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검찰, 서투른 칼질로 제 손을 베다

한명숙 전 총리 공판서 곽영욱씨·경호원 등 검찰 쪽 증인조차 공소 내용 부인…
재판 내내 ‘배신’과 ‘망신’의 연속
등록 2010-03-26 15:03 수정 2020-05-03 04:26
검찰, 서투른 칼질로 제 손을 베다. 한겨레 김영훈

검찰, 서투른 칼질로 제 손을 베다. 한겨레 김영훈

“검찰 수뇌부는 지난 한 주 내내 악몽을 꾸는 기분으로 살았을 것이다. 수사팀 역시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재판과는 아무 상관 없는 한 부장판사의 관전평이다. 물론 그는 “여전히 재판은 진행 중이고 앞으로 무슨 변수가 튀어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검찰이 고전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재판 초기 핵심 증인인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5만달러를) 직접 준 게 아니라, 오찬장 식탁 의자에 놓고 왔다”고 진술을 번복하면서 검찰은 코너에 몰렸다. 검찰 쪽 증인이 핵심 진술을 바꿨기 때문이다.

‘뭔가 반격 카드가 있겠지’ 관측 무너져

법조계 안팎에서는 심기일전한 검찰이 어떤 식으로든 ‘반격 카드’를 내놓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건을 검찰이 허술하게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경험적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3월15·17·18·19일 등 네 차례 이어진 공판에서도 검찰은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못해보고 맥없이 퇴각했다. 오히려 검찰 쪽에서 신청한 증인들이 검찰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며 조사 때와 다른 진술을 쏟아냈다. 마침내 재판부한테서 “공소사실 변경을 검토해보는 게 어떠냐”는 권고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지난 일주일은 검찰이 믿었던 증인들에게 ‘배신’과 ‘망신’을 당한, 검찰 잔혹사였다.

3월15일 공판정에서는 돈을 건넨 정황과 관련해 곽 전 사장이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공개됐다. 그러나 곽 전 사장은 공판에서 핵심적인 부분과 관련된 자신의 검찰 조사 내용을 스스로 슬그머니 부정했다.

그는 검찰 조사 때 “제 부인이 (저한테) 일을 하라고 해서 아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알아봐달라고 한 적은 있다. 한 총리도 그래서 도와줬을 것이다. 내가 부탁하지 않았으면 (한 총리가) 정세균에게 부탁해서 날 도와줄 이유가 없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그는 공판 때 “저 이야길 내가 한 것인가?”라고 되물어 검찰을 당혹스럽게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느냐’는 변호인의 물음에는 “저렇게 (조서에) 적혀 있으면 내가 말했겠지…. (그래도) 내가 한명숙에게 먼저 말하진 않았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또 검찰에서 “석탄공사 사장을 꼭 시켜달라는 게 아니고 놀고 있으니 알아서 해달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틀림없는 거 같다. 지금 기억에는…. 알아서 해달라고 하니까 석탄공사 사장 이야기를 그 양반(한 총리)이 했다”고 진술했지만, 법정에서는 말을 바꿨다. 그는 법정에서 “한 전 총리가 석탄공사 사장 이야기를 먼저 한 적이 없고, 그냥 한 전 총리가 도와줬을 것이란 ‘필링’이 와서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검찰, 저 증인 왜 불렀지?” 수군수군

같은 날 증인으로 출석했던 강동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도 검찰의 실낱같은 기대를 저버렸다. 검찰은 강 전 장관을 불러 당시 오찬에 곽 전 사장이 참석한 것 자체가 정상적인 모임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려고 했다. 총리와 전·현직 장관이 오찬을 하는 자리에 민간인이 합석한 것이 ‘청탁’의 성격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걸 보여주겠다는 전략이었다. 실제 강 전 장관은 검찰 조사 때 “총리가 초대한 그 오찬 자리에 (정세균 장관과) 건교부 장관을 지낸 내가 참석하는 건 이해가 됐는데, 곽 전 사장은 그런 출신 아닌데 초대돼 의아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는 법정에 나와 “사건이 불거진 뒤 생각해보니 셋 모두 동향(전주)이고 서로 존중하는 사이인 걸 알아 그렇게 하시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그 모임이 곽 전 사장과 한 총리의 친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느냐’는 검찰의 질문에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총리는 인사권이 없고, 공기업 사장은 인사 전권이 청와대에 있다. 총리는 관여할 수 없게 시스템이 돼 있다”면서 검찰의 공소사실에 일침을 놨다.

검찰이 공을 들였던 ‘골프채 선물’ 부분과 관련해 3월17일 증인으로 출석한 골프숍 직원도 검찰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곽 전 사장이 한 전 총리와 2002년 8월21일 함께 갔다는 골프숍의 직원은 법정에서 “곽 사장과 함께 매장에 온 한 총리를 봤다”고 말했지만 “어떤 것을 구입했는지는 모른다”고 증언했다. 골프채 구입 비용을 대줬다는 황아무개 당시 대한통운 서울지사장도 “골프채를 고르고 나서 ‘한명숙 장관에게 선물할 것’이란 얘길 들은 뒤 자리를 떴는데, (골프채가) 전달됐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조사를 받으러 갔더니) 검사가 먼저 ‘골프채 사준 사실을 다 알고 있다’고 해서 자백했다”고 덧붙였다.

검찰이 신청한 증인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3월18일 증인으로 나온 당시 총리 공관 경호원 윤아무개씨다. 총리 공관에서 8년 동안 경호 업무를 맡았던 그는 법정에서 “8년 동안 근무하면서 오찬이 끝난 뒤 총리가 손님보다 늦게 나온 기억이 없다”고 확신에 찬 말투로 진술했다. 윤씨의 증언은 ‘오찬에 동석한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과 강동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 먼저 나가고, 둘만 남은 상태에서 곽 전 사장이 돈을 건넸다’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다시 한번 흔들어버린 결과를 낳았다. 더구나 그는 “만약 총리가 먼저 안 나오면 우리는 곧바로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야 한다. 총리의 안전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시 출입문을 잡고 안을 지켜보면 오찬장 상황이 다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곽 전 사장이 돈을 건넸다면 다 지켜볼 수 있었다는 취지인 셈이다. 법정에서는 “검찰이 왜 저 사람을 증인으로 신청했을까”라는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한명숙 전 총리가 3월17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5만달러 뇌물수수 혐의’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한명숙 전 총리가 3월17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5만달러 뇌물수수 혐의’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검찰의 필요에 의해 증인으로 나온 윤씨가 외려 검찰의 기소 내용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진술을 쏟아낸 셈이 된 것이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던 검찰은 이날 공판을 일찍 끝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한 뒤 당시 윤씨와 함께 근무한 다른 경호원들을 조사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증인들의 이어지는 ‘배신’ 탓인지, 검찰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소속 베테랑 검사들답지 않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첫 공판 때 2명의 검사가 참석했다가 17일엔 대검 중수부 소속 검사까지 합쳐 4명이 법정에 들어왔다. 그만큼 다급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18일 공판에서는 재판부에게서 ‘공소장 변경’을 권유받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이날 공판에서 한 전 총리 쪽 백승헌 변호사는 “오찬 뒤 다른 참석자들이 나가고 둘만 남은 상황에서 5만달러를 건네주었다는 공소사실과는 다른 법정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며 검찰에 공소장을 변경할 뜻이 있는지를 물었다. 재판부도 거들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에는 ‘한 전 총리에게 건네주었다’고 돼 있지만, 이는 방 안에서 의자 위에 놓고 나왔다거나, 아니면 비서 등 다른 사람을 통해 건네주었다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된다”며 “단순히 건네주었다고만 하면 구체적인 행위가 특정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검찰이 (공소사실 변경을) 검토해보길 권한다”고 말했다. 재판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재판부로부터 공소사실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며 지적당하는 수모를 당한 셈이다.

대검 중수부 검사들까지 공판에 나왔으나

검찰은 법정에서 무리한 신문을 진행하다가 재판부한테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강동석 전 장관이 증인으로 출석한 공판이었다. 다급해진 검사가 “검찰 진술 때와는 다르지 않느냐”며 법원에 증거자료로 제출하지도 않은 서류를 꺼내들었다. 변호인은 즉각 반발했다. 그러자 검찰은 “강 전 장관이 검찰에 나와 한 이야기를 검사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든 내부 보고용 면담 서류”라며 “필요하면 법정에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재판에서 이런 행위는 ‘반칙’이다. 결국 “내부 보고용이면 (법정에서) 사용하면 안 된다”는 재판장의 지적을 받고 없던 일로 정리했다. 다시 한번 망신을 자초한 셈이다.

3월19일 재판에서도 검찰은 한 전 총리의 의전비서관이던 조아무개씨를 신문하다가 재판장의 제지를 받았다. 검찰은 조씨에게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 전 총리 아들의 학비만 4만~5만달러, 체류비 등을 합하면 연간 10만달러 이상이 필요한데, 총리의 해외 출장 경비를 모은 2만달러 정도로 그 비용을 감당할 순 없겠죠”라고 말한 뒤 “(한 전 총리 아들에게 보낼) 달러를 환전하거나 송금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재판장은 “증인에게 확인된 사실만 물어보라. 환전이나 송금한 사실만 물어봐야지, 외국에 있으면 돈이 많이 드는데, 그것도 구체적으로 몇만달러 들 거 같은데라는 걸 왜 물어보느냐”고 지적을 받았다.

검찰 내부서도 “수사 허술했던 것 아니냐”

재판의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면서 검찰 내부에서도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 속단하기 이르지만 “곽 전 사장을 너무 허술하게 조사해서 검찰이 역공을 당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한 검찰 고위 간부는 “곽 전 사장이 어리숙해 보여도 매우 치밀한 사람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는 “돈을 줬다는 진술이 바뀐 것은 아닌데, 의자에 놓고 나왔다고 하니 외부에는 진술을 번복한 것처럼 비친다”면서 “자신도 살고 한 전 총리도 살 수 있는 교묘한 진술을 내놓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검찰 간부는 “수사팀이 핵심 증인의 진술 번복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놓지 못한 것 같다”며 “수사 과정에서 곽 전 사장을 너무 허술하게 본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를테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경우처럼 한 번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은 절대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곽 전 사장이 처음엔 검찰이 원하는 대로 진술해 자신의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에 대해 선처를 받은 뒤, 다시 법정 진술을 번복해 뇌물 공여 혐의마저 벗는 전략을 편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제 곽 전 사장의 남은 혐의는 횡령 부분뿐인데, 횡령액을 변제하면 선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변호인들은 “곽 전 사장이 횡령한 돈으로 증권 투자를 해 큰 이익을 남겼는데, 검찰이 수사를 하면서 왜 범죄 수익을 몰수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과 곽 전 사장 사이의 거래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검찰은 “조사해보니 혐의가 없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다시 말을 뒤집기는 힘든 상황이다.

한명숙 전 총리의 재판은 이례적으로 선고일(4월9일)이 예정돼 있다. 재판부가 지방선거 일정을 고려한 것이다. 검찰이 남은 공판 과정에서도 곽 전 사장을 압박할 카드가 있을까? 시커멓게 속은 타들어가지만 실제 재판에서 검찰이 맥을 못 추는 이유가 사실은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석진환 기자 한겨레 법조팀 soulfat@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