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어느 화창한 날, 국내 굴지의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아무개(52) 부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 부장이 고객과 대출 상담을 막 마친 뒤였다. 같은 동네에서 보험대리점을 하고 있던 최아무개씨였다. 안면이 있는 최씨의 전화였지만, 그날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전화선 너머 최씨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깔려 있었다.
“부장님, 긴급히 얘기할 게 있는데, 부인에 관해서입니다.” 몇 시간 뒤 김 부장은 커피숍에서 최씨와 만났다. 최씨가 커피잔 사이로 문서를 쑥 내밀었다. 김 부장의 아파트 등기권리증이었다. “아니, 당신이 왜 이 문서를 갖고 있어?” 김 부장이 최씨에게 따져물었다. “부인께서 돈을 좀 빌려 쓰셨습니다. 돈을 갚지 않으셔서 담보로 갖고 있는 겁니다.”
김 부장은 뭔가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으로 한동안 멍해 있었다. 당시 김 부장의 연봉은 7천만원이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아이들 교육비를 벌겠다며 슈퍼마켓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돈을 빌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빚이 얼마 남았는데?” “2억5천만원 남아 있습니다. 빨리 갚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조직이 있는 친구한테 돈을 빌린 거라서….” 최씨는 은근히 협박을 가했다.
시작은 2천만원이었다. 슈퍼마켓 운영자금이 일시적으로 부족했던 김 부장의 아내는 2005년부터 최씨에게 137차례에 걸쳐 돈을 빌리고 갚았다. 적게는 450만원, 많게는 1억2600만원이었다. 누적 대출금은 49억5천만원이었다. 김 부장의 아내가 갚은 금액은 모두 52억9172만원이었다. 이자율로 따져보면 133.33%였다. 그러고도 갚을 돈이 2억5천만원이나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송태경 민생연대 사무처장은 “대부업자는 2005년에 법령 최고 이자율인 연 49%를 초과해 받았다. 대부업법 위반이다. 때문에 1년 뒤인 2006년부터 빌린 돈에 대해서는 원금만 갚으면 된다. 결국 김 부장의 부인은 2005년 1년치 대출금에 대한 이자인 795만원만 갚고 나머지 빌린 돈에 대해선 원금만 갚으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행 대부업법은 대부업자가 받을 수 있는 이자율 상한을 연 60% 범위 이내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위임하고 있고, 대통령령은 이를 49%로 정하고 있다. 연 49% 이상 이자를 받는 것은 불법이다.
김 부장은 최씨를 대부업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최씨는 700만원의 벌금만 내고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최씨는 김 부장 아내가 2억4천만원의 돈을 갚지 않았다며 민사소송을 걸었다.
김 부장은 서울 마포에 있는 6억원짜리 아파트를 급매로 팔아 아파트 대출금 등 다른 빚과 함께 최씨가 요구하는 돈도 갚았다. 이후 김 부장은 3천만원짜리 전세로 옮겨야만 했다. 초등학생 아들이 “우리 아파트로 가고 싶다”고 떼를 쓸 때마다 김 부장은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해 잠시 옮겨 산다”며 달래야 했다. 김 부장은 “1년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지금도 꿈을 꾸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씩이나 한다. 꿈에서 깨어나 행복했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법 대부업자들이 화이트칼라와 중산층까지 파고들고 있다. 과거 유흥업소 종업원과 재래시장 상인 등 일부 계층 사람들의 전유물이던 사채와 불법 대부가 이젠 평범한 사람들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화이트칼라와 중산층은 길거리에서, 케이블TV에서, 지하철에서 대부업체 광고를 접한다. 여기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와 스팸메일을 받는다. “미소금융 캐피탈입니다. 사업자·회사원·주부·대학생 당일 1천만원까지 승인 가능하십니다.” ‘미소금융’ ‘신한금융’ ‘하나금융’ ‘우리금융’ 등 유명 금융회사와 똑같은 짝퉁 이름으로 고객을 유혹한다.
심지어 대출업자들은 대통령에게까지 대출을 권한다. 한 대부업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4월 국무회의를 주재하다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런데 문자메시지가 ‘최저 이율 대출’이라는 대부업체의 스팸 문자메시지였다. 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얘기를 했고, 검찰·경찰·금융감독원이 대부업체 합동 단속에 나서는 등 부산을 떨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고 말했다.
성인 5명 중 1명이 제1금융권 대출 못 받아지난해 말께 우리나라 최대 대부업체 회장에게도 “싸게 대출받으세요”라는 은밀한 유혹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부업체 회장이 한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대부업체 회장이 기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뒤 전화를 받았는데 “싼 대출 받으세요”였다.
대통령과 대부업체 회장이 이런 전화를 받고 대출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전화를 받고 돈을 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중산층, 서민, 자영업자 등이다. 사채업자와 불법 대부업자들은 이들에게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을 한다. 서민에게 무차별로 돈을 빌려준 뒤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더 큰 빚의 덫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빚의 덫에 걸려들수록 이들은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 미국발 금융위기도 마찬가지였다. 대출기관들이 흑인이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불건전한 대출 방식의 영업을 키워온 결과가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였다.
우리나라의 사금융은 1997년 외환위기 뒤 폭발적으로 커졌다. 은행 등 제1금융권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문턱을 크게 높였다. 아파트·주택과 같은 담보가 없을 경우, 금융회사들은 대출에 극히 보수적으로 변해갔다. 제도권 금융기관을 이용하지 못하는 금융소외자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담보가 없는 서민,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은 돈을 빌리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2009년 5월 현재 신용등급 7등급 이하 금융소외자가 827만 명에 이른다. 성인 5명 가운데 1명은 제도 금융기관의 문턱에 들어설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결국 서민들은 생계비나 병원비 등 긴급한 자금 수요가 발생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제도권 금리보다 수십 배 높은 고리 사채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일수대출(매일 조금씩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가는 대출 방식)은 보통 100만원을 빌려준 뒤 하루에 1만2천원씩 100일 동안 120만원을 갚도록 한다. 원리금 상환 방식으로 이자율을 계산하면 연 136.2%에 이른다. 월변대출(매월 이자를 갚다가 원금을 일시 상환하는 방식)은 보통 100만원을 빌려 준 뒤 한 달에 이자로 10만원을 받는데 이는 연 120% 금리다. 급전대출(원금과 이자를 10일 안에 상환하도록 하는 방식)은 100만원에서 선이자 10만원을 떼어낸 90만원을 빌려준 뒤 10일 뒤에 100만원을 갚게 하는 조건인데, 이는 연 405.55%에 이른다.
사금융 이용자 69.5%가 1천만원 미만 대출2008년 현재 대부업체 이용자 규모는 189만여 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5.4%에 이른다. 2007년 재정경제부가 전국 1만7539개 등록업체를 대상으로 설문지를 돌려 조사한 결과를 보면, 사금융 이용자 중 69.5%가 1천만원 미만의 금액을 빌렸으며, 또 대부업체를 이용하는 이유는 대부분 교육·의료 등 급전의 필요와 사업 실패, 실직 등 경제력 약화 때문이다.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기 곤란한 저신용자층인 신용등급 6등급 이하가 80% 이상이다(그래프 참조).
서민들을 울리는 건 고리뿐만이 아니다. 불법적으로 받는 중개수수료는 서민의 등을 치고 있다. 고리 이자에다 수수료까지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법 중개업자들은 대출이 성사되면 대출받는 사람에게 진행비 명목으로 대출금액의 5~16% 정도의 수수료를 받아 챙긴다. 미등록 대부중개업자들은 자신들에게 대출을 문의하는 서민이 시중은행에서 대출을 받기가 어렵다는 점을 악용해 ○○저축은행, ○○캐피탈 등 금융기관을 사칭하기도 한다.
기자의 휴대전화에 들어온 문자메시지에 찍힌 대출업체에 전화를 걸어 중개수수료를 받는지 확인해봤다. 대부분 수수료를 요구했다. 일부 업체는 수수료를 깎아준다는 말까지 했다. “수수료는 보통 대출금액의 20%로 받는데 15%로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수수료를 받는 것은 불법이다.
수수료를 왜 받는지 물어보니, “고객의 신용을 일시적으로 올리려면 로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부대 경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고객 신용으로 안 되는 것을 금융권에 부탁하는 데 비용이 들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답했다.
질이 나쁜 대부중개 브로커들은 대출을 미끼로 사기까지 친다. 지난해 김아무개(44)씨는 생활정보지에서 대출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5천만원을 즉시 대출해준다는 광고였다. 전화를 거니, 업체 사람은 수수료로 250만원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김씨가 250만원을 보낸 뒤 연락해보니, 수수료를 250만원 더 보내면 최대 1억원까지 빌릴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250만원을 더 보내 모두 500만원을 입금했다. 대부업체는 다음날 대출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날, 그 다음날이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김씨가 다시 연락했지만 대부업자들이 도주한 뒤였다.
지난해 1~9월 한국대부금융협회에 접수된 생활정보지 대출 광고 피해는 419건으로, 유형별로는 법정 이율을 초과한 고금리 52%, 대출 중개 뒤 알선 수수료 갈취 행위 32%, 대출 작업비 입금 뒤 잠적 등 대출 사기 16% 차례였다.
고금리 불법 사금융은 채무자에 대한 협박, 폭행, 성매매 강요 등으로 이어진다. 이아무개(26)씨도 불법 사금융의 덫에 걸린 사람이다. 이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학습지 교사를 했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이씨는 학습지 교사 생활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이씨는 대학 때 받은 학자금 대출 이자까지 내야 했다. 이씨는 학자금 대출 이자와 생활비 등을 신용카드로 충당했고, 그 뒤 카드 돌려막기가 이어졌다. 결국 이씨는 불법 대부업자에게 손을 벌렸다. 이씨는 한 대부업자에게 300만원을 빌려 생활비와 이자를 갚았다. 하지만 300만원의 빚은 이자를 낳고, 이자가 이자를 낳고, 그 이자가 또 이자를 낳았다. 1년 만에 그는 대부업체 15군데에 모두 7천만원가량의 빚을 지게 됐다. 이씨가 돈을 갚지 못하자, 한 대부업자는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아라”며 그를 유흥업소에 넘겨버렸다. 그 뒤 그는 유흥업소에서 일해야 했다.
김효영 법무사무소의 손미자 실장은 “상당수 채무자들은 불법 추심을 당하더라도 ‘돈 빌린 내가 죄인이지’라며 포기하거나 순응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파산·면책자들의 경제활동 진입과 재활을 돕기 위한 실질적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성목 금융감독원 서민금융지원실 부국장은 “빚을 진 사람에게 빚을 갚으라고 대출해주더라도 효과가 높지 않다. 오히려 불법적이고 강제적인 빚은 털고 나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법원의 개인회생·파산 절차의 문턱을 낮추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 탤런트 안재환씨의 자살에 사채 문제가 얽혀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대부업체들의 불법 행위가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조 부국장은 “고금리와 불법 추심을 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 데 그쳐 처벌 규정이 약한 편”이라며 “좀더 처벌 수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불법 사금융 문제는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로 이어진다. 불법 사금융은 소비 감소, 성장잠재력의 저하, 금융시장 불안정이라는 파생 문제를 낳고 있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미소금융(마이크로크레디트), 소기업인·저신용 개인대출 사업 등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대부업으로 인한 피해로 여론이 들끓을 때마다 단속에 나섰지만 미봉책으로 그쳤다. 감독 시스템이 뒤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전국에 흩어진 수만에 이르는 사채업자와 불법 대부업자들의 불법 채권 추심, 약탈적 대출, 허위 광고 등의 폐해를 단속하기란 어려운 현실이었다.
지난해 12월15일 문을 연 미소금융은 저신용·저소득 서민층에게 4.5%의 낮은 이자로 창업자금을 대출해주고 있다. 하지만 시행 한 달째 대출 실적은 극히 부진하다. 신청자 1만3400명 가운데 2400여 명이 대출 적격자로 분류됐고, 이 중 실제 대출자는 30명에 그쳤다. 대출 심사가 지나치게 까다롭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서라고 미소금융 쪽은 해명했다. 그러나 서민들은 미소금융 문턱이 은행보다 더 높다고 말한다. 탁상 심사에 의존하는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대출 자격을 완화하되 사후 관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대부업법 개정안잿밥에만 관심 있는 서민 금융기관들도 문제다. 저축은행·신협·새마을금고 등은 서민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있다. 저축은행의 경우 현재 부동산 관련 대출이 전체의 50%를 넘는 현실은 분명 서민 금융기관의 본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정부가 협동조합·새마을금고 등을 통해 서민 대출을 유도해야 한다는 지적이 거세다.
불법 대부업체의 관리·감독은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해야 하지만,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이에 대한 법안도 국회에 제출된 상황이지만 정치적 이슈에 묻혀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히고 있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은 대부업 관리·감독 체계를 현재의 지방자치단체에서 금융위원회로 일원화해 강화하고 미등록 대부업체의 불법 광고를 금지하는 내용의 대부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서민의 등을 치는 불법 사금융을 바로잡으려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살인적 고금리를 낮춰야 한다는 얘기다. 대부업법상의 제한금리를 현행 49%에서 30%로 정도로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송태경 민생연대 사무처장은 “일본은 1981년 이자율 상한선이 연 109.5%나 됐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대부업체 이자상한을 2000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29.2%로 낮춰왔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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