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저작권 유효기간은 말도 되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이 죽고 70년 지난
뒤에도 돈을 받겠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작품이 만들어지고
1~2년 동안 수입을 내지 못하면 그 뒤에 수입을 내기 어렵다. 5년의 저작권
유효기간도 충분하다.”-스웨덴 해적당 누리집
지난 2006년 5월3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한 인터넷업체 사무실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사무실에 있던 컴퓨터를 압수하고 직원 세 명을 연행했다. 이 업체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인터넷 파일 공유업체인 ‘파이럿베이’(www.thepiratebay.org)였다. 한 해 앞서 스웨덴 저작권법이 개정된 탓이 컸다. 2005년 여름까지만 해도 스웨덴에서는 무단 복제된 저작물도 개인적인 용도로 내려받으면 법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럽연합의 권고에 따라 스웨덴 의회는 2005년 7월 저작권 보호를 강화한 저작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새 법에 따라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 복제된 저작물을 내려받는 행위는 불법이 됐다. 파이럿베이는 스웨덴에서 누리꾼들이 영화 및 음반을 내려받는 가장 거대한 온라인 공간이었다. 이곳이 새 법의 시범 케이스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웨덴 언론의 폭로가 뒤따랐다. 사건의 이면에는 미국 정부 및 영화업계가 있었다. 미국 정부는 자국 영화업계의 이해를 반영해 무역제재 등을 수단으로 스웨덴 정부를 압박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미국영화협회와 스웨덴 외무부가 주고받은 서신 내용도 공개됐다. 여론이 들끓었다. 파일 공유 문제도 전 사회적 이슈로 함께 떠올랐다. 2006년 6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스웨덴 사람 가운데 48%는 저작권이 있는 노래나 영화를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내려받는 것도 합법적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반대로 답한 사람은 34%였다.
스웨덴에서 출발해 유럽의회 의원 배출34살의 엔지니어인 리카드 팔크빙어는 저작권법 재개정을 위해 온라인 탄원서를 모으는 누리집을 연 때는 2005년 12월 말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팔크빙어는 아예 당을 만들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당 이름은 정부의 저작권 개정안에 항의하는 의미로, 인터넷상에서 저작권 침해 행위를 뜻하는 ‘해적’(pirate)으로 정했다. 이렇게 세계 최초의 ‘해적당’이 만들어졌다. 마침 2006년 5월 파이럿베이의 압수수색은 여론에 불을 붙였다. 이틀 사이에 회원 수가 2천 명 늘었다. 해적당을 연구한 한 논문은 당시 상황을 “마치 벌집을 건드린 것 같았다”고 그렸다.
2006년 9월 총선에 처음 후보를 낸 해적당은 0.63%의 표를 얻었다. 규모는 꾸준히 불었다. 2008년 당원 수로는 녹색당을 앞질렀다.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득표율은 7.13%로 급상승했다. 크리스티안 엥스트룀이 유럽의회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됐다. 같은 해 12월 리스본 조약이 발효되면서 바뀐 비례대표 산정 기준에 따라 아멜리아 안데르스도테르는 해적당의 두 번째 유럽의회 의석을 차지했다. 스웨덴의 해적당 모델은 국제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웃한 핀란드를 비롯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에서 해적당이 연이어 결성됐다. 지난 4월 브뤼셀에서 열린 해적당 국제 모임에서는 ‘해적당 인터내셔널’이 결성됐다. 인터내셔널의 누리집(www.pp-international.net)을 보면, 소속 정당이 있는 국가는 미국·브라질 등을 포함한 22개국이었다. 이 가운데 유럽국가가 19개국이었다. 해적당 결성을 준비하고 있는 나라까지 포함하면 45개 국가에 이른다. 독일에서는 지방의회 선거에서 두 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작은 씨앗은 뿌려지고 있다. 정보공유연대와 진보넷 등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안데르스도테르 의원을 오는 10월17일부터 닷새 동안 공식 초청했다. 남희섭 변리사는 “해적당의 노하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해적당 설립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저작권 효력 기간 70년에서 5년으로”해적당 ‘열풍’이 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해적당의 정강을 살펴봤다. 해적당의 노선을 밝힌 ‘원칙 선언문 3.2 버전’을 보면, 다른 정당과 뚜렷한 차별점을 보이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저적권법의 개혁, 둘째 특허제도 폐지다.
우선 저작권법 개혁과 관련해 해적당은 개인이 비영리 목적으로 자유롭게 창작물을 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웨덴 개정 저작권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 흔히 저작권자 사후 70년 동안 보장되는 저작권의 효력 기간을 창작물이 공표된 이후 5년으로 대폭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편다. 해적당의 원칙 선언문을 보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금 길지만 들어보자.
“저작권은 문화 작품의 창조와 발전, 전파를 고취해 사회에 혜택을 준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두 가지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하나는 창작물이 모든 사람을 위해 유용하게 쓰이고 고루 퍼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창작자가 인정받고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저작권 제도가 그 균형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문화 작품과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조건으로 무료로 전달될 때 사회 전체가 혜택을 볼 수 있다.”
해적당은 문화와 지식은 더 많이 나눌수록 좋다고 본다. 따라서 파일 공유와 P2P 기술은 금지할 것이 아니라 장려해야 한다. 인터넷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방대한 도서관이 될 것이라 본다. 그러나 저작권 제도가 소수 대형 자본의 이해를 중심으로 맞춰지다 보니 일반 시민이 창작물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됐다. 이에 따라 해적당이 요구하는 것은 ‘균형 잡힌’ 저작권 제도다. 해적당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파괴적인 정책이 아니다. 다시 원칙 선언문을 보자.
“우리는 저작권 제도가 초기 모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보호 대상이 되는 창작물의 상업적 사용에 대해서만 규제를 가하도록 법이 개정돼야 한다. 비상업적 목적으로 창작물을 공유하고 퍼뜨리고 사용하는 것은 결코 불법이 돼서는 안 된다. 창작물의 공정한 사용은 사회 전반에 혜택을 주기 때문이다.”
해적당은 현재의 저작권 제도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인터넷 시대에 적절한 새로운 저작권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해적당의 유럽의회 의원인 엥스트룀은 유럽 학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의 제도는 18~19세기에 기원한 것이고, 새로운 기술발전이 가진 가능성을 고취하는 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다. 특히 특허와 저작권법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인정해주기보다 특권층과 강자에게 정보를 몰아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저작권의 유효기간도 창작물이 공표된 시점을 기준으로 5년으로 대폭 낮춰야 한다는 것이 해적당의 견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저작권 유효기간이 저작권자 사후 50년으로 돼 있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70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스웨덴 해적당의 누리집에서는 “오늘날의 저작권 유효기간은 말도 되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이 죽고 70년이 지난 뒤에도 돈을 받겠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밝혔다. 해적당은 특히 문화 창작품의 수명이 짧아진 점을 주목한다. 해적당은 “만약 작품이 만들어지고 1~2년 동안 수입을 내지 못하면 그 뒤에 수입을 내기 어렵다. 5년의 저작권 유효기간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해적당의 주장을 따르다보면 반대로 저작권자들의 권리가 훼손되지 않을까? 스웨덴 해적당은 그런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설명한다. P2P 다운로드 방식과 오프라인 매출이 서로 경쟁을 하는 ‘제로섬’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이를 입증하는 연구도 있다. 지난해 영국 런던대에서 낸 ‘음악 다운로드와 P2P 파일공유가 음악 구매에 미친 영향’ 보고서를 보면, 음악 파일을 내려받는 양이 많을수록 음악 판매량도 는다고 분석했다. 소비자들은 12곡을 내려받을 때마다 CD를 평균 0.44장 산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특허권 철폐하면 제3세계 질병 문제도 해결 가능
아직 ‘다운로드-오프라인 매출’의 관계에 대해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에는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런던대의 연구 결과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CD 시장은 이미 디지털 음반 시장의 위력 때문에 주변부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영국 ‘지적재산권정책전략위원회’가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무단 파일 다운로드가 음악 및 영상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확정적으로 말하기에는 누적된 자료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두 번째 ‘특허권 제도 철폐’ 제안은 언뜻 엉뚱하게 들린다. 무모한 제안으로도 들리지만 나름의 단단한 근거가 있다. 특히 제약·소프트웨어 등 일부 산업 영역에서는 설득력을 가진다. 다시 당의 원칙 선언문을 보자.
“특허는 흔히 새로운 발명품이나 생산기법을 내놓은 발명가들을 보호하면서 기술혁신을 장려한다고 한다. 사실은 작은 규모의 기업이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거대 기업이 가로막는 수법으로 점점 더 많이 이용되고 있다. …발명가들은 혁신적 디자인이나 소비자 혜택, 가격, 질과 같은 다른 자연스러운 장점을 이용해 경쟁해야 할 것이다. 국가가 부여하는 지식에 대한 독점권인 특허에 더 이상 기대서는 안 된다.”
해적당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제약산업이다. 해적당은 의약품 특허제도가 사라지면 제3세계의 병자들이 싼값에 약품을 사먹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본다. 대형 제약회사들의 특허 때문에 약품 가격이 높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해적당은 정부가 직접 의약품 개발에 나서라고 요구한다. 논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유럽에서는 전 국민 의료보장제도를 실시하기 때문에 국가가 제약회사의 수입을 대부분 대고 있다. 그런데 제약회사들의 지출 비율을 보면, 신약 개발에 쓰는 비용은 전체 수입의 15% 수준을 맴돌고 있다. 나머지 85%의 돈은 다른 곳에 쓰인다는 뜻이다. 해적당은 납세자의 돈을 고스란히 제약회사에 전해주지 말고, 국가가 직접 신약 개발에 나서고 그 결과는 공개해 제약회사들이 모두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제약회사에 건네는 액수의 20%만 신약 개발에 써도 연구·개발 투자액은 훨씬 더 늘어난다는 것이 해적당의 논리다. 또 특허 장벽이 낮아지면 공급이 늘어나 약값이 저렴해지는 장점도 함께 누리게 된다. 스웨덴 해적당은 누리집에서 “이런 방안을 통해 제3세계 질병 문제를 해결하고 제약 분야 연구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으며 의료 분야의 공공지출도 줄일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대형 제약회사들이 꺼리는 말라리아나 후천면역결핍증(AIDS) 같은 빈곤형 질병에 대한 약품 개발도 가속화할 수 있게 된다.
특허제도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제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미국 뉴욕에 자리잡은 비영리 기관인 공공특허재단(Public Patent Foundation) 같은 곳은 소프트웨어에 대한 특허권을 철폐하라고 줄곧 주장하고 있다. 또 브라질 정부는 1990년대부터 후천면역결핍증(AIDS) 약물에 대한 접근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제약회사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국내 제약회사를 통해 약물들을 무상 공급해왔다.
순풍에 돛을 단 것 같던 해적당도 암초를 만났다. 지난 9월 스웨덴 해적당은 총선에서 전체 투표인 가운데 0.7%의 지지만을 얻는 참패를 겪었다. 스웨덴 의회 진출에는 실패했다. 영국 은 한 저작권 전문가의 입을 빌려 “해적당은 한 차례 신문 제목을 장식하는 데는 훌륭했다. 그렇지만 잠시 대중의 이목을 끄는 정도의 구실을 했을 뿐이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안데르스도테르 유럽의회 의원은 과의 인터뷰에서 “스웨덴에서 한 정당이 자리를 잡는 데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도 해적당 받아들일 인프라는 충분
해적당 운동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국내에서는 해적당의 정체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자료가 없으니 평가도 없다. 유럽 쪽의 평가를 들어보자. 토비아스 올손 스웨덴 벡스예대학 교수(미디어학)는 2008년에 낸 논문에서 역사적으로 기술적 혁신이 정치 지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예를 들어 활자의 발견으로 성서가 다량 출판되면서 교회 권력이 약화한 예를 들었다. 인터넷의 발전은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해적당은 전통적인 정치와 민주주의의 의제들을 개혁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유권자와 정치인들을 대변한다. 개인은 새로운 기술의 잠재력에 맞춰 라이프스타일을 조정한다. 해적당은 새로운 사회의 동향에 적응하면서 의제와 가치를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총무성은 지난해 9월 주요 23개국의 정보통신 기술의 인프라 수준을 비교한 결과, 우리나라가 일본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스웨덴은 3등인 핀란드의 뒷자리에 섰다. 한국에서도 해적선이 떠다닐 ‘물길’은 이미 충분히 뚫렸다는 뜻이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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