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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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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는 친기업 깜빡이 켜고 친서민으로 좌회전?



지방선거 패배 이후 ‘친서민’에 올인하는 이명박 정부…
재계는 “공약 위반” 불만 팽배, 학계선 “MB 노믹스 파산” 지적
등록 2010-08-06 16:34 수정 2020-05-03 04:26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는 거침없다. 7월22일 서울 화곡동 까치산 시장 안에 있는 포스코 미소금융지점을 방문한 뒤 시장에 들른 대통령. 한겨레 김봉규 기자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는 거침없다. 7월22일 서울 화곡동 까치산 시장 안에 있는 포스코 미소금융지점을 방문한 뒤 시장에 들른 대통령. 한겨레 김봉규 기자

“‘대기업 프렌들리’라는 비판이 두려워 정책을 소극적으로 하면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2008년 3월28일 공정위 업무보고)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시장 프렌들리’고, 이는 ‘서민 프렌들리’와 일치한다.”(2009년 9월30일 주요 20개국(G20) 회의 유치 특별기자회견)

처음엔 이렇게 말했던 그가, 요즘은 다음과 같이 변했다.

“일자리 창출, 중소기업과의 상생, 미소금융 등 서민정책에 대해 대기업들이 좀더 적극적 관심을 갖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2010년 7월27일 국무회의에서) “대기업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 하라는 것이다.”(2010년 7월23일 일부 캐피털사 대출이자 관련 보고를 받고)

대통령의 변신엔 이유가 있다

변신의 주인공은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친대기업’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는 놀랍기까지 하다. 최근 대통령이 참석한 공식 회의와 행사에서 서민 관련 이슈가 빠진 적이 없다. 청와대는 2009년 4·29 재보선 패배를 계기로 친서민 중도실용을 경제 운영의 기본 방향으로 제시한 뒤 보금자리주택 보급, 미소금융 출범, 취업 후 학자금상환제 시행 등 서민용 대책을 잇따라 내놓더니, 지난 6·2 지방선거 패배 이후에는 ‘올인 모드’로 돌입했다. 지난 7월28일에는 저소득층에게 향후 5년간 10조원을 최고 13%의 금리로 빌려주는 ‘햇살론’을 선보였다.

대기업을 양극화 주범으로 압박하는 대열에 청와대와 정부가 앞장서는 모양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3월 향후 8년간 300만 개 일자리 창출을 선언했으니, 올해 40만 개는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전경련이 지난 1월 30대 그룹들이 올해 87조원을 투자하고 7만9천 명을 신규 채용할 것이라고 발표한 것도 부풀린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은 지난 7월28일 경기도 시화공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납품 중소 협력업체들은 원자재 가격이 인상되고 있는데도 납품 단가 인상은커녕 인하 요구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 정권의 실세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도 한 조찬강연회에서 “올해 2분기 삼성전자가 5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이익을 냈는데 가슴이 아팠다”고 거들었다.

이 대통령의 친서민 선회 배경에는 집권 후반기 정치적 위기감이 깔려 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경제성장률이 올 상반기 7.6%로 지난 10년간 최고치를 기록하고 일부 대기업의 영업실적은 사상 최고치를 연방 경신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서민과 중소기업의 체감경기는 경제위기 이전 수준조차 회복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많다. 여권 핵심부에서는 이런 양극화 심화로 인한 서민층의 민심 이반을 지방선거의 패배 원인으로 꼽는다. 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면 향후 총선과 대선에서도 승산이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친서민 기조를 높이 세운 뒤 치른 7·28 재보선에서 여당이 승리하면서 친서민 카드의 효용성은 더욱 부각될 전망이다.

대기업들은 초긴장 상태다. 청와대와 정부의 직격탄을 맞지 않으려고 모두들 부산하다. 삼성전자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을 담당하는 상생협력실 업무와 700여 협력업체와의 거래 실태에 관한 특별감사에 착수했다. 이와 별도로 상생 아이디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다. 현대차는 1·2차 협력업체와 상생협력 세미나를 연 데 이어 ‘자동차산업 상생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기로 했다. LG는 고용·투자 계획의 이행 실적을 중간 점검해 결과를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포스코는 1차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진행해온 상생협력 프로그램을 2~4차 협력업체로 확대하기로 했다. 전경련도 8월 중에 고용·투자 계획의 이행 실적에 대한 중간 점검을 하기로 하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는 모습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대기업 관련 발언 일지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대기업 관련 발언 일지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대기업 희생양 삼기’ 가능성

하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폭발 직전이다. 모두들 이명박 대통령이 변심했다고 흥분한다. 친기업을 내건 대통령이 공약을 위반했다는 쓴소리도 나온다. 전경련 조석래 회장이 지난 7월28일 제주도 하계포럼 개회사(대독)에서 “나라가 잘되려면 정부와 정치권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며 이례적으로 비판한 것은 최근 청와대와 정부의 압박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재계는 대통령이 친서민을 내걸고 직접 대기업을 비판하는 것이 국민의 반기업 정서를 더욱 자극할 것으로 우려한다. 보수 언론에서도 경제 논리를 무시한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이 가장 빨리 회복한 것은 대기업이 수출시장에서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라며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번 것이 과연 죄냐”고 되묻는다. 일부에서는 이럴 줄 알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은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중도실용은 원칙이나 이념이 아니고 일종의 수단에 불과해, 처음부터 철학이 없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이명박 정부를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하는 차’에 비유한다.

이명박 정부와 재계 간의 냉기류는 당분간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월29일 전경련의 불만 표출에 대해 “전경련이 대기업의 이익만 옹호하려는 자세를 가져선 곤란하고 사회적 책임도 함께 염두에 둬야 한다”고 경고했다. 검찰 주변에서는 대기업 기획수사설까지 흘러나와 대기업들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전경련의 한 임원도 “처음에 친기업을 표방하고 나온 것부터 부담스러웠다”며 현 정부와 아예 거리를 두는 모습이다. 재계에서는 정부의 압박 효과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은 “양극화 문제는 정부가 대기업을 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면서 “대기업이 겉으로는 무서워하는 시늉을 하겠지만, 팔 비틀어 억지로 하는 일이 과연 효과가 있겠느냐”고 꼬집는다.

하지만 재계와 정부가 별거에서 이혼으로 치달을지는 미지수다. 기업들의 속성상 권력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모험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명박 정부의 ‘대기업 때리기’도 역대 정권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심을 달래기 위한 일시적인 ‘대기업 희생양 삼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대통령도 “정부가 (대·중소기업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오히려 중소기업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자율적인 상생 노력을 강조하며 퇴로를 열어놨다.

‘트리클다운’ 논리 무너져

청와대 관계자는 “이 대통령의 친서민·중소기업 강조가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고, 취임 초기 이후 ‘MB 노믹스’의 일관된 가치였다”고 말한다. 대통령은 대기업이 잘되면 그 과실이 자연스럽게 서민과 중소기업에 흘러갈 것을 기대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친서민 기조는 애초 친기업을 내건 MB 노믹스의 파산선고고, 이같은 실패는 예정된 결과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MB 노믹스는 경제를 살리려면 대기업의 투자 활성화가 중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 대기업 규제 완화와 감세를 강력히 추진했다. 대기업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기 위한 장치인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고, 대기업의 금융지배를 막기 위한 금산분리 정책을 완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법인세 등 기업 관련 세금을 깎아주고, 대기업 관련 조사를 완화했으며, 기업인들에 대해 대규모 사면·복권 조처를 단행했다. 이같은 MB 노믹스의 바탕에는 대기업이 잘되면 자연스럽게 그 과실이 나머지 국민에게 돌아온다는 ‘트리클다운’(Trickle Down·적하정책) 논리가 깔려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양극화 심화로 귀결됐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는 “대기업의 고용 없는 성장이 보여주듯 트리클다운 효과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 출범 때부터 제기된 사안”이라면서 “MB 노믹스의 실패는 예정됐던 일”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8월 말까지 대·중소기업 간 상생협력 방안을 내놓을 계획이다. 공정위는 납품 단가 조정협의 의무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조정협의 신청권을 중소기업 조합에도 인정하기로 했다. 또 납품 단가 인하의 부당성에 대한 입증 책임을 종전에는 공정위나 중소기업이 지던 것을 대기업에 돌리는 방안도 유력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친서민 회귀를 계기로 몇몇 정책의 손질이나 신설 차원을 뛰어넘어 MB 노믹스의 경제 운용 철학과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을 압박하고 관련 정부 부처를 다그친다고 근본적인 상황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고 법과 제도의 변화로 구체화돼야 한다”면서 “공정위의 직권조사나 검찰의 사정은 일시적으로는 서민 정서를 달래주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경제의 기본 구조와 체질을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로운 경제정책으로는 대기업에만 유리한 고환율(원화 가치 하락) 정책과 부자·대기업을 위한 감세 정책의 포기, 투자보다는 고용을 많이 하는 기업에 대한 세액공제 인센티브 제공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김 소장은 “환율이 높으면 대기업은 좋지만, 환율이 낮아지면 수입 물가 하락으로 서민과 중소기업이 유리하고 물가 상승 압력에 따른 금리 인상 부담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양극화 개선 없이 친서민 성공 없다

경제개혁연대,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는 하도급 거래에서 억울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이 더 손쉽게 구제받을 수 있도록 공정위의 전속고발제(공정거래법 위반죄에 대해서는 공정위의 고발이 있어야만 공소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를 폐지하고, 법 위반 대기업에 배상을 무겁게 물리는 3배손해배상제 도입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불공정 하도급 거래에 대한 시장 감시를 강화하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대기업에 대해서는 거래하는 하도급 업체의 명단을 공시하도록 해 투명성을 높이는 방안도 제기된다. 대기업 총수의 경영권 방어 장치를 강화해주기 위해 상법 개정을 통해 ‘포이즌필’(독약)을 도입하려는 것도 재고 대상으로 꼽힌다.

이명박 정부의 친서민 행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과연 성공할지는 현 시점에서 속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양극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서민과 중소기업 문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친서민 정책이 단순한 정치적 수사인지, 아니면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차분히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의 획기적 대책
초과이윤을 협력업체에도 나눠주자

정부와 재계는 대·중소기업 간 상생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 중이지만 눈에 확 띄는 묘책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일회적인 시혜성 조처보다 대·중소기업 간 공정거래를 통해 기업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는 획기적 대안이 필요하다.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거래하면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수익성(이익률)과 직결되는 납품 단가 문제다. 김영호 유한대 총장은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서 대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도록 하려면 중소기업의 이윤을 지금의 2~3%에서 8% 수준까지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의 낮은 이익률로는 연구·개발 투자와 우수 인력 확보 등 혁신 역량 제고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치열한 국제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원가절감 노력은 필수라며 고개를 흔든다. 대기업의 가격경쟁력과 수익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중소기업의 적정이윤을 보장하는 묘책으로는 대기업의 이익 중 일부를 사후적으로 중소기업에 나눠주는 ‘초과이익배분제’(PS·Profit Sharing)를 검토할 만하다. 삼성은 현재 각 계열사가 연초 수립한 이익 목표를 연말에 초과 달성하면 다음해 초에 초과이익의 20% 한도 안에서 직원 연봉의 최대 50%까지 지급하는 PS를 시행하고 있다. 올 초에도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규모인 2조원가량의 PS를 지급했다. 삼성전자가 이익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데는 직원뿐만 아니라 부품 협력업체들의 원가절감, 생산성 향상 노력도 기여한다. PS를 협력업체의 기여도에 따라 차등 적용하면, 원가절감 등 동기부여도 가능하다. 4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상생의 기업 생태계를 실질적으로 만들려면 이익배분제 같은 획기적인 조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볼 만하다”고 관심을 보였다.
초과이익배분제의 실제 효과는 얼마나 될까? 삼성전자와 현대차를 기준으로 보면, 대기업이 연간 이익의 10~15% 정도만 배분하면 협력업체의 이익률은 현재의 2~3%에서 5%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 중소기업 조합 관계자는 “5% 정도의 이익률만 지속적으로 확보되면 충분하지는 않지만 연구·개발 투자와 우수 인력 확보를 통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면서 “대기업들은 이익배분액만큼 납품 단가를 덜 깎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의 경우 지난해의 순이익 2조9600억원의 15%를 배분하면 부품업체 매출액 순이익률이 2.73%에서 5.01%로 뛴다. 또 삼성전자는 지난해 순이익 6조2천억원의 10%만 배분하면 부품업체 순이익률이 3.12%에서 5.21%로 뛰어오른다. 이로 인한 현대차와 삼성전자의 이익률 하락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 삼성전자는 6.92%에서 6.22%로, 현대차는 9.3%에서 7.9%로 낮아진다.
이런 결단은 결국 대기업 총수의 몫이다. 그동안 재벌 총수는 미래 성장 동력 확보의 절박성을 강조하며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앞장섰지만, 대·중소기업 상생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해왔다. 김상준 공정위 기업협력국장은 “기업이 인식을 바꾸어야 하고, 그것은 결국 총수의 의지에 달렸다”고 말한다.


실태조사로 드러난 중소기업 애로점
‘큰형님’보다 독한 대기업
“원자재 가격 상승에도 불구하고 납품 단가가 조정되지 않아 연간 4억~5억원의 손해가 발생해, 거래 단절의 위험을 무릅쓰고 항의 중이다.”
한 자동차 부품업체가 정부 합동의 ‘중소기업 현장애로 실태조사단’에 털어놓은 절박한 호소다.
지난 7월29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는 7월 초부터 기획재정부·지식경제부·고용노동부·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 부처 합동으로 전국 11개 산업단지의 562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 조사에서 확인된 중소기업의 애로 요인이 쏟아졌다.
국내 경기가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경영 상황이 지난해보다 나아졌다고 느끼는 중소기업은 절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은 체감경기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로 대기업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 인력난, 자금 조달의 어려움 등을 꼽았다.
이 중에서도 가장 주된 요인은 영원한 갑(甲)인 대기업의 하도급 횡포다.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부품을 납품하는 한 전자업종 중소기업은 “원가절감을 위한 기술 개발과 공정 개선 등을 강요하면서 관련 비용은 모두 협력업체에 부담시키고, 원가절감 성과만큼 납품 단가를 인하한다”고 하소연했다. 한 가전부품 업체는 대기업이 중국 생산 단가와 비교하며 매년 정기적으로 납품 단가를 5% 이상 인하할 것을 요구한다고 호소했다. 계약서 없이 구두로 생산설비 확충을 요구한 뒤 정작 다른 경쟁 업체에 발주하거나, 경쟁사에는 부품 공급을 하지 말도록 강요하는 잘못된 관행도 여전했다. 또 다른 부품업체는 “정부의 하도급 실태 조사가 실시되면 그 전에 대기업 구매 담당자가 전화해 답변 지침을 준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털어놓았다.
전자와 함께 잘나가는 업종 가운데 하나인 자동차산업의 부품업체는 원자재 가격이 상승해도 대기업이 납품 단가에 반영해주지 않는 것을 가장 큰 애로 요인으로 꼽았다. 기계업종의 한 부품업체는 “60일 이내에 납품 대금을 주는 경우는 50%에 불과하고, 60일이 넘는 경우에도 지연이자를 거의 주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일부 대기업은 연말에 지연이자를 지급했다가 나중에 다른 통장으로 반환을 요구하는 편법까지 동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차·전자·기계 등 각 산업의 밑바탕에서 부품을 공급해 ‘뿌리산업’으로 불리는 주물, 단조, 소성가공업종 등의 경우 대부분 2차 이하 협력업체여서 어려움이 더욱 큰 것으로 나타났다. 주물·합금강·탄소강 등은 2008년 이후 원자재 가격이 평균 50% 이상 상승했으나 납품 단가는 오르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이번 조사 대상 중소기업과 거래하는 대기업에는 삼성전자, 현대차, LG전자,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이 망라됐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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