일 나중에 국가가 왔다”며 “이런 나라가 어디있냐”고 성토했다. 일본인 요코가와 미노루(63)씨도 “한마디로 빠른 NGO에 굼뜬 정부”라며 일본정부의 늦장 대응을 질타했다. 현지의 동포들은 “일본 사람에 대해서도 대응이 늦지만 동포들에 대해선 더 늦는다고, 그것도 말하지 않으면 안 해준다”고 해 늦은 대응에도 시간차가 있음을 방증했다.

지진에 울고, 일본 정부의 차별에 또 우는 그들을 웃게 하는 것은 전국을 넘어 한국과 미국 등지에서 보내온 성원과 격려였다. 지난 8월24일 ‘NPO 우리학교’를 방문한 취재진에게 김영훈 간사는 교토에 있는 동포가 보내왔다는 펼침막 하나를 보여줬다. 거기에는 수많은 재미동포들이 손글씨로 적은 격려와 성원의 글귀가 가득했다. 세계에서 전해져온 그 마음을 고맙게 받으며 ‘NPO 우리학교’와 청년상공회 사람들은 도리어 “우리들도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느꼈다고 했다. 삶의 근거지인 일본을 벗어날 순 없겠지만, 사고와 의식은 세계로 나아가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사람은 겪은 만큼 느끼는 법이다.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민감하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 그 자신이 고통과 아픔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재일동포들이 도호쿠 대지진 이재민들의 복구와 구호에 발 벗고 나선 것은 민족주의의 발로라기보다 고난과 슬픔으로 점철된 재일동포의 역사가 그들로 하여금 이재민의 고통에 공감하게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일본 정부가 ‘내셔널리즘’이라는 20세기 유산에 머물러 있는 사이, 그들은 어느덧 ‘자이니치’라는 민족적 특수성에서 ‘인류애’라는 지구적 보편성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도쿄·오사카(일본)=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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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활동 벌이는 ‘NPO 우리학교’
재일동포 변호사 육성 장학제도 운영

»'NPO 우리학교' 김영훈 간사. 한겨레21 정용일

»'NPO 우리학교' 김영훈 간사. 한겨레21 정용일

‘NPO 우리학교’는 재일동포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를 후원하려고 2008년 7월 설립됐다. 2007년 열린 청년상공회(청상회) ‘민족포럼’에서 “젊은 상공인들이 동포사회에 기여하자는 재일동포 김순식 변호사의 제안”이 계기가 됐다. ‘우리학교’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우리 학교라는 의미다. 조선학교, 공국학교(재일본대한민국민단 소속 학교), 일본학교 학생 구분 없이 모두 지원 대상에 포함된다. 인적 구성은 청상회를 모태로 하지만, 운영은 독립적으로 이뤄진다. 활동 내용과 재정 상황, 장학금 지급 내역 등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수시로 공표된다. 재정은 계좌 개설을 통해 이뤄진다. 1계좌(매달 1천엔) 이상 후원하면 회원이 될 수 있다. 현재 총 250계좌가 개설돼 있다.
‘국적을 넘어서 단합해야 한다’는 설립 취지는 여러 국적의 회원들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국적의 재일동포가 가장 많고, 일본국적, 조선적을 가진 회원도 있다. 양심적인 일본인 회원도 참여하고 있다. ‘NPO 우리학교’가 당면한 일은 지진 피해를 입은 조선학교를 후원하는 사업이다. 도호쿠 조선학교 재건립 모금 사업도 검토하고 있다. 전파된 교실 건물 대신 기숙사를 개조해서 교실로 쓰는 방안과 새로 교실 건물을 건립하는 방안을 두고 예산 상황과 일본 정부의 지원 여부 등을 고려하고 있다. 한국에서 ‘몽당연필’을 통해 걷힌 지진피해 조선학교 후원금을 해당 학교에 전달하는 일도 맡고 있다.
‘NPO 우리학교’는 4년 전부터 재일동포 변호사 육성 사업에도 열심이다. 로스쿨에 진학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매해 장학금 200만~300만엔을 지급하는 프로그램이다. 변호사 배출을 목적으로 한 장학사업은 재일동포 사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여기에는 상공업을 주로 하는 재일동포들이 겪은 차별이 한 배경이 됐다. 3년에 한 번 받는 세무조사를 매년 당한다든지, 변호사의 조력을 받지 못해 손해를 보는 일이 많았던 탓이다. 동포사회에 변호사가 별로 없다는 사실도 한 이유가 됐다.
김영훈 ‘NPO 우리학교’ 간사는 “장학금을 받기 때문에 나중에 꼭 동포사회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않는다”며 “다만 장학금 지급 면접 때 동포들이 처한 현실을 알려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다”고 말했다. 올해 처음으로 변호사가 배출돼, 현재 나가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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