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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말씀하시길, 기도는 골방에서나 하라?



삼성 비자금 폭로 도운 전종훈 신부 또 안식년 발령…

한국 천주교는 신부들의 비판의식 박멸하려는 건가
등록 2010-08-27 16:17 수정 2020-05-03 04:26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지난 8월5일 정기 ‘사제인사발령’을 냈다. 이에 따라 76명의 사제가 새 성당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2008년부터 안식년을 지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는 올해도 인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가톨릭 사제는 서품을 받은 뒤 10년마다 안식년 휴가가 있지만, 전 신부는 이미 2001년 안식년을 지내 2008년 당시에도 안식년 발령은 관례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더욱이 3년 연속 안식년을 받은 것은 한국 천주교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천주교 내부에서는 전 신부가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사건 폭로를 주선한 데 대한 ‘징계성 인사’라는 해석이 나온다.
 
4대강 저지 신부들에게 물 끼얹는 명동성당

2008년 촛불 정국에서 사제들의 서울시청 앞 단식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전종훈 신부.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08년 촛불 정국에서 사제들의 서울시청 앞 단식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전종훈 신부. 한겨레 박종식 기자

사제 인사는 교구장의 고유 권한으로, 전 신부의 안식년은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의 뜻이다. 실제 2008년 안식년 발령이 나기에 앞서 전 신부와 면담한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는 “(추기경께서) 삼성 문제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했냐”고 꾸짖은 바 있다. 하지만 천주교 내부에서는 전 신부의 인사를 사제 개인에 대한 징계가 아닌, 사제단에 대한 보복 조처로 해석하고 있다. 천주교 관계자는 “사제단 대표의 손발을 묶어놓고 사제단을 무력화하려는 것”이라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부들의 사회참여 의지를 박멸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사제단은 한국 민주화운동에 굵직한 기여를 해오면서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아왔지만, 일부 주교들은 이런 활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해왔다. 정진석 추기경은 사제단의 활동에 편견을 가진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실제 2008년 정 추기경은 1970∼80년대 사제단 활동을 했던 ‘1세대 사제’인 김택암 신부 등 원로 신부 4명을 만난 자리에서 사제단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정 추기경은 ‘30년 이상의 사제단 역사는 그런대로 괜찮다는 평을 받는다. 사제단에 대한 교구장의 염려와 걱정을 듣고 싶다’는 신부들의 질문에 “평가는 세월이 더 지나가야 한다. 아직은 좀 이르다”고 말했다. 이어 정 추기경은 “내가 직접 듣지는 않지만, (사제단 일로) 사무실에 (항의) 전화가 빗발치게 온다”고 덧붙였다. 정 추기경은 또 전종훈 신부에게도 “사제단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면 본당을 주겠다”는 말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추기경의 이런 생각은 최근 명동성당이 보이는 태도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지난 5월 사제단이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해 ‘전국사제단식기도회’를 진행하는 도중 명동성당 사목회 임원들은 “이곳은 우리 땅이니 나가라”고 신부들을 향해 소리쳤고, 새벽에는 잠자는 신부들을 향해 물을 끼얹기도 했다. 사제들의 항의에 명동성당 주임신부는 “그러니까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고 했잖아. 마태오복음 6장 6절!”이라고 말했고, 신자들을 상대로 한 미사에서는 “기도는 성전에서 하는 것이다. 저기 밖에 있는 사람들은 무얼 하는지 모르겠다”고 꾸짖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천주교 내부에서는 정 추기경으로 인해 명동성당의 정신적 자산이 탕진됐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온다. 사제단 총무 김인국 신부는 “명동성당은 온 세상이 경외하는 성지가 됐다. 김수환 추기경부터 여러 명동본당 신부들의 인내가 없었다면 명동성당은 흔한 고딕식 성당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명동성당의 자세가 앞서간 선배들의 공로를 위태롭게 할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믿음을 버리고 법의 노예가 되려는 건가”

사제단 1세대로 대표를 지낸 함세웅 신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함 신부는 지난 8월17일 와의 인터뷰에서 정 추기경의 사목관에 대해 “법에만 집중하면 법의 노예가 되기 때문에 믿음이 법을 넘어서야 한다. 교구 행정에 제도적·관료적·금권지향적으로 접근하기보다 믿음을 중심으로 인간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황춘화 기자 한겨레 24시팀 sflow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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