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5일, 2005년부터 추진돼온 ‘사회적 책임 국제표준’(ISO 26000·Guidance on Social Responsibility)이 개발에 참여한 76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79%의 찬성표를 얻어 최종 국제표준안으로 등록됐다. 최종 국제표준이 공식 제정되기까지는 앞으로 한 차례의 투표가 더 남아 있다. 그러나 이때는 자구 수정 등만 논의되기 때문에 국제표준의 구성과 주요 내용은 사실상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기업과 정부 등 각 사회·경제 조직들이 준수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제표준 제정 논의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서유럽의 정계·재계·학계 인사들이 결성한 미래 연구기관인 로마클럽이 1972년 내놓은 ‘성장의 한계’ 보고서는 인구 증가와 자원 고갈을 적절히 조절하지 않으면 인류 복지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예측했다. 그 뒤 경제 분야의 뜻있는 기업가들은 1970년대에 사회책임투자(SRI) 운동을 시작하면서 군수·담배·도박 같은 비윤리적 분야에는 투자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 ‘재력을 겸비한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는 지성인 그룹’에 훌륭한 기업가들이 많이 참여했고, 이들은 자신이 이룩한 부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천명했다. 이 계보는 워런 버핏에서 빌 게이츠 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엔환경계획(UNEP)은 1997년 다국적기업들에 사회책임경영(CSR) 보고서를 발간하도록 촉구했다.
한편, 과학기술전문가 그룹 쪽에서는 ‘재생 가능한 자원’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 기술전문가들은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기업의 상품에 대한 소비자 불매운동에서 지원을 얻어 환경경영체제(ISO 14001) 인증 운동을 벌였고, 국제표준화기구 환경경영위원회(ISO/TC207)는 친환경 설계 기법과 온실가스 배출량 검증 관련 규격을 만들고 있다.
이렇듯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국제적 이슈로 부상하면서 2005년부터 국제표준화기구(ISO)는 “기업 등 여러 조직에 사회적 책임을 지게 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을 추구하기 위한” 국제 지침서 제정에 나섰다. 이 논의 틀에는 유엔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 노동·환경·인권 단체들이 대거 참여해왔다.
이번에 최종 등록된 ISO 26000은 정부·지자체·정당·학교·병원·비정부기구(NGO), 특히 민간 기업들에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개선해야 할 부분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지배구조 개선과 인권, 노동 관행, 환경, 공정운영 관행, 소비자 이슈, 공동체의 사회·경제 발전 등 핵심 영역별로 구체적 과제가 제시된다.
가장 관심을 끄는 건 ISO 26000 제정이 앞으로 기업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미칠 영향이다. ISO 26000은 정부와 기업, 시민단체 등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지침이다. 하지만 기업 활동과 관련된 내용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노동 분야의 경우, 외국 기업이 진출국의 고용 사정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또 노동자들이 겪는 스트레스의 위험성도 인식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이 표준에 따라 기업들은 온실가스 절감 대책을 마련해 환경경영에 나서야 하며, 고용 확대가 가능한 기술개발로 지역공동체 발전에도 힘써야 한다.
인권·환경·윤리 기준 못 지키는 기업들 도태
소비자 안전 문제 등 소비자 이슈도 핵심 내용 중 하나다. 이와 관련해 소비자 보건 및 안전에 힘써야 하는 건 물론이고, 상품 가격의 구성 정보 제공과 소비자 서비스 및 문제 해결, 리콜 등 직접적으로 기업 경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내용들이 상당수 담겼다. 물론 이 표준이 강제성과 구속력은 낮은 권고규범 성격을 갖고 있긴 하지만 앞으로 기업들이 투자를 판단할 때 기준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사실 선진국 기업과 정부는 이미 ISO 26000 시대에 이미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 이 선정하는 ‘포천 글로벌 500’에 속한 다국적기업은 소비자·환경·노동·인권 단체들이 문제 삼을 것들을 미리 예상해 협력업체에 사회적 책임을 지킬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선진국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도 지속 가능한 사회를 원하는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산하 공기업과 물자 납품업체에 ISO 26000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저조한 편이다. 중소기업을 포함해 많은 기업들은 ISO 26000 지침을 지키기에 많은 무리가 따를 것으로 보인다. 물론 초기에는 단계별로 시간을 두어 표준안 지침을 따라오게 하겠지만, 결국 못 따라오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가격과 품질의 제품을 ISO 26000을 지키면서 제공할 수 있는 다른 기업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ISO 26000은 서문에서 “무역에서 비관세장벽을 만드는 것을 의도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비관세장벽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크다. 사실 선진국의 많은 기업과 노동자들은 인권·환경·노동조건을 고려하면서 생산하는 자신들의 제품이, 환경을 파괴하고 인권을 억압하고 노동조건이 열악한 아시아 지역에서 만든 제품과 가격만으로 경쟁하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그동안 ISO 26000에 반대해온 것도 이처럼 비관세장벽으로 부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ISO 26000이 시행되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 기업 등이 사회적 책임에 어긋나는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 경우 서구의 소비자·인권·노동·환경 단체들이 연합해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지난 5년간 ISO 26000 지침서를 만드는 동안 전세계의 주요 소비자단체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국제 노동·인권·환경 단체가 깊숙이 교류해왔다. 이들은 어떤 나라에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조직(기업 등)이 나타날 경우 그 지역 시민단체의 역량만으로 통제하기 어렵다면 국제적 수준에서 문제를 제기해 공동 대응하기로 암묵적 합의를 도출했다.
ISO 26000 지침과 관련해 국내 기업들이 당장 개선해야 할 분야는 △인도 및 중국 등 해외 하청공장에서의 아동노동 △창업주 일가의 공금 횡령 △불법 파견노동자 사용 △환경을 희생하는 개발 △지역 공동체 거주민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개발 △무노조 경영을 하기 위한 노동 탄압 등이다.
전세계 시민단체가 공동 대응한다면ISO 26000은 특히 윤리적이지 않은 기업 경영진을 정부나 금융기관이 도와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또 노동 관행에서는 정규직과 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비정규직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비정규직 고용 문제와 관련해 국제 노동계에서 ISO 26000 지침을 앞세우면서 특정 기업을 타깃으로 삼아 문제제기에 나선다면 그 기업은 심각한 매출 감소를 겪을 공산이 크다. 아직 ISO 26000에 둔감한 한국 기업들에 이번 사회적 책임 국제표준 제정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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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책임 국제표준은 기업·비정부기구·정부 등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조직이 인권·환경 등 핵심 주제에 대해 사회 공동체에 이익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하는 행동 지침서다. 세계인권선언·국제노동기구(ILO)협약·기후변화협약·유엔소비자보호가이드라인·유엔글로벌콤팩트(Global Compact) 등 이제까지 나와있는 국제 지침을 총망라한 것으로, 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국제 이행 지침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ISO 26000의 핵심 주제는 지배구조 개선과 인권, 노동, 환경, 공정운영 관행 등이다(표 참조).
정부는 올 하반기부터 산업·노동·환경·소비자 등 관련 분야 최고경영자(CEO)와 실무자 등이 SR26000을 이해하고 이행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로 했다. 또 국가표준(KS)으로 도입해 내년에 국가표준 홈페이지(www.standard.go.kr) 등에 보급할 예정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송준일 한국품질보증원 대표·ISO/TC207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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