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면죄부 들고 돌아온 삼성의 1.5인자


이건희 회장의 아바타 같은 존재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 사면…
경영 일선 복귀·전략기획실 복원은 시간문제
등록 2010-08-20 13:54 수정 2020-05-03 04:26

“‘왕의 남자’가 돌아왔다.”
지난 8월13일 단행된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의 특별사면을 가리켜 재계에서 하는 말이다. 이 고문은 삼성에서 ‘황제경영’을 하는 이건희 회장의 최측근으로 불린다. 1996년 그룹 비서실장을 맡은 뒤 명칭은 구조조정본부장·전략기획실장으로 바뀌었지만 지난 15년간 줄곧 이 회장을 대신해 삼성 경영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이 고문은 김용철 전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의 양심선언으로 촉발된 비자금 사건으로 인해, 2008년 4월 이 회장과 함께 경영 퇴진을 선언했다. 당시 전략기획실도 함께 해체 선언을 했다. 이 고문은 지난해 8월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사실 경영에서 손을 뗐던 적이 없어

삼성 안에 ‘이학수 사단’을 구축했단 평을 듣는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이 2008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삼성 안에 ‘이학수 사단’을 구축했단 평을 듣는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이 2008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이학수 고문이 함께 사면·복권된 김인주 전 삼성전략기획실 사장, 최광해 전 삼성전자 부사장 등과 함께 경영 일선에 동반 복귀할지 여부가 관심거리다. 그가 복귀하면 전략기획실 부활도 시간문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고문은 그룹 경영총괄 역할을 중단한 적도 없고, 전략기획실이 해체된 적도 없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전략기획실은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이학수 고문을 비롯해 과거 전략기획실 핵심 멤버들이 여전히 이 회장의 참모 역할을 하며 그룹 의사결정에 관여해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이 고문은 이 회장의 사면 이후 주요 공식 활동에 빠짐없이 얼굴을 내비쳤다. 지난 1월 이 회장의 첫 대외 행사였던 미국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지난 6월 호암상 시상식에서 모두 그림자 수행을 했다. 7월15일 이 회장 자택인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서 연 전경련 회장단 초청만찬 때에는 아예 대변인 역할까지 맡았다. 스스로 경영 퇴진을 선언했고 사면도 안 된 신분임에도 그가 보여준 과감한 행보는 최고 실세로서 건재함을 그룹 안팎에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해석이 많다.

이 모든 것이 이건희 회장의 두터운 신임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회장은 1990년대 초 그룹 내 권력이 집중되는 비서실장은 3년 정도면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고문은 무려 그 다섯 배인 15년을 재임했다. 이건희 회장이 사면 이전부터 이학수 고문에게 “나하고 끝까지 같이 가자”고 말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는 이 고문의 강한 충성심을 꼽을 수 있다. 이 고문은 이제까지 두 번 법정에 섰다. ‘별’이 두 개인 셈이다. 이번 사건에 앞서 지난 2004년 17대 대선에서 정치권에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뒤 이듬해 사면됐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는 재벌 총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고문은 두 번씩이나 이 회장 때문에 십자가를 진 셈이다.

두 번째는 공헌이다. 그가 그룹 경영의 사령탑을 맡은 이후 삼성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그 중심에는 ‘이 회장의 리더십-그룹의 사령탑인 전략기획실-실무경영을 책임지는 계열사 사장단’으로 이어지는 삼성 특유의 삼각편대가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 고문은 또 이 회장 일가의 재산을 관리하고, 3세들을 위한 ’세금 없는 경영권 승계 작업’도 훌륭히(?) 수행했다.

 

오너와 유사한 반열에 오르나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벌 총수의 측근들에게 충성과 공헌은 어쩌면 당연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이학수 고문의 장수 비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이건희 회장의 독특한 경영 스타일이다. 대다수 재벌 총수들은 직접 경영을 주도한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일상 경영활동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룹에 출근하는 일이 1년에 단 하루도 없을 때가 많다. 대신 자택과 집무실을 겸하는 승지원에서 생활한다. 외신들은 이런 그를 가리켜 ‘은둔의 제왕’이라고 부를 정도다. 이 회장으로서는 자신의 뜻을 전하고 그룹 전체를 관리하는, 믿을 수 있는 대리인이 절실하다. 이 고문은 이 회장의 분신(아바타)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재벌 총수는 수많은 대리인을 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하늘 아래 두 태양이 없듯이, 2인자의 장기 집권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이학수 고문처럼 최고 실세로 불리며 15년간 장수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비결은 이 고문이 그룹 경영의 사령탑과 함께 맡아온 ‘회장의 금고지기’ 역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71년 삼성에 입사한 이 고문은 1982년부터 그룹 회장실 재무팀에서 근무했다. 그의 주 업무는 회장의 재산 관리다. 회장의 금고지기를 하다 보면 말 못할 비밀도 자연히 많이 알게 된다. 게다가 그는 경영권 승계 작업까지 주도했다. 삼성의 한 임원은 “비밀은 권력자에게는 약점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 “이 고문은 그룹 안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경쟁 후보자들을 미리 제거하고, 이 회장의 분신 차원을 넘어 자신만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고 말한다.

삼성의 주요 보직을 맡은 사람 중에서 이학수 고문의 신세를 안 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이도 많다. 삼성 경영진은 모두 ‘이학수 사단’이라는 얘기다. 삼성 안에서는 이 고문을 거치지 않고는 이 회장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알려진다. 이 고문은 그룹 외부로도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후배이기도 하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이학수 고문은 삼성의 2인자가 아니라 ‘1.5인자’라고 해야 한다. 이 고문이 다시 경영에 복귀한다면 사실상 오너와 유사한 반열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고문이 경영 복귀를 하더라도 전략기획실을 당장 복원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삼성 관계자는 8월13일 “마치 사면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조직 개편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말 정기 인사에나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동안 삼성 안에서는 이 회장의 복귀 이후 전략기획실 조직 개편안이 여러 차례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도 공식적으로 지난 3월 이 회장의 복귀 직후 “사장단협의회 산하의 업무지원실과 법무실, 커뮤니케이션팀을 업무지원실, 윤리경영실, 브랜드관리실 등으로 확대 개편해 이 회장을 보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청와대 위의 승지원?

삼성이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배경에는 지난해 말 이건희 회장의 단독 사면 이후 8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또다시 사면을 받은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한다. 또 2008년 이 회장이 퇴진하면서 이 고문의 동반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를 약속한 것도 부담이다. 삼성 관계자는 “전략기획실을 공식 복원하더라도 이름을 그대로 가져가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간판을 아무리 바꾸어도 똑같은 얼굴과 기능을 가진 그룹 사령탑의 재건은 삼성의 지배구조가 비자금 사건 이전 체제로 복귀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개혁연대는 “삼성 지배구조는 특검 사건 이전으로 완벽하게 회귀하는 것으로, 지배구조 개선 기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힘있는 기업인들에게만 특혜를 준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다. 집권 후반기 주요 국정 방향으로 친서민과 소통, 국민 통합 등을 강조하는 것과 모순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은 “법질서가 갈수록 강조되는 시대인데, 법질서와 원칙을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할 대통령이 사법부의 판단을 무효화하는 사면 조처를 남발하는 것처럼 비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재계에서는 삼성의 영향력이 비자금 사건 이후 더 커졌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사실상 청와대 위에 승지원이 있다는 것이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