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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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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강을 건너 바다로 전진하자”

민주노총 임시 대의원대회 전야 행사 참관기…
별빛 아래 봇물 이룬 뼈아픈 성찰과 혁신 촉구 목소리
등록 2009-09-18 11:23 수정 2020-05-03 04:25

“당구 점수 ‘물 200’, 임성규 민주노총위원장을 소개합니다.” “와∼.” 의자에 앉아 있던 ‘동지들’ 500여 명의 박수 소리가 교육관 실내에 울려퍼졌다. “물불 업는 무한질주, 신승철 사무총장입니다. 금속노조 정갑득 위원장입니다.” ‘이명박 독재에 맞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반기 총력투쟁 승리!’라는 슬로건이 선명한 플래카드 아래서 간부 소개가 계속됐다. “이분한테 잘못 걸리면 큰일납니다. 여성연맹 이찬배 위원장입니다.” “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9월11일 충북 충주시 충주리조트에서 열리고 있다. 오른쪽 위는 임성규 민주노총위원장.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9월11일 충북 충주시 충주리조트에서 열리고 있다. 오른쪽 위는 임성규 민주노총위원장.

“우리는 지금 가장 어려운 시기에 1박2일 대의원대회 겸 수련회를 갖고 있습니다. 내일 대의원대회가 유회되더라도 괜찮습니다. 자성하고 분기탱천할 기회로 삼읍시다. ‘민주노총’, 없어질 수 있습니다. 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은 더 힘을 내고 더 큰 바다로 전진해야 합니다. 민주노총이란 형식이 무너지는 것을 무서워하지 맙시다. 내용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합시다.”(임성규 위원장)

“위기는 바로 우리 자신 속에 있다”

‘꽃다지’의 축하 노래가 초가을 저녁 밤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서로 손을 잡고 흔들며 을 불렀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도중에 꽃다지가 말했다. “다들 민주노총이 위기라고 말합니다. 위기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답도 우리 스스로에게 있을 겁니다.” 노래는 더욱 커졌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이 더 아름다울 수 있게∼.”

지난 9월10일 충북 충주시 충주호리조트. 대공장·중소 공장·병원·증권회사·학교·언론·건설현장·철도·연구원·할인점·세종로 정부청사…. 전국 각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의원 500여 명이 한자리에 집결했다. 누구는 파업 조끼를 입고, 누구는 운동복 차림이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대의원도 왔다. 임 위원장은 노래가 끝나자 장내에 찬물을 끼얹었다.

“부서뜨려야 할 민주노총의 관행, 당장은 못 부서뜨리더라도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초심으로 되돌아가는 기풍을 만들어봅시다. 평택역에서 쌍용차 공장을 향해 조합원들과 행진할 때 위원장으로서 이렇게 비참한 날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올해 딱 한 번 총파업을 소집했습니다. 불법 파업이므로 지도부 사법처리 하겠다, 정부로부터 이런 말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 흔한 정부 공안대책회의 한 번 안 열렸습니다. 이렇게 민주노총이 무시당하는 기분, 비참함이 더했습니다.”

대의원 모두 얼굴이 굳어 있었다. 민주노총의 ‘임원 직선제 유예’가 최대 쟁점 안건으로 상정된 이날 대의원대회장에서 중앙일간지·방송사의 취재진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말 터져나온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 사건, 지난 7월 민주노총 산하 사업장 중 조합원 규모 3위였던 KT노조의 탈퇴, 이어 9월8일 쌍용차 노조의 탈퇴, 다음날 에 선정적인 제목을 달고 대서특필된 “쌍용차 노조, 민주노총을 ‘해고’하다”라는 1면 머리기사. 이미 지난 3월 노동운동의 위기를 진단하는 혁신 대토론회에서는 “암덩어리가 온몸으로 퍼져 더 이상 구제할 길이 없다. 민주노총은 사망을 준비해야 한다” “이제 헌 집을 부수고 새집을 지어야 한다” “많은 문제를 정권과 자본의 탓으로만 돌린 채 자기성찰을 외면하고 있다” 등의 불만이 표출됐다. 위기 속에서 또 위기가 터지고, 그야말로 위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일까?

무엇인가 할 말들은 많아도 대의원 모두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사실 총파업 남발, 집행부의 관료화, 고질적인 정파조직 문제 등 위기의 원인과 처방을 모르는 대의원은 없었다. 뭔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 누구는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누구는 하늘을 쳐다보고 누구는 턱을 괴고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권영길 초대 위원장 “처음으로 돌아가야”

어느새 밤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민주노총 지도위원들이 연단에 섰다.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점차 톤이 고조되는 특유의 반복 어법으로 한마디 던졌다.

“저들은 민주노총의 숨통을 끊어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끊어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아니 숨통이 이미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습니다. 아직 힘이 있습니다. 1천만 노동자의 구심 민주노총, 살려낼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90년대 초 전노협(전국노동조합대표자협의회) 시기, 그때는 제발 이 땅에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조 하나 세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때는 너와 내가 없었습니다. 민주노총을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동지들이 몸을 던졌고 일터에서 쫓겨나고 수배당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껍데기 민주노총이 아니라 진정한 희망이 됩시다. 여러분들이 희망입니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무언가 시원하지 않은, 어정쩡한 박수 소리가 강바람을 타고 밤하늘에 퍼졌다.

“제도권에 10명의 국회의원을 만들어낸 주체가 바로 민주노총”(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이지만, 지금 민주노총은 현장 조합원들로부터 불신과 비판을 받을 뿐이었다. 뼈아픈 성찰을 촉구하는 발언은 그칠 줄 몰랐다.

“쌍용차 조합원들이 입은 타격에 대해 과연 얼마나 진정으로 서로 토론하고 있습니까? 전노협 초기, 조직도 없고 돈도 없고 그런 시절에 우리 활동가들은 한 달 5만원도 못 받고 현장을 누볐습니다. 물론 변한 시대에는 변한 조건만큼 맞춰서 활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탄압에 의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을 깎아먹으면서 야위어 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말 가슴에 새로운 칼을 품고 다시 해봅시다.”(임 위원장)

이용길 진보신당 부대표는 “식지 않은 애정으로” 대의원들에게 당부했다. 그는 “내 나이 쉰을 넘었지만, 10여 년 전 민주노총 대전충남본부의 젊은 활동가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며 진보 정당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촉구했다.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는 대의원 당신들에게 달려 있다.” 9월11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한 대의원이 질문을 하고 있다.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는 대의원 당신들에게 달려 있다.” 9월11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한 대의원이 질문을 하고 있다.

‘혁신’과 ‘단결’이란 단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사회자인 이준용 민주노총 사무차장이 분위기 반전을 꾀했다. “지금 공무원노조 동지들이 사고를 쳤습니다. 쌍용차 동지들에게 4천만원을 모아 전달하겠다고 합니다.” 공무원노조위원장과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연단에서 서로 끌어안고 포옹했다. 와∼, 모처럼 큰 박수가 다시 터져나왔다.

쌍용차 조합원에 4천만원 전달하자 환성

그것도 잠시뿐, 분위기는 다시 수그러들었다. 임 위원장이 특별히 전할 말이 있다며 다시 단상에 올랐다.

“우리는 간부 성폭력 사건을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 조합원들은 대공장 조직이, 산별연맹 조직이, 또 민주노총 중앙이 서로 민주노총 장악 패권만 노리고 있다고 여깁니다. 대중은 민주노총이 만날 정치투쟁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혁신을 주장하는데, 혁신 대상인 사람들이 그렇게 장황하고 멋지게 혁신을 말하는 걸 보면서 나는 놀랐습니다. 위선과 가식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대의원 한두 명이 도중에 박수를 쳤다. 그러나 박수는 이어지지 못하고 끊겼다. 모두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분위기를 띄우려고 이준용 사무차장이 다시 나섰다. “각 산별·연맹별 조직담당자들은 지금 손바닥에 불나도록 휴대폰을 걸어서 약속한 수만큼 대의원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독려합시다. 자, 바깥에 맥주 20만cc가 준비돼 있습니다. 대의원 여러분, 투쟁도 즐겁게 합시다.”

늦은 밤. ‘노동운동의 미래를 기획하는자, 바로 당신!’이란 슬로건을 내건 가운데 충주호반에서 청년 대의원, 아줌마 대의원, 중년 대의원, 앳된 아가씨 대의원 그리고 환갑을 넘긴 듯한 대의원 모두가 한데 어울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함께 살자! 국민생존-총고용 보장’이란 큼지막한 구호가 적힌 조끼를 입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도 술을 걸치며 모처럼 잠깐 웃었다. 모두가 동지로 뭉쳤고, 민주노총 조직이 출범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지만 강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먹는 건 그래도 즐거웠다. 조직담당자들은 희미한 불빛 아래 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부리나케 휴대전화를 누르고 있었다. “자, 1시간 동안 알코올을 섭취했으니 이제는 정세가 변화되었죠!” 누군가 연단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위기론’ 때문에 착 가라앉았던 ‘정세’는 갑자기 돌변했다. 돌아가면서 파도타기가 시작됐다.

임원 직선제 유예안 놓고 논란

노동자들은 테이블마다 대여섯 명씩 조를 이뤄 술을 마시며 안주를 씹으며 민주노총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민주노총의 조직 현실에 대한 분임 토론이 진행됐다. 어느 팀은 진지하게 토론하고, 어느 팀은 노래를 부르고, 어느 팀은 술만 잔뜩 마셔댔다. “민주노총은 우리 조직이잖아. 우리가 키워가야 할 조직이잖아.” 어느 여성 조합원은 목소리가 벌써 잠겨 있었다. “집행부가 직선제를 왜 지금 내놓고 있느냐 말이야. 이런 판국에 직선제 해서 잘되겠냐고?” 여러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섞였다. 누구는 위기를, 누구는 이명박 정권을, 그리고 누구는 어느 조합원의 자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애가 몇 살이야?” 가족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큰 주먹 움켜쥐고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과 연대를 얘기하는 늙은 노동자도 거기 있었다. 모두 일하는 노동자였다.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가며∼.” 노래 이 끝나자 5초간 함성이 발사됐다. 함성은 여기저기 담배 연기와 함께 어디론가 퍼져나갔다. “우리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민주노총, 만만한 조직이 아닙니다.” 주봉희 민주노총부의원장이 연단에 섰다. 오래전 선봉에 섰다가 경찰 방패에 찍혀 이빨 여덟 개가 날아간 뒤로 말을 할 때면 틀니 때문에 꼭 술주정을 하는 것처럼 말이 새나온다고 했다. 그래도 노래를 한 곡 불렀다. “조·중·동이 대문짝만하게 뭐라고 쓰든 우리는 민주노총 쪼(방식)로 갑시다.” 모두들 와∼, 했다. 초승달이 구름 속으로 졌다.

다음날 아침, 몇몇 나이 든 조합원만 일찌감치 산책을 나섰다. 아침밥을 먹고 대의원들은 어젯밤의 그 교육관에 다시 모였다. 사업하느라 투쟁하느라 다들 검게 그을린 구릿빛 얼굴들이었다. 민주노총의 조직적 현실을 둘러싼 패널 토론이 시작됐다.

“민주노총에 대한 현장 조합원들의 자부심이 떨어지고 있다. 총연맹의 집행력이 떨어지고, 지역과 산별연맹 조직이 충돌할 때 조정 역할도 못하고 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정민정 서비스연맹 대의원)

“이해가 대립되는 안건이 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파에 따라 퇴장해버리기도 한다. 고질적인 정파 싸움 문제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혁신해야 한다. 저출산 문제 같은 생활밀착형 투쟁을 해야 한다. 비정규직은 소득이 줄어서 아이를 안 낳으려 하고….”(유재성 금속노조 대의원)

“더 이상 ‘뻥카’(좋지 않은 카드로 호기를 부리는 것) 투쟁은 안 된다. 지도부가 선봉에서 파업을 조직하고 1만 명이 국회 앞에서 삭발하고 싸워봐라. 그래야 현장에서도 움직인다.”(유미라 보건의료노조 대의원)

“저출산 같은 생활밀착형 이슈 제기를”

한 아줌마 대의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민주노총 임원 직선제는 대의원대회에서 이미 결의된 것인데, 왜 직선제 3년 유예가 안건으로 올라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조직에서 결정한 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어젯밤 이준용 사무차장이 “잘못 걸리면 큰일난다”고 소개했던 이찬배 여성연맹 위원장이었다. 여느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때처럼 의견 대립이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매우 길고 고단한 대의원대회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사랑과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영원한 우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1995년 11월 민주노조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제47차 임시대의원대회가 시작됐다.

충주=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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