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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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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전략 논의’ 출구가 안 보이네

지방선거 의식한 정부 “금리 인상 반대” 밝혀 한국은행과 미묘한 갈등…
올 하반기에나 실행 논의 이뤄질 듯
등록 2010-03-05 15:31 수정 2020-05-03 04:26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
한 경제학자는 이명박 정부가 ‘출구전략’(염불) 자체보다 ‘지방선거’(잿밥)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며 이렇게 꼬집었다. 최근 글로벌 경제에서 화두는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다. 주요 국가들이 출구전략의 시기와 방법을 놓고 고심하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당분간 출구전략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정부는 그 이유가 서민을 위해서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속내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표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윤증현(가운데)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성태(왼쪽) 한국은행 총재가 2월17일 오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윤증현(가운데)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성태(왼쪽) 한국은행 총재가 2월17일 오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출구전략은 군사 용어다. ‘빠지기 전략’의 다른 말이다.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기 전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물러나는 전략이다. 미국의 베트남 철수가 대표적인 출구전략이었다. 경제 분야에서 쓰이는 출구전략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했던 금융·재정상 각종 비상 조처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그 핵심은 금리 인상, 정부 지출 축소, 채권 매각, 세원 확대,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을 통해 시중에 과잉 공급된 통화를 환수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효과가 가장 크고 신속하게 나타나는 정책은 금리 인상이다.

미 재할인율 인상… 중국·인도 등도 속속 ‘채비’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뒤 각국은 경기 부양을 위해 여러 가지 규제 완화 정책을 펼쳤다. 정부마다 곳간을 열어젖히고 헬기에서 돈을 뿌리듯 재정을 지출했다. 이 결과 금융시장 안정, 고용 유지 등 많은 효과를 거뒀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인플레이션 경고음이 켜지면서 출구전략 논의가 불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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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나라에서 출구전략 움직임을 보여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2월19일 재할인율을 연 0.5%에서 연 0.75%로 0.25%포인트 올렸다. 재할인율은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대출할 때 적용하는 금리로, 재할인율을 올리면 은행에 있는 자금이 중앙은행으로 돌아와 시중 자금이 줄어들게 된다. 물론 미국의 출구전략이 다소 늦춰질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버냉키 FRB 의장이 2월24일 반기 경제동향 보고를 위해 하원 재무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미국 경제의 회복세가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어 가계와 기업의 수요를 진작시키기 위한 저금리 정책이 계속 필요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 1월12일 중국의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은행 지급준비율을 0.5%포인트 올린 데 이어, 2월25일 이후 추가로 0.5%포인트를 올리기로 했다. 브라질도 2월24일 은행 지급준비율을 인상해 출구전략에 돌입했다. 올 들어 중국·인도·브라질이 지급준비율 인상 대열에 합류하면서 러시아를 제외한 브릭스(BRICs) 국가들이 정책 초점을 물가 잡기로 선회하는 모습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주요 책임자들도 출구전략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호세 비날스 IMF 금융자문관은 2월25일 IMF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공동으로 연 ‘세계경제의 재건’ 국제회의에서 “각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시행된 경기부양책과 금융권 지원으로 인해 급증한 정부 부채, 중앙은행의 과도한 유동성 공급 등을 정상화하는 출구전략을 준비해야 한다”며 “각국 중앙은행이 단기금리를 정상화하는 등 점진적인 통화긴축 정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와대와 기획재정부는 출구전략 논의가 나올 때마다 금리 인상이 서민의 이자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되면 가처분소득이 줄어들고 소비가 또 다른 부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상반기 중 시행 불가’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2월8일 출구전략 시행과 금리 인상에 대해 “민간 경기 회복이 본격화되지 않고 있어 금리 인상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면서 “금융위기 이후 정책 당국 간 경제 상황 인식 공유와 정책 공조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밝혀 조기 집행 불가 방침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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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고통스러워도 미루다가 더 큰 화 부를 수도

이에 반해 한국은행은 출구전략이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음을 시사해 엇박자를 드러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2월1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기준금리 인상 시기를 묻는 질문에 “그리 머지않을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그는 또 “하반기 이후 인플레이션이나 자산 거품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며 “가계 부채 문제는 앞으로 장기간 우리 경제에 짐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청와대와 기획재정부의 ‘상반기 불가론’과는 다른 견해를 보인 것이다. 출구전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는 2008년 10월부터 다섯 달 새 기준금리를 3.25%포인트나 내린 이후 12개월째 2%로 묶어둔 상태다.

출구전략은 고통스럽다. 출구전략이 시행되면 어느 정도 경기 둔화는 불가피하다. 금리 인상은 결국 사람들의 이자 부담을 높이게 되기 때문이다. 가계 빚은 지난해 3분기 말 712조원으로, 3년 새 153조원이나 늘었다. 가계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가처분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부채 상환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계 부채는 우리나라 경제의 시한폭탄이 돼가고 있는 셈이다.

출구전략은 타이밍이 핵심이다. 출구전략이 너무 늦으면 인플레이션과 자산 거품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고, 너무 빠른 출구전략은 더블딥(double dip·경기 침체 뒤 잠시 회복기를 보이다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이중 침체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논리는 이렇다. ‘지금 상황에서 금리를 인상한다면 개인은 이자 부담이 증가하게 되고 급격한 내수 소비 위축으로 경기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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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의 논리는 이렇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경제위기가 급습할 경우, 거품 붕괴라는 최악의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때문에 조금씩 금리를 올려 가계도 미리 구조조정에 나서게 해야 한다는 게 한은의 생각이다. 지금이라도 금리를 올려둬야 혹시 모를 외부 충격이 닥쳤을 때 정책 대응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명박 정부는 관치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출구전략을 막으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1월8일 새해 들어 첫 금융통화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날 허경욱 기획재정부 차관이 회의에 참가했다. 11년 만에 행사한 열석발언권(정부가 금통위 회의에 참석해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이다. 그날 금통위는 금리 2%를 그대로 동결했다. 이전 정부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관치금융 논란을 피하기 위해 열석발언권의 실제 행사는 극히 자제해왔다.

제때 시행 못하면 높은 인플레이션 맞아

이명박 정부가 한은과 각을 세우면서 금리 인상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뜻도 있다. 하지만 경제계 안팎에선 이명박 정부의 집권 후반기를 좌우할 6월2일 지방선거 때문이라는 시각도 팽배하다. 이런저런 핑계 속에 인기 없는 긴축정책은 차일피일 미뤄지기 십상이다.

권영선 노무라증권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첫 금리 인상 최적 시기는 지난해 11월이었지만 정부와 중앙은행 간에 통화정책에 대한 의견이 갈리면서 적기를 놓쳤다”며 “차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시기는 올해 6월 이후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의 장기 성장률을 고려할 때 출구전략을 시작했어야 할 시기에 금리를 인상하지 못함으로써 앞으로 더 높은 인플레이션 비용을 지불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주장했다. 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지난 연말 와 한 인터뷰에서 “출구전략을 회피하는 것은 지방선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출구전략 시기를 놓고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시기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따져 봐야 한다. 정치적으로 접근할 경우 후유증을 낳게 된다”고 지적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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