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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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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됐다는 호도에 동의할 수 없다”


용산 참사 유족 편에서 투쟁 이끌고 경찰 출두 앞둔 이종회·남경남·박래군씨
“진실 드러나려면 아직 멀었다”
등록 2010-01-15 11:32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638F03">이른바 ‘타결’로 용산 참사 민간인 희생자 5명은 냉동고에서 흙 속 관으로 몸을 옮겨 뉘었다. 참사의 진실도 함께 어둠 속으로 침잠할지 아니면 밝은 햇살을 쐴 수 있을지는 이제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타들어가던 향이 뿌리를 드러낼 즈음,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에서 투쟁을 주도하다 수배된 ‘용산 지도부’ 3명은 농성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10개월이 넘는 동안 서울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과 명동성당에서 사실상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해온 그들은 이제 경찰에 출두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해방의 절차를 밟게 된다. 남경남 전국철거민연합(전철련) 의장과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은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이종회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를 1월6일 명동성당에서 만났다. 이들에게서는 오랜 수배 생활에서 오는 피로감, 희생자들의 장례를 치르게 됐다는 안도감, 진실 규명의 숙제를 남겨뒀다는 부담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font>
지난한 투쟁을 이끌고 오랜 수배 생활을 겪었음에도 이종회·남경남·박래군(왼쪽부터)씨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유례없는 폭설이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지만, 용산참사로 드러난 재개발의 생채기는 아물기 힘들 것이다.

지난한 투쟁을 이끌고 오랜 수배 생활을 겪었음에도 이종회·남경남·박래군(왼쪽부터)씨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유례없는 폭설이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지만, 용산참사로 드러난 재개발의 생채기는 아물기 힘들 것이다.

<font color="#006699"> -1년 가까운 투쟁을 일단 접는다. 스스로 평가한다면?</font>

남경남 그동안 철거민 하면 자기 경제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으로 치부돼왔다. 한쪽에선 고립된 투쟁을 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철거민 투쟁은 잘못된 개발정책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이런 참사는 정부가 건설자본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알려졌다.

박래군 범대위가 지치지 않고 싸워왔다. 유가족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철련의 연대의 힘도 있다. 그리고 종교인의 힘, 이런 것들이 모여 여기까지 왔다. 범대위 구성 단체들도 1년이라는 싸움 기간에 진짜 어려웠다. 예전에는 범국민대책위가 만들어지면 여섯 달 이상 가기 힘들었다. 초반 페이스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정부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내고 부족하지만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종회 정부와 경찰은 초기부터 공격적인 방어를 했다. 우리와 대중을 유리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정한 고립 과정이 있었다. 사제단이 그걸 넘어서는 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지난해 6·10 항쟁 22주년을 앞뒤로 시국선언이 잇따르면서 확장의 시간이 있었다. 그 힘이 지금까지 왔다. 시신이 냉동고에 있어서 저들도 우리도 부담이었다. 진상 규명과 미공개 수사기록 3천 쪽의 규명이 안 된 것은 숙제로 안고 갈 수밖에 없다.

<font color="#006699"> -이번 합의 내용에 만족하는가.</font>

박래군 100% 만족하겠나. 장례를 치르기 위한 협상이 타결된 것일 뿐이다. 앞으로 몇 개의 산을 넘어야 할지 모른다. ‘용산 참사 해결’은 아니다. 아직 진실이 드러나려면 멀었다. 근본 원인인 재개발 문제를 수정해야 한다. 해결로 호도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 표현상 미흡하지만, 총리로서 책임을 인정한 것은 진전으로 봐야 한다. 사인 간의 문제라고 계속 고집했다면 총리로서 책임을 얘기할 수 없다. 테러리스트로 매도된 다섯 분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종회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

이종회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

남경남 전철련은 ‘선 대책, 후 철거’를 전제한 순환식 개발을 위해 임대상가를 요구했고, 그동안 (다른 지역에서는) 비공개적으로 받아냈다. 이번 협상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큰 쟁점이었다. 정부는 법에 없으니 해줄 수 없다고 버텼다. 끝내 임대상가 문제는 이후에 법적으로 제도화할 때 용산 4구역에 소급 적용할 수 있도록 시와 구가 노력한다는 정도로 합의했다.

이종회 유족 보상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면 일찍 할 수 있었다. 1년을 끈 건 순환식 개발을 제도적으로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만들어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임시상가를 내놓지 않으면 타결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합의 내용에 임시상가와 공공 임대상가 제도를 이후에 만드는 것으로, 숙제로 남겨놨다. 이번 합의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font color="#638F03"> 이번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장기 과제로 남게 됐다. 유족들의 가장 큰 불만이다. 범대위 지도부는 그동안의 태도를 볼 때 이명박 정권에서 이 문제를 풀기는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마냥 장례를 미룰 수는 없었다고 했다. 박래군 위원장은 “최소 조건이 어느 정도 충족됐으니 장례를 치르자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font><font color="#006699">-총리 사과문 내용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기 전에 합의 사실이 발표되는 등 협상이 미숙했던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font>

이종회 12월25∼26일까지만 해도 타결된다는 소식은 종교·정치권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음은 날아다니는데 현찰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해가 가기 전에 타결돼야 한다는 뭔가가 저쪽에 있지 않았나 싶다. 막판에 집중적인 협상을 했다. 정부가 1차로 사과문을 갖고 온 뒤 주고받기를 계속했다. (타결이 발표된) 12월30일 아침 6시30분 정도까지 철야 협상을 했다. (총리 사과 문구의) 대답 주체는 총리실이고 협상 주체는 서울시였다. 막판에 우리가 보낸 안에 대한 대답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시와 협의할 부분은 타결된 것이고 (총리실 대답이) 와야 하니까 2시에 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다 아침에 등에서 보도가 돼버렸다. 콕 집어서 보자면 아쉬움이 있다.

<font color="#006699"> -유족들이 합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황에서 발표가 된 건 문제 아닌가.</font>

박래군 우리가 내용을 공유하지 않고 갈 수 있겠나. 협상이 미숙한 게 아니라, 지금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나름의 방법을 동원해 유리하게 끌고 왔다. 그래서 유가족에게 설명할 단계에서는 충분히 설명했다. 내용을 어떻게 담을지 충분히 얘기했다. 협상의 각 단계마다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런 목표로 가겠다는 것도 동의를 받고 충분히 설명했다. 유족과 얘기했던 목표치에 접근했으니까 타결한 것이다. 모든 협상이 마지막으로 갈수록 긴박해진다. 위임받은 사람이 욕먹을 수 있다.

남경남 전철련 의장

남경남 전철련 의장

<font color="#006699"> -참사 전인 2008년 촛불집회와 참사 뒤인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의 시민 열기에 비해 용산 참사는 외면받은 것 같다. 이유가 뭐라고 보는가.</font>

박래군 전철련이 해서 그런가 보다. (웃음) 이번 참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에 대한 공분과 유족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 여기까지면 광장에서 추도할 힘이 될 것이다. 막는 게 있었다. 용산은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도록 요구한다는 것이다. 재개발로 인해 내가 수혜자가 될 수 있는데, 재개발이 잘못된 것이고 전면적으로 바꾸라는 요구를, 자기의 욕망을 접고 흔쾌히 동의하면서 연대하겠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게 아니냐. 이 때문에 맘껏 애도할 수 없는 분위기로 간 게 아닌가 싶다. 이명박 정부가 용산을 고립시키려 한 것도 작용했다.

이종회 용산도 초기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초반에는 1만 명 가까이 모이다가 2~3주를 거치면서 무너진 과정이 있다.

남경남 2008년 촛불 정국이 어느 정도 식은 다음에 정권의 탄압이 기술적이고 교묘했다. 그 후유증도 있다. 용산의 경우 각계각층에서 다양하고 많은 성금이 들어왔다. 그 힘이 용산을 지탱해줬는지 모르겠다. 시민들이 직접 오지는 못했으나 마음속으로는 많이 결합했다.

<font color="#638F03"> 이들은 참사 초기 범대위를 꾸릴 당시 한두 주 뒤면 해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략과 전술도 없이 1년 가까이 범대위를 꾸려오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범대위의 ‘정권 퇴진’ 구호에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결합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가면서 어려움은 가중됐다. 현장의 문제를 정책적으로 풀어가기에 시민사회의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도 절감했다.</font><font color="#006699"> -일부에서는 범대위가 철거민의 죽음을 볼모로 정치투쟁을 한 게 아니냐는 비난도 한다.</font>

박래군 그러면 모든 게 정치투쟁이다. 악의적인 비난을 할 때 그런 말을 쓴다. 시신을 볼모로 돈을 더 뜯으려고 했다는 얘기인데, 강경 진압에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책임자를 처벌했으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억울한 죽음을 앞에 놓고 무조건 돈만 받고 장례를 치를 수는 없었다. 정치투쟁화된 것은 정부가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비난할 문제가 아니다.

남경남 투쟁 자체가 정치적이다. 철거민들이 주거권을 보장하라고 외치자 결국 임대주택 제도가 도입됐다. 용산 철거민은 순전한 생계대책 때문에 망루에 올랐다. 몇 시간 만에 특공대를 투입해 진압작전을 했다. 이건 정치적인 게 아닌가. 그들은 건설자본과 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보고 정치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font color="#006699"> -투쟁이 길었다.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나.</font>

남경남 현장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게 가장 괴로웠다. 순천향대병원에 갇혀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을 보며 무능하다는 생각이 든 게 어려웠다. 철거민들은 잡혀가고 구속되는데, 나는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이종회 박 위원장과 나, 둘이 병원에 들어가 있으니, 저쪽에는 수배자지만 내부적으로는 인질이 됐다. 내가 별로 한 게 없다. 하는 건 없이 정치적 부담을 안아야 했다. 갈수록 현장 감각이 떨어지는 것도 힘들었다. 상황실 멤버들에게서 세상 물정 모른다고 타박을 많이 받았다.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기도 했다.

박래군 유족과 신부님들이 경찰에 폭행당할 때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대면해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갑갑했다. 지도부 아닌 지도부가 돼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힘들었다. 갇혀 있다 보니 (장애인) 시설 생활인들의 문제점을 절절하게 체득했다.

<font color="#006699"> 이제 범대위와 전철련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font>

박래군 우리가 경찰에 출두하고 장례를 치른 뒤에 본격적으로 얘기해야 할 것이다.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재개발 정책 전환 싸움은 계속해야 한다는 합의가 있다. 대책위를 상설 기구로 전환해야 한다는 얘기도 돼 있다.

이종회 장례를 지내고 1월20일 1주기 행사 즈음이면 안이 나올 것이다.

남경남 범대위가 해체되고 진상 규명과 개발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한 새 조직이 결성되면 전철련도 적극적으로 함께할 것이다. 살인적 개발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철련도 사라질 수 없다.

<font color="#638F03">좌담 도중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은 이충연 용산4구역 세입자대책위 위원장이 장례식 참석을 위해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는 소식이 홍석만 범대위 대변인을 통해 들렸다. 다음날 신문엔 그가 어머니 전재숙씨와 눈물의 포옹을 하는 사진이 실렸다. 그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다시 서울구치소로 돌아가 항소심 재판을 맞아야 한다. 비슷한 시각, 용산 지도부 3명도 경찰서에 출두해야 한다. ‘용산’은 끝나지 않았다.</font>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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