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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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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년, 7개의 비극에 전하는 연하장

피 흘리며 새해를 맞는 세계의 분쟁지역들…

한국의 평화활동가 7명이 그곳에 남겨두고 온 지인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편지를 쓰다
등록 2011-01-27 14:15 수정 2020-05-03 04:26

며칠 뒤면 설날이다. 명절이다. 잔치다.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만난다. 어린 손자·손녀도 달려간다. “할아버지!” “할머니!” 예쁘게 한복을 차려입고 선물도 건네고 명절 음식도 실컷 먹는다. 새해 인사를 올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가 누리는 명절의 풍요로움과 평화. 전세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유혈충돌이 빚어지는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명절의 풍요로움은 꿈만 같다. 북한의 연평도 공격 뒤 피난민처럼 보따리를 안고 배에서 내리는 연평도 주민들의 모습과 포탄에 박살난 집들을 보면서 우리는 잊고 지내던 평화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세계 곳곳에서는 올해도 인종·언어·종교·영토 등을 둘러싼 분쟁으로 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평화로 가는 해법은 좀체 보이지 않고 테러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설날, 새해를 맞는 우리의 명절을 앞두고 한국의 평화활동가와 자원봉사자 등 7명이 각각 활동했던 분쟁지역의 지인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인터넷 등이 안 돼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졌거나 음력을 모르는 지인도 많다. 하지만 새해, 먼곳의 그들에게도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은 간절하다. 2명의 활동가는 사진은 물론 편지를 보내는 자신과 받는 지인의 이름을 모두 가명으로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저 멀리 낯선 땅에서 한국어로 쓰는 편지조차 혹시나 받는 이에게 닥칠지 모를 불이익을 우려해야 하는 게 분쟁지역의 현실이다. 편지를 소개하기에 앞서 각 분쟁지역의 상황을 개괄해본다.





<font color="#008ABD"><font color="#008ABD">1. 200만 난민의 이라크</font></font>

2007년 6월8일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 도로에서 미군이 이라크인들을 검문하고 있다.REUTERS/ GORAN TOMASEVIC

2007년 6월8일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 도로에서 미군이 이라크인들을 검문하고 있다.REUTERS/ GORAN TOMASEVIC

2003년 3월20일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제거 등을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해 4월10일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했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처형됐지만, 자살폭탄 테러 등 이라크인들의 저항이 계속되면서 이라크전 발발 이후 미군 4400여 명이 숨지고 민간인은 10만 명 넘게 희생됐다. 7년여의 전쟁 동안 삶터를 잃은 난민은 200만 명에 이른다. 미국은 침략의 구실이 됐던 대량살상무기를 끝내 찾아내지 못한 채 지난해 8월 종전을 선언하고 전투병력을 철수시켰다. 남은 5만 명은 이라크군에 대한 교육·훈련을 맡고 있으나, 올해 말까지는 모두 철수할 예정이다. 미국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지난해 3월 총선을 치렀지만,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없던 상황에서 종파·민족 세력 간 갈등을 빚다가 9개월여 만에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font color="#008ABD">2. 수렁에 빠진 전쟁, 아프가니스탄</font>
지난해 7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지역에서 미군 등이 탈레반을 공격하고 있다.REUTERS/ BOB STRONG

지난해 7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지역에서 미군 등이 탈레반을 공격하고 있다.REUTERS/ BOB STRONG

지난해 10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주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미군 옆에 아프간 소녀가 앉아 있다.연합 AP

지난해 10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주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미군 옆에 아프간 소녀가 앉아 있다.연합 AP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을 은신시켰다며 같은 해 10월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내건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미국 역사상 최장의 전쟁이 된 아프간전의 수렁에서 아직 헤매고 있다. 미국은 전쟁 10년 만인 올해 7월부터 철군에 들어가 2014년 철군을 완료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미군이 1천 명 넘게 희생됐고, 민간인 희생 규모는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오히려 탈레반 세력이 갈수록 커지면서 수도 카불까지 위협받고 있다. 지난해 12월19일에도 카불 외곽에서 탈레반이 두 차례의 자살폭탄 테러를 벌여 20명이 목숨을 잃는 등 불안정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평범한 이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피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font color="#008ABD">3. 출구 없는 충돌의 땅, 팔레스타인</font>
지난해 5월 이스라엘 국경수비대가 요르단강 서안의 벨라트 잘라에서 한 인권운동가를 연행하고 있다.연합 AP

지난해 5월 이스라엘 국경수비대가 요르단강 서안의 벨라트 잘라에서 한 인권운동가를 연행하고 있다.연합 AP

1918년 이후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랍 세력에는 독립을 제안하고 유대인에게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도록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등 탄압이 거세진 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이 늘어나면서 아랍인과 충돌이 빚어졌다. 유엔은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 예루살렘 특별관리지역 등으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으나,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뒤 미국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 반대하는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네 차례 전쟁이 벌어졌으나 아랍 진영이 모두 패배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이 살던 땅을 이스라엘에 내준 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내몰려 제한적 자치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건설해 이스라엘과 공존하는 ‘2개 국가’ 수립 방안이 사실상의 해법으로 여겨지지만, 이스라엘 강경파 등이 팔레스타인인 거주 지역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강행하는 등 중동 평화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font color="#008ABD">4. 희생의 역사, 쿠르드</font>
2008년 3월 터키의 한 쿠르드족 여성이 시위 현장 에서 쿠르드족 반군 지도자의 사진을 들고 있다.연합 AP

2008년 3월 터키의 한 쿠르드족 여성이 시위 현장 에서 쿠르드족 반군 지도자의 사진을 들고 있다.연합 AP

쿠르드족은 나라 없는 대표적 민족이다. 터키 남동부에 주로 살며 인접한 이라크와 이란 지역에도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쿠르드족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이란 지역에 ‘쿠르디스탄인민공화국’을 세웠지만 소련이 철수하자 10개월 만에 무너졌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수천 개 쿠르드족 마을이 초토화되고 20만 명 가까이 학살됐다. 터키에서는 인구 7200만 명 가운데 1200만 명에 달하는 쿠르드족이 정부의 억압 및 동화정책으로 수난을 겪었다. 쿠르드족 독립운동 조직인 쿠르드노동자당(PKK) 중심의 반군은 자치권 등을 요구하며 1984년 이래 정부군과 무력투쟁을 벌여 그동안 양쪽에서 4만2천여 명이 희생됐다. 한편 이라크에서는 쿠르드족이 상당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지난해 12월 새로 구성된 연립정부에도 참여하고 있다.

<font color="#008ABD">5. 분단의 땅, 카슈미르</font>
2008년 8월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타이어를 불태우며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AP 연합

2008년 8월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타이어를 불태우며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AP 연합

식민지 시대에 같은 영국령이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파키스탄과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로 1947년 분리독립하면서 갈등을 빚어왔다. 카슈미르는 두 나라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토호국으로, 주민의 80%가 이슬람교도지만 왕은 힌두교도였다. 결국 카슈미르를 인도와 파키스탄 가운데 어느 국가로 귀속할지를 놓고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벌어졌다. 카슈미르는 현재까지 인도 점유 카슈미르와 파키스탄 점유 카슈미르로 분할된 채 두 나라가 충돌하는 분쟁의 땅으로 남았다. 지난해에는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던 10대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숨진 뒤 무슬림 시위대와 인도 보안군 간의 유혈충돌이 빚어져 100명이 넘게 숨졌다. 이 지역에서는 무장독립운동이 본격화한 1989년 이후 6만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font color="#008ABD">6. 소수민족의 눈물, 버마</font>
카렌족-버마 국경 카렌족 난민촌 이 투타 캠프에서 반 군이 무기를 들고 서 있다.이유경

카렌족-버마 국경 카렌족 난민촌 이 투타 캠프에서 반 군이 무기를 들고 서 있다.이유경

버마 전체 인구의 30% 남짓한 130여 개 소수민족은 군사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다. 특히 버마 동부와 타이 국경지역인 미야와디에 주로 거주하는 최대 소수민족 카렌족(약 7%)은 기독교화된 뒤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적극 협력한 탓에 1948년 독립 이후 버마 중심 민족인 버마족(약 70%)과 갈등이 깊어졌다. 1948년 정부군이 카렌족을 학살한 뒤 무장투쟁이 펼쳐졌고, 군사정권이 수립된 뒤 소수민족에 대한 강제 이주와 처형 등 탄압은 거세졌다. 카렌족 400만여 명 가운데 11만여 명은 탄압을 견디다 못해 타이로 피난해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카렌족 반군과 정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최소 2만 명이 타이로 피난을 떠났다. 카렌족뿐 아니라 소수민족이 많은 5개 주에서는 지난해 11월 치러진 20년 만의 총선에서 투표가 아예 실시되지 않는 등 ‘2등 국민’으로 취급받고 있다.

<font color="#008ABD">7. 공포와 혼란의 섬, 필리핀 민다나오</font>
2007년 11월 필리핀 민다나오섬에서 정부군 을 지원하는 향토군이 차량 검문을 하고 있다.한겨레 자료

2007년 11월 필리핀 민다나오섬에서 정부군 을 지원하는 향토군이 차량 검문을 하고 있다.한겨레 자료

스페인은 16세기 필리핀을 지배하면서 이슬람교를 믿는 원주민 모로족을 수도 마닐라에서 700km 떨어진 민다나오섬 등의 남부지역으로 몰아냈다. 모로족은 이후로도 가톨릭계의 탄압을 받으며 빈곤에 시달려왔고, 1969년 모로족 해방을 목표로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이 결성됐다. 1996년 필리핀 정부와 평화협정이 체결됐으나, 이후 MNLF에서 분파한 원리주의 조직들이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납치와 테러 등을 감행해왔다. 특히 알카에다와 연계한 것으로 알려진 반군세력 ‘아부 사야프’(ASG)가 1991년 이후 활동을 벌이면서 불안정이 가시지 않고 있다. 2009년 11월에는 무장한 괴한 100여 명이 이 섬에서 지역 정치인과 언론인 등 50명을 납치한 뒤 잔인하게 살해해 충격을 낳았다.

이런 설명만으로 분쟁지역민들의 삶의 고통을 담아내기는 어렵다. 대신 7명이 보낸 편지 한줄 한줄 속에 힘겨운 그들의 삶이 내비친다. 그들에게 설날 인사를 보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는 평화가 오기를….”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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