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예스맨과 같은 ‘명의 보정’ 운동을 생각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좀 머뭇거렸다. 한국은 정치적 유머 감각이 없는 나라다. 이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게 모욕죄와 명예훼손죄를 형사처벌하며, 공인이나 정치인들은 그런 법률을 십분 활용해왔다. 수많은 누리꾼이 풍자 글과 그림을 올렸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받았다. 선거운동 기간에는 특히나 정치적 이미지나 사용자제작콘텐츠(UCC), 트위팅이 금지된다. 2008년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대통령에게 킬러를 보내고 싶다는 농담을 했다가 대통령 살인음모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일찍이 인터넷에서 ‘2MB’라는 표현을 금지했다. 대통령의 영문 이니셜 MB를 컴퓨터 메모리 용량에 빗대 ‘머리 용량 2MB’ 등으로 표현한 것이 대통령의 인격을 폄하하기 때문이란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2월26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서를 접수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인터넷 실명제에 관한 네 번째 헌법소원이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무엇보다 대한민국에서 ‘익명의 인터넷 전사’ 노릇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주요 포털에는 1년 365일 ‘민증을 까야’ 글을 올릴 수 있고, 특별히 선거 시기에 인터넷 언론에 글을 올릴 때는 이름 석 자 실명만 허용된다. 2009년 ‘인터넷 주소자원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도메인 등록도 실명으로만 하게 되었다. 이런 마당에 헌법재판소는 지난 2월25일 공직선거법상 인터넷 실명제가 ‘합헌’이라고 못박았다. 게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상정보가 진작부터 관리돼온 터에 한국판 예스맨이 등장할 수 있을까.
그래도 농담하는 꿈조차 꾸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름을 바로잡는 운동. 어슐러 르귄의 소설에 나오는 마법사들은, 사물의 진정한 이름을 알게 되면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도 믿어보자.
‘인터넷 실명제’부터 바로잡아볼까. 인터넷 실명제는 정직한 이들이 스스로 이름을 밝히고 글을 쓰는 제도로 홍보되고 있다. 실명을 밝히는 문제를 글쓴이의 양심 문제로 돌리는 모양새다. 하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 나와 내 양심에 선택권이 없다. 국가가 실명 쓰기를 일제히 강제하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을 악플러 혹은 범죄자라고 단정하고, 수사 편의를 위해, 실명을 밝히지 않는 이들에게는 글쓰기를 제한한다. 인터넷 실명제가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빚자 정부는 ‘제한적 본인확인제’라는 희한한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어떻게 불리건, 인터넷 실명제‘들’은 국가가 1천만원 혹은 3천만원의 과태료로 강제하는 실명제라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경찰과 정부는 이렇게 수집된 실명 정보를 정부 비판적 누리꾼에 대한 사찰에 이용해왔다. 2008년 국정감사에서 문화부가 정부에 비판적인 이용자 아이디 700~800개를 파악해 청와대·대검찰청·경찰청 등 42개 정부부처에 전달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사기관이 누리꾼의 개인 정보를 영장 없이 제공받는 건수가 공식적으로만 연 500만 건을 넘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터넷 실명제의 정확한 호칭은 ‘인터넷 국가 실명제’가 되어야 마땅하다. ‘제한적 국가 신원확인제’라고 해도 좋겠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본심도 밝혀보고 싶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해 구글을 실명제 대상으로 지정했다가 국제적 망신거리가 되었다. 올해는 슬그머니 그 대상 지정을 철회해버렸다. 서버가 해외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트위터도 비슷한 이유로 본인확인제 대상이 아니라 했다. 본심은 이럴 것이다. 국제적 네트워크인 인터넷 서비스에 대한민국식 본인확인제를 적용하려다 보니 점점 그 한계가 드러나 고민이다. 본인 확인을 위해 사용되는 주민등록번호도 말썽이다. 모든 국민에게 번호를 부여해 평생 관리하는 이 제도는 독재정권의 유산인데다 이미 수천만 건이 유출된 상황이라 그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인지도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궁색한 처지를 십분 이해한다. 그러니 어느 날 방송통신위원회가 이런 입장을 발표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인터넷 실명제는 처음부터 잘못된 제도였습니다. 실명 확인을 한답시고 국가가 인터넷 사업자에게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강제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되는 사고가 최근 계속되는 데 대해 정부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또 실명 사용을 강제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일부 수사기관과 정부 부처가 국민 여러분을 사찰해온 데 대해 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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