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사에서 나만 제정신일까?’
직장생활을하다 보면 문득 의문이 드는 순간이 있다. 너도나도 ‘개념 탑재’한 상식 있는 인물들이 모였는데,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특히 많은 직장인이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상사라고 이유 없이 다 미워하진 않는다. 툭하면 야근과 휴일근로를 강요하는 상사, 막말은 기본이고 끈적이는 성희롱성 발언을 쏟아내는 상사는 모든 직장인의 ‘공공의 적’이다. 이런 상사에겐 육두문자를 사자후로 날린 뒤 사표를 쓰고 나와야 시원하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취업난 시대, 에어컨도 없는 집에서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호연지기를 기를 게 아니라면 입 꾹 다물고 일하기 마련이다. 결국 대부분의 직장인이 비참해도 참고, 치사해도 참고, 더러워도 참는다.
상사의 커피에 침을 뱉어라하지만 ‘참을 인’자 새기다 부처님 될 생각이 없는 이들은 과감히 복수를 다짐한다. 이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함께 지난 7월29일~8월2일 직장인 53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직장 상사가 괴롭힐 때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겉으론 복종, 속으론 복수를 계획한다’(29.2%)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직을 준비한다(28.4%) △직장 상사면 다냐며 무시한다(26.2%) △취업난 시대,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한다(6.6%) △동료들과 함께 직장 상사 왕따 전략으로 맞선다(6.4%)는 응답이 그 뒤를 이었다. 복수하고 싶은 열망은 이직하고 싶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복수를 실행할 수는 없다. ‘합법적으로 티 안 나게 복수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직장인이 많은 이유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직장 상사 ‘골탕 먹이기’ ‘괴롭히기’ ‘길들이기’로 검색하면 툭툭 쏟아진다.
간단하게는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다. 주먹으로 치면 직장 상사가 코피를 쏟는 ‘직장 상사 때려잡기’ 게임, 9가지 종류의 총을 골라 대상을 쏴 죽이는 효과를 내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도 있다. ‘커피에 침 뱉기’ ‘상사 의자나 책상에 껌 붙여두기’ ‘화장실에 상사 욕 써놓기’ 등은 고전적이고 식상해진 복수 방법이다.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만화 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소심한 복수’의 전형이다. 주인공 무 대리는 상사 마 부장에게 혼나지 않는 날이 없다. 마 부장에게 이를 가는 무 대리의 복수법은 단순하다. 단골 식당의 개 이름을 부장 이름으로 부르고, ‘상상임신’하듯 ‘상상폭력’으로 부장에게 주먹을 날린다. 부장에게 “날 미워하지 마라, 사랑해라”며 최면술을 걸다 실패하기도 한다. 소 뒷걸음질 하다 쥐 잡는다고, 본의 아닌 복수도 한다. 마 부장 차를 몰고 거래처에 다녀오면서 경유차에 휘발유를 넣어 부장 속을 긁는다.
꽃등심으로 상사 파산 시키기
하지만 ‘직장생활의 달인’이라고 불러도 될 강호의 실력자들이 직장 상사를 골탕 먹이는 방법은 수준급이다. 영업직 사원 김겸(33)씨가 쓰는 복수 방법은 ‘상사 지갑 가볍게 만들기’다. 꽃등심이나 생선회처럼 비싼 안주가 나오는 식당에서 회식을 하며 금전적으로 상사를 파산시키는 전략이다. 1차에서 계산을 끝낸 상사가 직원들을 배려하듯 떠나가면 2차부터 그들만의 진짜 회식이다. 상사 유형에 따라 대처 방식도 다르다. 권위적인 상사에겐 돈을 쓰게 했다면, 일 안 하고 노는 상사에겐 보고서를 자주 만들어서 검토해달라고 압박한다. “상사에 따라서 맞춤형 복수 방법을 찾는”게 스트레스 덜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는 노하우다.
회사원 오영주(36·가명) 차장은 ‘데스노트’를 쓴다. 데스노트는 한국방송의 ‘블랙리스트’처럼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문건이다. 회사에서도 오 차장의 데스노트를 알고 있다. 농담 삼아 동료들이 “말조심해라. 오 차장 데스노트에 오를라” 한다. 데스노트는 2005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그의 바로 위 상사는 툭하면 외근한다며 나가 회사에 들어오지 않는 ‘노는 인간’이었다. 처음엔 사장이 상사를 찾으면 “외근 중”이라고 감싸주다 나중엔 “회사 안 나오셨다”며 사실대로 얘기했다. 일 안 하는 상사가 보기 싫어 데스노트에 적듯 ‘회사에서 잘려라’ 바랐더니 신기하게도 상사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다음에 온 상사는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상사였다. 뭘 해도 “안 될 텐데, 해보려면 해봐”라고 말하며 직원들의 사기를 꺾었다. 오 차장의 데스노트에 올려진 그도 회사를 오래 다니지 못했다. 데스노트는 진짜 데스노트처럼 신통방통했다. “보통은 동료들과 메신저나 문자메시지로 상사 뒷담화를 하거나 상사를 빼놓고 밥 먹으러 가는 식으로 복수한다”는 오 차장은 “관계 개선이 어려울 땐 후배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공동의 목소리인 양 상사에게 항의한다”고 말했다.
상사의 ‘윗선’을 공략해 상사를 투명인간처럼 만드는 복수도 있다. 직장인 유민선(30·가명)씨는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상사 때문에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았다. 동료들이 그의 업무 능력을 높이 평가해도 상사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유씨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윗선과 친해지면서 상사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사는 윗선에서 예쁨 받는 유씨를 부담스러워했다. 존재감을 잃은 듯 그 앞에서 쩔쩔맸다. “영어를 못하는 상사에게 영어로 된 보고서를 보여주고 검토해달라고 해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다”는 유씨는 능력으로 복수하는 정공법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전사 메일을 통해 비밀을 폭로하라
퇴사 뒤 전사 메일을 통해 상사의 비밀 폭로하기는 ‘흠좀무’(흠, 좀 무섭군요)다. 직장인 김종현(35·가명)씨는 전 직장에서 있은 사건을 소개했다. 어느 날, 추적이 불가능한 해외발 전자우편 한 통이 전사에 퍼졌다. 내용인즉슨, 사장과 비서가 연인 관계라는 것이다. “돈도 많으면서 회사 근처 모텔은 그만 가시죠”라는 조롱 섞인 전자우편 때문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비서는 다음날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장과 마찰을 빚고 퇴사한 한 인물이 전자우편을 보낸 범인으로 지목됐으나, 증거는 없었다. 사건은 몇 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흔한 복수 방법 중 하나는 바쁠 때 휴가 가거나 갑자기 퇴사하기다. 회사 총무부에서 일하던 김진숙(31)씨는 “미스 김”이라고 부르며 막말하는 상사 때문에 괴로웠다. 쪼잔한 구두쇠 사장은, 다른 회사에서는 흔히 쓰는 컴퓨터 프로그램 없이 손으로 장부를 쓰게 했다. 컴퓨터 작업을 하면 쉽게 끝날 일을 일일이 손으로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야근과 휴일근로를 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입사 3개월밖에 안 된 김씨는 참고 참다 결국 폭발했다. 사장에게 “회계 프로그램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퇴사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사장은 100만여원을 들여 프로그램을 사줬고, 그만큼 생색을 더 냈다. 김씨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갑자기 퇴사해버렸다. 프로그램은 주문만 하고 써보지도 못했다. “프로그램 사줬더니 나간다며 막말할 것 같아 후임자 고를 시간도 없이 나왔다”는 그는 “구두쇠 사장이 돈 쓴 게 아까워 속이 쓰렸을 것”이라며 통쾌해했다.
‘너 죽고 나 죽자’식 복수 방법도 있다. 김소민(35)씨는 “상사의 지시가 있어도 아예 일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일을 못해버린다”고 했다. 결국 일을 망쳐서 혼나겠지만 그 일을 다시 해야 하는 건 상사이기 때문에 상사가 더 괴롭다는 것이다. “몸을 사리면 상사를 괴롭힐 수 없다”는 그는 “상사의 고통을 위해 내 고통은 참아야 한다”고 했다.
다큐드라마 에선 옹졸하고 엽기적인 복수 방법이 등장한다. 바퀴벌레 우려낸 녹차와 침 섞은 잼 바른 토스트 주기, 직장 상사 칫솔로 변기 청소하기, 커피는 스푼 대신 구두굽으로 젓기, 식당에서 상사 신발에 초고추장 뿌리기 따위다.
현실은… 소심하게 무시하기
과감하게 복수혈전을 치르는 대인배들과 달리 현실의 무 대리들이 상사를 괴롭히는 건 ‘한 방’이 아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어퍼컷 대신 잽을 여러 번 날려 타격을 준다. 아이디 ‘난 나야’가 날리는 잽은 귀엽다. △컴퓨터 키보드에 커피 붓기 △상사의 꽃이나 화분 말려 죽이기 △책상이나 컴퓨터에 붙어 있는 중요한 포스트잇 몇 개 떼어내기 △상사 자리로 여러 번 전화해 말없이 끊기 따위다. ‘트리플 A형’이라 더 소심하다는 아이디 ‘성식영’씨는 흐트러진 건 못 보는 상사를 위해 “유선전화기 선 꼬아놓기, 과자 주는 척하면서 컴퓨터 키보드에 과자 부스러기 흘리기를 해봤다”고 했다. 실수한 것처럼 보이는 부하 직원의 호의에 화낼 수도 없고, 누가 했는지도 모르게 은근히 짜증나는 일을 자주 만들어주는 게 ‘소심 복수’의 비결이다.
문화콘텐츠 기획회사인 ‘P당’이 제안한 복수 방법도 해볼 만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방긋방긋 웃으면서 상사 앞에선 무표정으로 일관하기 △괜히 이상한 냄새 난다며 말은 안 하고 흘끔흘끔 쳐다보기 △상사에게 이미 퇴근한 윗상사가 일 확인하러 온다고 했다며 거짓말해 퇴근 못하게 하기 △상사 컴퓨터에 악성코드 설치하기(단점은 내가 깔아놓고 내가 지워주느라 애먹을 수 있음) 등이다. P당의 황지희 팀장은 “현실에서 직장 상사를 괴롭히는 방법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며 “대개는 무시 전략을 가장 선호하는 것 같다”고 했다.
실제 인크루트 설문조사에서 직장 상사에게 해본 복수 방법을 묻자 이와 비슷한 답변이 나왔다. ‘있는 듯 없는 듯 대하며 무시한다’(43.7%)가 가장 많았다. △어떤 지시인지 알면서 못 알아듣는 척했다(26.7%). △업무상 중요한 순간에 휴가를 가거나 퇴사했다(14.1%) △회사에 상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렸다(7.0%) △인사 평가에서 안 좋은 점수를 줬다(4.5%) 등이 그 뒤를 따랐다. 주관식 답변에서 ‘커피에 침 뱉기’ ‘상사 차 긁어놓기’ 같은 엽기적인 답변들은 찾기 어려웠다. 상상과 현실은 다르듯 직장인들 대부분은 꿈꾸던 복수 방법과 달리 직장 상사를 무시하거나 모르는 척하며 스트레스를 견디고 있었다.
훌륭한 상사는 많지만, 완벽한 상사는 없다
세상 모든 상사가 나쁜 건 아니다. 훌륭한 상사도 많다. 대신 완벽한 상사는 절대적으로 없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직장인이 복수하고 싶어하는 상사의 유형을 함께 물었다. ‘독재자처럼 지시사항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할 때’(30.3%)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무시하는 행동이나 말을 할 때(28.4%) △성과를 자신의 공인 양 떠들 때(16.9%)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할 때(14.1%) △윗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나한테 풀 때(8.3%) 등이 나왔다. 고현숙 한국리더십센터 대표는 “상사와의 마찰이 빈번한 건 많은 직장인이 이상에 못 미치는 상사들과 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적인 완벽한 상사를 만나는 건 쉽지 않다는 현실을 인정했다면, 세상의 모든 나쁜 상사와 잘 지낼 수 있는 법을 찾는 게 길이다. 나쁜 상사와 맞서 이기는 법은 뭘까? 최경춘 엑스퍼트컨설팅 본부장은 감정에 치우쳐 상대방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지 말라고 한다. 내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상사가 내 패를 다 읽어버리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나를 낮추는 ‘불쌍 모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상사의 결정을 뒤에서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밀착 관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착한 척하느라 솔직하지 못하면 결국 자신을 더 힘들게 할 뿐이니 때론 당당하게 대응할 필요도 있다. 고현숙 대표는 “상사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면 관계를 풀기가 더 어렵다”며 “문제를 확대 생산하는 패턴에 빠져 상사는 가해자, 나는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직장인들이 상사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인정 욕구’ 때문이다.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면 미워할 수밖에 없다. 복수가 두려운 상사라면 직원들을 살뜰히 살피는 상사가 되어야 한다. 부하 직원 처지에서도 상사와 잘 지내고 싶다면 상사가 요구하기에 앞서 내 일을 차질 없이 해내는 게 뻔하지만 가장 빠른 해결책이다. 고 대표는 “세상에서 가장 통쾌한 복수의 순간은 자신이 성공해서 그 상사를 내려다볼 때일 것”이라며 “우선 상사와 잘 지낼 수 있는 긍정적이고 건강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직장인들이 술자리에서 하는 농담은 가까워질 수 없는 상사와 직원 간의 엄연한 현실적 거리를 말해준다. “사원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이 나고, 대리급 정도 되면 술도 잘하고 말을 잘해야 빛이 나고, 과장급 정도 되면 계산을 해야 빛이 나고, 팀장급 정도 되면 계산을 하고 일찍 가야 빛이 나고, 부장급 정도 되면 뭘 어떻게 해도 빛이 안 난다.” 직장인의 76.8%는 상사와의 불화로 사표 낼 생각을 했다(2009년 11월 인크루트 설문조사). 이런 악순환은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일단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직장 상사를 생각하며 노래 한 소절 시원하게 부르고 고민을 시작해보자.
“멱살도 못 잡고(한 번) 밀쳐주지도 못하고(어깨로 확) 욕도 못해주고(미처) 비웃어주지도 못하고(하하하)… 변상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멱살 한번만 잡히십시다.”(장기하와 얼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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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참고 문헌 (린 테일러·펼침), (정찬용·책빛), (질워커·비즈니스맵), (마릴린 하이트·북폴리오), (최경춘·위즈덤 하우스), (마티아스 뇔케 지음·서돌), (주잔네 라인커·청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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