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만 하소서.’
제2차 희망의 버스가 떠나던 7월9일,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마디를 들으러 갔다. 그의 “살겠다”는 말. 그 말을 내 귀로 들어야 얼마의 시간을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한마디를 잊지 못해서 갔다. “희망의 버스 한 번만 더 와주면 저도 살아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첫 희망의 버스가 떠난 다음,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트위터에 남긴 말이다.
희망의 버스 승객들은 사람을 살리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가 우리를 “천수보살”이라고 부르자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다. “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틀거릴 때마다 천수보살의 손으로 제 등을 받쳐주신 여러분, 꼭 이기겠습니다. 157일이 아닌 1570일을 견뎌서라도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는데,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35m 높이 85호 크레인을 받치는 천수보살의 손 하나가 되려고 갔다.
혼자서 박수 치는 아가씨사람을 살리는 크레인, ‘크렌나무’ 아래서 들었던 말들은 소문이 되었다. ‘퀴어버스’를 탄 진보신당 성소수자위원회의 한 활동가는 “1차에 다녀온 이한테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경 구절이 현실이 되었단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6년 전에 김진숙씨의 강연을 들었다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의 한 레즈비언은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여성을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회원들이 준비한 손팻말은 “85호 크레인에 뜨는 무지개”라고 희망하고 있었다. 탬버린과 우쿨렐레 등을 준비해온 이들도 있었다. 성소수자들이 버스를 타고 자유와 해방을 향해 떠나는 영화, 처럼.
7월9일 저녁 8시께, 억수처럼 비가 쏟아지는 부산역, 젊은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우산, 왼손에는 “소금꽃이 희망이다” 손팻말을 들었다. 한진중공업 해고자 가족이다. “아기가 어리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갓 돌 지났지예.” 해고자 김동석씨의 아내 도경정씨가 답했다. 아기 성민이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겨우 다시 만났는데 벌써 헤어질 때를 걱정해 묻는다. “희망 버스 왔다 가면 허전하지 않아요?” “친척이나 친구도 왔다 가면 허전한데, 허전하죠. 그래도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외롭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거지예. 한번 이겨버린 것 같고.” 위로할 말을 찾다가 “아, 1차 버스 떠날 때 주신 양말 신고 왔어요”라고 말을 이었다. 성민이 엄마가 “이번엔 희망의 배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애기 아빠들이 종이배 1만 개를 접었어예. 배 만드는 사람들인데 배를 못만드니까…. 초등학교 애들한테 배워가며 접었어예.” 꼬박 일주일 걸려 접은 ‘희망배’는 경찰 차단벽이 가로막아 내내 시민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버스가 떠나기 전에야 겨우 차단벽 너머에서 농성하는 아빠들 침낭과 배낭에 희망배는 담겨 나왔다. 그나마 가족대책위 엄마들이 경찰에게 사정사정해서 가능했다.
부산역을 출발했다. 이따금 길가에 눈에 걸리는 펼침막이 있었다. “한진중공업은 투쟁현장이 아니라 생산현장입니다.” 한진중공업 협력사 임직원 이름으로 내걸린 펼침막이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한진 해고자들이야말로 생산현장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은 것 아닌가. 애초에 서울시청 광장에서 막을까 했다. 아니면 고속도로 초입 만남의 광장에서 막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부산역을 출발해 영도로 향하자, 나아가 지금은 부산대교로 불리는 영도다리까지 건너자, 어… 정말로 만나나?
영도다리를 건너자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젊은 여성이 지나가는 희망의 버스 대열을 보며 박수를 친다. 열심히 박수를 치니까 발마저 살짝 들린다. 가벼운 옷차림이 멀리서 온 사람은 아니다. 눈에선 설핏 눈물도 비친다. 그녀를 지나쳤다 돌아와 물었다. “혹시 한진 해고자가 친척이세요?” 머뭇거리는 그의 옆에서 그를 닮은 여성이 답한다. “KTX 승무원이에요. 저는 엄마고요.” 한진중공업 노동자처럼 느닷없이 해고당하고, 기나긴 복직투쟁 중인 KTX 승무원은 영도에도 있었다. 이어진 짧은 대화. “이 동네 사세요?” “네.” “얼마나 사셨어요?” “30년요.” “여기서 태어나 사셨나 보네요.” 해고는 어디에나 있었다. KTX 승무원 박미경씨는 “누구보다 해고의 아픔을 잘 아니까”라고 말했다. 이틀 전에 KTX 조합원들과 한진중공업 앞에 다녀왔단다.
그의 용기가 선물한 치유와 정화정말로 만나진 못했다. 멀리 한자로 쓰인 한진중공업 글씨가 보이는데, 경찰이 행진을 막았다. 1시간여 빗속을 걸어온 대열의 뒤쪽에서 전동 휠체어 40여 대가 앞으로의 일정을 상의하고 있었다. 이날 장애인 버스에 100명이 탔다. 여전히 빗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여성도 휠체어에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구에서 온 박명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였다. 그는 “우리도 김진숙씨 옆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 살에 소아마비 장애인이 돼 마흔이 넘어 장애인 야학에서 처음 공부를 시작했고, 48살에 초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그의 이력은 김진숙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달리 노동문제를 논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일을 못해서 가난하고 비장애인은 일을 해도 가난하다.” 그의 한마디에 오늘의 현실이 응축돼 있었다. 그러나 희망의 버스는 그에게 자유다. “정말 오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올 수 없었어요. 이렇게 함께 오니까 우리도 올 수 있죠.” 이동의 자유가 공기와 같은 비장애인이 몰랐던 희망 버스의 소금 같은 구실이다. 새삼 부산역에서 영도까지 장애인 휠체어 옆에서 우산을 들고 같이 걸었던 이들이 고마웠다.
어느새 날짜가 바뀌었다. 차단벽 양쪽에서 경찰과의 충돌이 이따금 있었다. 그리고 7월10일 새벽 1시40분께 김진숙 지도위원의 전화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나왔다.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먼 길을 빗속을 뚫고 찾아와서 만나고 싶어했던 김진숙입니다. 저도 여러분들을 한 달 동안 목이 메게 기다려왔습니다.” 끝으로 그는 “우리는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꼭 만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는 정말 벽을 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밤새 열띤 발언과 공연이 이어졌다. 숱한 말들 가운데 서울 신월동 열린교회 정연길 목사의 호소가 지금도 귓가를 울린다. “저는 걸어가겠습니다. 걸어가는 척하지 말고 걸어가는 겁니다. 김진숙 동지를 만나러 왔으니까요. 한명씩 차단벽 쪽으로 걸어가다 경찰이 잡아가면 잡혀가는 겁니다. 그리고 단식하는 겁니다. 김진숙씨가 크레인에서 내려올 때까지 단식합시다.” 폭우의 밤이 지나자 땡볕의 낮이 밝았다. 길가 담벼락 그늘에서 잠시 더위를 식히고 있는 가족이 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 자녀와 함께 참가한 나연정씨 부부와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함께 온 최수미씨였다. 이들은 입을 모아 “안 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85호 크레인이 어떤 의미기에 노숙까지 마다하지 않을까. 나씨는 “그동안 분노의 감정을 느껴왔다면, 이번에는 정화되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주 ‘치유와 정화’를 말했다. 나씨는 “김진숙씨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만나는 오작교, 시민과 노동자가 만나는 오작교, 양심적 시민이 서로 만나는 오작교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옆의 최씨는 차벽에 대해 “한 기업을 위해 정치든 국가든 꼼짝을 못해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일개’ 기업을 위한 벽 앞에서 14시간 넘게 있어보니 알겠다. 김진숙씨의 말대로 “국회도, 외신도 무시하는 이 나라에서 자본의 위치가 어딘지 뼈저리게 확인했다”.
인연의 사슬로 묶인 85호 크레인한낮의 땡볕을 버티는 사람들 사이에, 한진중공업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한진 노동자들은 차단벽 너머에 격리돼 있어 좀체 보지 못하던 옷이다. “조합원이세요?”라고 물으니 “해고자지요”라고 답하는 이용대씨. 54살 노동자는 “(차벽) 안에 있다가 밖이 궁금해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25년 전 김진숙 지도위원과 같은 부서에서 일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보니 김진숙씨가 해고된 후배에게 쓴 글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내가 해고되지 않았고 너 또한 해고되지 않는다면 우린 조립팀에서 김주익 지회장과 함께 이용대 대의원 같은 분들과 조립팀 동료로, 선후배로 평화롭게 살고 있을 것이다.” 크레인 중간에 오른 ‘영도의 7인’ 중 한 명이던 그는 이틀 전에 내려왔다. 그는 “우리를 보고 동조 점거농성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저분을 모시고 내려오려고 올라간 사람들”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저 크레인의 기막힌 사연은 한둘이 아니다. 거기엔 김진숙씨의 입사 1년 후배로 두 번 해고되고 세 번 징역을 갔다온 박성호씨가 있다. ‘김 지도’가 “영제 형”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중풍으로 쓰러지신 어머니 대소변 받아내며, 모임을 하다가도 집으로 달려가 진지 챙겨드리고 다시 나오던 참 착하고 무던한 아들 영제 형”()은 1986년 김진숙씨와 함께 해고됐다 2006년 복직했다. 스물여덟에 해고됐다 마흔아홉에 복직한 ‘영제 형’의 ‘20년 만의 복직’을 두고 김진숙씨는 “배가 아주 안 아픈 건 아니오나 그보다는 20년 동안 두레박처럼 매달려 걸핏하면 쿠당탕탕 가슴속 여기저기를 부딪곤 하던 육중하고 녹슨 쇳덩어리 하나가 후두둑 더께 앉은 녹 찌꺼기를 분주히 날리며 비로소 철거되는 기쁨이 훨씬 크다”고 썼다. 꼬박 20년, “지랄 같은” 복직투쟁을 함께한 이들에 대한 의 미안함은 오늘 고스란히 ‘영제 형’의 마음일 것이다. “나를 여기까지 꾸역꾸역 떠메고 온 9할은 사실 부채감이었다. 저들이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내가 먼저 떠날 수는 없는”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 그 지독한 인연의 사슬로 85호 크레인은 묶여 있다.
생일이었던 지난 7월7일 김진숙씨는 이런 트위터 글을 남겼다. “낼은 영제 형 생일입니다. 86년 같이 해고돼 모진 세월을 함께 겪었습니다. 2003년 두 사람의 지기를 땅에 묻은 대가로 20년 만에 복직해 5년 만에 다시 해고된 형. 형이 크레인 중간 지점에 오른 걸 제가 며칠 동안 몰랐습니다. 한 번도 위를 쳐다보지 못하는 형의 마음….” 부산역에서 만난 도경정씨는 “그게 참 마음이 아픈데… ‘우리는 그래도 애들이 컸으니 형들이 위에 있겠다, 아우들은 내려가라’고 했다”고 전했다. 구속 등을 고려한 해고자들의 서글픈 분업이다.
이용대씨를 만나고 나가는 길에 미셸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위원장을 만났다. 미셸은 “필리핀에서도 못 맞아본 최루액 물대포를 한국에서 맞았다”고 말했다. 한진중공업 필리핀 수비크조선소에 대해 묻자 그는 “한진은 한국에서 했던 짓을 필리핀에서 하고 있다”며 “그것이 내가 여기에 온 이유”라고 말했다.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전화로 연결된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제가 어떻게 포기하겠습니까”마침내 그가 말했다. “전국에서 달려온 희망 버스 여러분, 여러분이 계신데 제가 어떻게 포기하겠습니까.” 그 한마디를 들었다. 만나지 못해도 되었다. 이어서 ‘김 지도’가 “900만을 헤아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장애인들, 성적 소수자들, 철거민들…”이라고 말하자 앞에 서 있던 레즈비언 여성의 어깨가 더욱 심하게 들썩였다. 나중에 농담처럼 퀴어버스 승객들은 “소금꽃이 우리를 부르자 우리는 꽃이 되었다”며 웃었다. 언제나처럼 김진숙의 말은 일상에서 소외된 이들과 연대해달라는 호소로 끝났다. “희망의 버스는 모든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향한 새로운 희망이고 미래를 향한 힘찬 출발입니다.” 그제야 정리해고를 이기고 비정규직을 없애는 ‘85호 슈퍼크레인’, 사람을 살리는 ‘크렌나무’ 아래를 떠날 수 있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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