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전북지사에 근무하는 원병희(48)씨는 2008년 한 통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노조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 후보가 지사를 방문했을 시 ××× 부서에 보고하고, 추천을 부탁하면 응하지 말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노조에서 일하던 원씨는 선거에 부당개입을 한 해당 간부를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했다. 그 간부는 벌금 20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원씨는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인 2009년 2월 회사에 공동책임을 물으며 이 일에 대한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1인시위를 했다.
5개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KT 쪽에서 원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1인시위로 인한 업무방해, 손팻말의 내용으로 인한 명예훼손이 주된 이유였다. 원씨는 관할 전북 덕진경찰서에 수차례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검찰 조사까지 5개월,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이 내려졌다.
공개는 못하고 삭제는 해주겠다?이 일이 잊혀질 즈음 원씨는 노조 활동을 통해 평소 알고 지내던 천주교 인권위원회 활동가에게서 자신의 경찰조사 기록이 그대로 경찰서 정보망 안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건이 종결된 지 10개월이 지난 2010년 5월이었다. 수사기록이 남아 있다는 정보망은 경찰이 운용하는 범죄정보관리시스템(CIMS·심스)이었다. 심스는 2004년부터 전국 경찰서에서 운용 중인 정보망으로, 경찰은 각종 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작성하는 모든 문서를 디지털화된 형태로 저장하고 있다(지난 5월부터는 검찰·법원·법무부의 정보망을 아우르는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킥스)으로 통합돼 운용되고 있다). 경찰은 “현재 심스 기능은 중지된 상태로 킥스망을 이용한다. 다만 서버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밝혔다.
원씨는 무죄를 입증받은 자신의 기록이 왜 경찰서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소름이 돋더라고요. 죄가 없어 불기소된 것인데 여전히 죄인처럼 취급받는 것 같아서요. 그나마 제가 인권단체와 인연이 있으니까 알았지 일반 개인들은 그런 일이 있어도 모르는 것 아닌가요?”
원씨는 수사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직후 경찰서에 과거 자신의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경찰은 “공개할 수 없다”고 답했다. 원씨는 자신에게 조언해준 한 천주교 인권위에 이 문제를 맡겼다.
“제가 공개를 요구했을 때와는 달리 천주교 인원위 쪽에서 항의하니까 공개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천주교 인권위를 통해 원씨가 건네받은 자료는 심스에 저장된 피의자신문조서의 1면만을 캡처한 화면이었다. “더 있지 않느냐고 항의했더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보름 정도가 지난 뒤 경찰은 추가로 심스에 저장된 화면 중 일부를 캡처해 공개했다. 이번에는 공개된 내용을 바탕으로 원씨가 자신의 기록을 삭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원씨는 천주교 인권위에 위임해 ‘심스 혹은 킥스에 남아 있는 정보’의 삭제를 청구했다. ‘본인의 처리 정보를 열람한 정보 주체는 보유기관의 장에게 문서로 당해 처리 정보의 정정 또는 삭제를 요청할 수 있다’는 개인정보보호법 14조에 의거한 것이었다. 삭제를 요구한 지 20일이 지나 전주 덕진경찰서는 ‘민원서류 처리결과 통지’라는 제목으로 원씨의 삭제 청구를 받아들였다는 통지문을 발송했다.
하지만 원씨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저에게는 일언반구 없던 경찰이 시민단체가 나서니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개인이 국가를 상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했죠.” 불안도 여전하다. “백업이나 데이터베이스 이중화는 얼마든지 가능한 거 아닌가요? 심스라는 프로그램도 행정 편의상 법적 근거 없이 보유해왔잖아요.”
원씨는 당장이 문제다. 그는 자신이 최근 전주에서 남원으로 전보 조처된 것이 노조 활동을 이유로 한 부당노동행위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것을 항의하려고 보니 지난번 불기소처분을 받은 사례처럼 또 회사에서 어떤 구실을 잡아 경찰 조사를 받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경우 과거의 정보가 남아 경찰이 들여다볼 것을 생각하면 죄가 있었느냐 아니냐를 떠나 불안한 마음은 계속되는 거죠. 당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기분이에요. 정말 찜찜하죠.”
원씨는 천주교 인권위의 도움으로 국가배상 소송에 나섰다. 8월18일이다.
막무가내 연행, 법적 근거 없는 기록원씨와 함께 ‘빅브러더’에 반기를 든 또 한 사람은 이문열(31)씨다. 이씨는 지난 8월22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입학 시험을 치렀다. 올해 초까지 2년6개월 동안 일한 국제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를 떠나면서 택한 길이다. 그도 원씨와 유사한 일을 겪고나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5월 과거 무혐의로 종결된 사건도 경찰 정보망에 기록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천주교 인권위와 함께 자신의 수사기록을 확인해보기로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전에도 언론을 통해 심스에 대해 들어보기는 했지만 정작 내 문제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사법기관이 어느 정도 개인정보를 갖고 있을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죠. 그게 제 문제라고 생각하니 상황이 달라지더라고요. 왠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어요.”
이씨가 경찰 조사를 받은 것은 2008년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 당시 이씨는 앰네스티 업무의 일환으로 집회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8월15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 사거리에서 소명의 기회도 없이 끌려갔다. 경찰은 이씨의 항의에도 막무가내로 조사를 진행했고 이씨 사건을 검찰로 넘겼다. 사건을 건네받은 검찰은 앰네스티 업무가 맞는지 공식적인 확인을 요구했다. 이씨는 앰네스티 사무국(영국 런던)과 주고받은 전자우편까지 공개했다. 앰네스티의 한국 담당 조사관한테까지 확인한 뒤 검사는 이씨와 앰네스티 인턴 두 명을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처분했다.
이씨는 심스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인권단체 일원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기록이 어떤 식으로 법적 근거 없이 축적되고 기준 없이 관리되고 있는지를 실감하지는 못했다.
“이상하게 어느 정도 포기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보다 더한 인권침해도 많은 상황이니까요. 혹시 앞으로 변호사 일을 하거나 예상치 않게 공직을 맡게 되면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죠. 그래도 덤빌 마음이 들지 않더라고요.”
이씨가 빅브러더의 실체를 만난 건 실제 자신의 수사자료 공개를 요구하면서다. 이씨가 심스에 기록된 수사자료의 공개를 요구하자 경찰은 심스에 들어있는 이씨 관련 정보 건수와 사건 죄명 한 줄만을 공개했다. 화면 캡처라도 제공했던 원씨의 상황과 달랐다. 재차 자신의 수사기록을 요청했으나, 경찰은 더 이상 공개할 수 없다는 방침을 통보했다.
피해자·참고인 정보만 1924만건
이씨는 이번에는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해 삭제를 요청했다. 이씨는 원씨와 마찬가지로 삭제 청구를 받아들였다는 통지문을 받았다. “간단한 공개조차 안 했던 것을 삭제했다고 통보해오니 당황스럽더라고요. 삭제 자체를 신뢰할 수 없었고요.”
이씨는 원씨와 함께 소송에 나섰다. 문제는 원씨와 이씨처럼 당사자 요청에 의해 삭제 가능한 수사기록들이 지금 이 시점에도 끊임없이 축적되고 있다는 것이다. 심스와 킥스가 문제가 된 것은 지난 2009년 6월 의 보도를 통해서다(766호 표지이야기 ‘경찰은 지난여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참조). 당시 은 심스의 실체를 낱낱이 공개하며 이 시스템의 불법성을 폭로했다. 나아가 킥스가 올해부터 운용될 것임을 전망하면서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당시에 지적한 대로, 경찰관이 정보망에 입력하기 시작한 수사 관련 문서는 대부분 심스의 역할을 넘겨받은 킥스 시스템에 저장되고 있다. 이렇게 넘겨진 문서는 2004년 이후 2009년 6월치까지만 4417만 건에 달하고 사건 수만으로도 240만여 건에 이른다.
이 기록들은 피의자만이 아니라 피해자, 참고인 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피해자나 참고인의 정보가 1924만건으로 전체 저장된 건수의 4할을 넘는다. 이 가운데 피해자의 정보는 1812만건에 달한다. 이 방대한 정보들은 보존 기간 등 삭제 기준이 전혀 없는 상태로 영구 보존되는 실정이다.
심스의 문제는 보유하는 정보의 양만이 아니다. 피해자 신고서, 피해자 심리 체크 리스트 등 강력범죄 피해자의 개인 신상 정보를 담은 자료들이 수사 당시 날것 그대로 저장돼 있다. 피의자 가운데 소년범의 경우 소년신원조사표, 소년범 환경조사서 등 개인 기록들도 보관돼 있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활동가는 “소년범 자료나 피해자 정보는 그 민감성을 판단했을 때 곧바로 삭제돼야 한다. 특히 피해자 정보의 경우에는 자료 유출 등으로 인한 2차 피해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원씨와 이씨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개인정보보호법상 자신의 수사기록 등을 열람하고 삭제하는 절차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원씨는 심스의 캡처 화면을, 이씨는 사건 목록만을 통지받았다. 삭제 과정에서도 당사자가 삭제 결과 등을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심스는 킥스와 연계돼 운용 중이다. 킥스는 그 근거가 되는 형사사법 절차 전자화 촉진법이 제정됐지만, 어떤 정보를 어느 범위까지 입력해 관리할 것인지, 입력된 정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는 법에 명시돼 있지 않다. 게다가 심스는 여전히 근거 법률을 갖고 있지 않은 채 서버가 여전히 존재한다. 4417만 건의 개인정보를 먹은 괴물이 법적 근거 없이 살아 있는 것이다.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은 어디에원씨와 이씨의 국가배상 소송을 맡고 있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류제성 변호사는 “자료가 집적돼 있는 상태에 대한 법적 근거가 미비한 상태다. 킥스가 법률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위헌성이 농후하다”며 “두 사람의 소송을 통해 심스라 불리는 범죄정보관리시스템과 이와 연계된 형사사법정보시스템(킥스)이 개인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있는 불법성을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는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헌법상 독자적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있다(99헌마513, 2004헌마190). 헌재는 개인정보자기결정권에 대해 “자신에 관한 정보가 언제 누구에게 어느 범위까지 알려지고 또 이용되도록 할 것인지를 정보 주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즉 정보 주체가 개인정보의 공개와 이용에 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라고 밝히고 있다. 헌재가 선언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주소는 심스·킥스가 지배하는 사회의 어디쯤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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