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정부 부처 일부가 공간적으로 분리되게 된 것은 업무 효율상 매우 불합리한 결과이며,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정부 부처를 일부 떼어서 남겨놓고 일부 옮겨오고 공무원들이 나중에 서류 보따리 들고 여의도 국회까지 왔다갔다 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위의 발언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를 두고 한 유력 정치인이 한 말이다. 누구일까?
①노무현 ②이명박 ③정운찬 ④이회창.
정부의 행정이나 국회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비효율을 강조한 것으로 봤을 때 역시 ②번이나 ③번? 아니면 애초에 행정수도를 반대하다가 이번에 행정도시로 돌아선 ④번? 그러나 의외로 답은 ①번이다. 행정수도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고, 행정수도 정책이 좌절되자 이를 행정도시 정책으로 다시 추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먼저 행정도시의 행정 비효율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행정수도 좌절’이 비효율의 뿌리
물론 노 전 대통령이 행정 비효율을 지적한 배경은 최근 행정도시 백지화 방침으로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 이명박 대통령이나 정운찬 국무총리의 취지와는 정반대다. 노 전 대통령은 행정도시에 행정부의 3분의 2(9부2처2청)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와 행정부 전체, 나아가 국회까지 옮기기를 바랐다. 그래야 행정 비효율이 일어나지 않고 지역 균형발전의 효과도 더 강력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2007년 7월20일 충남 연기군에서 열린 행정도시 기공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균형발전이 수도권과 지방 모두의 경쟁력을 함께 높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행정수도가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축소돼버린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꼭 행정수도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정부 부처는 모두 이곳으로 오는 게 순리입니다. 청와대도 그 좋은 녹지를 서울 시민에게 돌려주고 이곳에 와서 자리 잡는 것이 순리입니다. 국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과 총리가 합작으로 행정도시 백지화를 주도하는 마당에 이런 과거의 이야기는 덧없다. 9부2처2청의 이전마저 물거품이 될 듯한 상황에서 청와대나 국회의 이전은 현실성이 적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행정도시 논란의 와중에서 노 전 대통령이 애초 추진했던 온전한 수도 이전을 다시 추진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런 주장의 포문은 학자들이 신문 기고 등을 통해 열어젖혔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2004년 헌법재판소는 수도 이전을 위헌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수도 이전을 헌법 개정이 아닌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제정으로 추진하는 것을 위헌으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헌법을 개정해 수도 이전을 추진하면 된다는 것이 박 교수의 논리다. 특히 박 교수는 청와대와 행정부 전체, 그리고 국회까지 세종시로 옮기면 이명박 정부가 제기하는 행정 비효율이나 자족성 부족 문제가 일거에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형기 경북대 교수(경제통상학부)도 행정도시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은 애초에 추진했던 행정수도로 다시 추진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한나라당과 보수 세력의 반대로 행정수도가 행정도시로 축소됐는데, 이제 와서 한나라당에서는 ‘행정부 전체나 국회까지 가면 몰라도 행정도시는 비효율적이라서 안 된다’고 말한다”며 “그렇다면 진보 세력도 행정도시가 아니라 행정수도로 다시 논의하자고 받아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11월27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국회가 (세종시로) 가면 모르겠다. (그러나) 국회가 서울에 있으면 장·차관과 국장이 1년에 7~8개월을 국회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운찬 총리도 2009년 12월19일 청주를 방문해 “차라리 수도를 다 옮기면 옮겼지 행정부의 일부를 옮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장 좋은 것은 현재대로 있는 것이고, 수도 이전은 그다음”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행정부 전체나 국회까지 세종시로 옮기자는 주장이 민주당에서 먼저 나왔다. 2009년 12월7일 강운태 민주당 의원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질의에서 “지난달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이 대통령이 ‘국회까지 이전하면 모르겠다’고 했는데, 국회가 세종시로 가면 원안대로 추진하겠느냐”고 정 총리에게 질문했다. 이에 정 총리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짧게 대답했다. 강 의원은 이 문제와 관련해 “국회의원도 절대다수가 지역구를 가졌는데, 세종시로 가면 의원들이 국회와 지역을 오가는 일도 훨씬 수월해진다”며 “궁극적으로 행정부와 국회가 세종시로 가는 것이 국민과 공무원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행정 비효율 문제와 관련해 공무원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도 ‘국회와의 관계’였다. 2005년 10월 정부가 공무원 37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행정도시 건설로 가장 우려되는 효율성 문제는 당정회의 참석(난도 3.43)과 국회와의 업무(3.42)였다. 이것은 공무원들에게 청와대(3.2)나 대통령(3.14)과의 업무보다 더 큰 문제였고, 대사관·국제기구(3.01), 다른 부처(2.99), 기업(2.79), 시민단체(2.78)와의 업무보다 훨씬 심각했다.
이 대통령도 “국회까지 가면 모를까”
심지어 충청권의 한나라당 소속 광역자치단체장들도 행정부 전체나 국회까지 세종시에 옮기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박성효 대전시장은 여러 차례 “중앙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행정의 비효율이 문제라면 국회 역시 세종시로 옮기면 된다”며 “대통령도 행정 공무원들이 국회에 가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는데, 입법부와 행정부를 묶어두는 것은 대승적 개념에서도 옳은 일”이라고 말했다. 정우택 충북지사도 기자의 질문에 “소신은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추진했던, 청와대와 전체 행정부를 모두 옮기는 행정수도 건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청와대와 국회를 포함한 행정도시 확대, 즉 행정수도 재추진 방안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다수 의견은 아직 어렵다는 것이다. 먼저 현재 국회 의석의 절반을 넘는 한나라당의 존재가 가장 큰 장벽이다. 비록 한나라당 안에 행정도시 원안 추진을 지지하는 박근혜계 의원들의 수가 50석가량 되지만, 이들이 청와대와 국회까지 세종시로 이전한다는 ‘혁명적 방안’에 동의할 것으로는 기대하기 어렵다.
개헌 필요·여권 반발 등 장벽 커
강운태 민주당 의원은 “청와대와 국회까지 모두 옮기려면 정부가 나서서 청와대와 나머지 행정부도 가고 국회까지 가면 어떻겠느냐고 국민에게 물어야 한다”며 “현실적으로 대통령이 결심하지 않으면 추진하기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데, 쥐는 달 수 없고 고양이가 스스로 달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장벽은 2004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과 국회 등의 소재지인 수도는 관습헌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관습헌법을 고치려면 성문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로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위헌으로 결정했다. 따라서 청와대와 국회를 세종시로 옮기려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해 기존 결정을 번복하게 하거나, 지난번 결정 취지에 따라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런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04년 헌재가 관습헌법이라는 무리한 논리로 국가의 중요 정책을 위헌으로 결정한 일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라면서도 “이 결정에 따르면 국회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그 소재지를 옮기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당장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이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현출 입법조사처 정치의회팀장은 “국회 이전을 헌법 사항으로 보고 반드시 개헌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통과시키면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며 “입법조사처가 국회의 세종시 이전이 합헌인지 위헌인지를 판단하기는 곤란하다”고 밝혔다.
따라서 행정도시와 균형발전 정책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은 이 문제와 관련해 점진론 또는 단계론을 펴고 있다. 일단 행정도시 원안을 추진하고, 장기적으로 이를 교두보 삼아 청와대와 국회까지 끌어들여야 한다는 복안이다.
안성호 대전대 교수(행정학부)는 “행정부와 입법부 등 수도 기능을 모두 세종시로 옮기는 것이 모든 측면에서 가장 바람직하다”면서도 “행정도시 정책은 수많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뤄진 것이어서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안 교수는 “일단 원안대로 가되 장기적으로 청와대나 입법부가 옮길 수 있도록 충분한 여지를 둬야 할 것”이라며 “한국의 민주주의가 다시 발전할 수 있다면 수도 전체를 세종시로 옮기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다시 발전한다면 가능한 일”
권용우 성신여대 교수(지리학과)도 “이명박 정부에서는 제대로 추진이 안 되겠지만, 세종시 건설은 국민과 국회가 모두 합의한 사안이므로 정치 상황이 나아지면 청와대와 국회까지도 모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창수 자유선진당 의원은 “행정도시법에 따라 총리실과 9부2처2청이 먼저 가면 자연스럽게 청와대나 나머지 부처, 국회까지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며 “문제를 길게 보고 점진적으로 풀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규원 기자·김경욱 기자 한겨레 지역부문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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