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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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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그머니 잦아든 ‘자본주의 성찰론’

금융위기 초기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반성과 모색 활발했지만 경기 회복세 따라 ‘출구 전략’으로 무게중심 옮겨가
등록 2009-09-17 15:36 수정 2020-05-03 04:25

지난 3월부터 영국 는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 ‘자본주의의 장래’를 둘러싼 장기 특집 시리즈를 싣고 있다(www.ft.com/capitalismblog 참조). 앞서 최악의 금융위기가 발발한 직후인 지난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자본주의’ 심포지엄이 열렸고, 이때부터 이미 자본주의의 운명과 본질, 그리고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이 광범위하게 불붙기 시작했다.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9월5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회의에서 글로벌 경제의 회복이 이뤄질 때까지 확장적 재정정책을 지속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사진 REUTERS/ GEOFF CADDICK/ POOL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9월5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회의에서 글로벌 경제의 회복이 이뤄질 때까지 확장적 재정정책을 지속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사진 REUTERS/ GEOFF CADDICK/ POOL

는 ‘자본주의의 장래’ 특집에서 새로운 세계경제 질서를 구축하는 최전선에 서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명을 선정했다. 이들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등 엄습한 글로벌 금융위기와 싸우는 50명의 경제·금융 정책 담당자였다. 는 “직면한 전세계적 금융위기는 지난 30여 년 동안 전세계 경제를 지배해온 ‘세계화’에 대한 첫 번째 강력한 도전으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금융위기, 세계화에 대한 첫 번째 강력한 도전”

‘격변의 시대, 자본주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단 이 대형 특집에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등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경제 석학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 나름대로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동시에 적절하고 바람직한 대응책을 놓고 지상 논쟁을 벌였다. 경제학계 지성들의 논쟁 속으로 들어가보자.

논쟁에 참여한 석학들은 대부분 과거의 금융위기는 주로 신흥시장국에서 발생했으나 이번 금융위기는 그 충격이 미국과 영국, 유럽, 일본 등 선진 경제국 중심에서 터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지난 30년간 자본주의 경제가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구가하다가 갑자기 극적인 파국을 맞았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논쟁의 큰 구도는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종언을 뜻하는가 아닌가”로 모아졌다.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 하버드대 교수는 “이번 위기가 해결하기 어렵고 큰 재앙으로 보일지라도, 언젠가 위기는 지나갈 것”이라며 “앞으로 남을 문제는 위기 이후 장래에 어떤 경제 시스템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말했다.

물론 논쟁 참가자 다수는 시장자본주의의 조종으로 보는 건 오판이라는 견해에 섰다. 시장 자체의 실패가 아니라, 바람직하고 적절한 시장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위기가 초래됐다는 것이다.

의 저자인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현재의 금융 시스템이 상처를 입었지만, 무분별한 이윤 추구 원리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돈에 대한 탐욕을 좇는 야성적 충동이 지배하는 금융 시스템에 대해 더 많은 감시와 규율을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면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처럼 언제든 상처 입을 수 있고 심각한 결함들을 안고 있을 수 있다. 앞으로 몇 년간 세계경제가 더 깊은 불황 국면으로 빠져들지라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안적 시스템은 더욱 나쁘다는 걸 또한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경제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불안정성을 그동안 경제 주체들이 무시하고, 정책담당자들도 이런 불안정성을 관리해야 할 책임을 간과했기 때문에 이번 위기가 초래됐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번 위기는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또는 시장경제 자체의 파산은 결코 아니며, 금융위기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도덕적·지적 실패 그리고 시장에 대한 무지가 원인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시카고대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상처받고 있지만, 현재 전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잘못된 정부 개입, 그리고 시장 규제가 자본주의를 파괴하도록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에 따르면, 전세계 총생산이 1980∼2007년에 145%(연간 평균 3.4%)나 성장하는 등 지난 30년간 전세계 경제는 놀랄 만한 번영을 구가했다. 베커 교수는 “위기 대응책으로 국가 개입과 규제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개혁이 자본주의의 놀랄 만한 성취를 죽이게 놔두면 안 된다”면서 각국 정부가 금융 시스템 안정화를 위해 취하는 다양한 개입 정책들이 시장 기능을 방해하고 지속적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작은 손질만 해도 지금의 경제적 세계를 건전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시장 회의론’ 압도한 ‘시장 보완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 ‘자본주의의 장래’를 둘러싼 장기 특집 시리즈를 싣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 ‘자본주의의 장래’를 둘러싼 장기 특집 시리즈를 싣고 있다.

이번 위기 국면에서 금융 사업가와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의 날카로운 적대감이 형성되면서 경제를 정부가 관리하는 모델에 대한 믿음이 확산되는 것도 경계하고 나섰다. 베커 교수는 “금융에서의 각종 혁신(신종 파생상품)과 발전이 지난 30여 년간 글로벌 경제 붐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위기는 단지 주택 가격이 폭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한 모기지 파생상품의 리스크 관리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대공황 시절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로부터의 거대한 퇴각이 나타나고 이것이 사회주의에 대한 쏠림으로 이어졌으나, 그 결과는 저성장뿐이었다고 지적했다. 베커 교수는 “인류에게 더 큰 물질적 부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경제 체제는 지구상에서 오직 자본주의적 시장뿐이다. 우리는 이번 위기에 대응하는 각국 지도자들이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과도한 정부의 금융 규제와 개입은 또 다른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번 위기를 자본주의의 장래나 운명에 대한 논란으로 끌고 가는 건 성급한 견해이고, 금융위기 자체가 자유시장 이론에 대한 파산 선고도 결코 아니라는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위기 속에서 케인스경제학이 복귀하고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대한 믿음에 구멍이 나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노벨상 수상자인 에드문트 펠프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불확실성이 최고의 (경제) 시스템을 괴롭히고 있다’는 글에서 “현재 지구적 자본주의는 2차 위기를 겪는 중이다. 주택 가격 거품이 거대한 파열음을 내고 꺼질 수 있다는 취약성에 대한 인식이 부재했고, 이런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한 사고가 부족해 선진 자본주의 경제가 위험한 수준까지 치달았다”며 “그러나 우리는 금융 영역의 자기파괴적 행동을 규제하되, 자본주의가 잘 굴러가도록 다시 설계하고 경제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 윤택한 삶을 가져다준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을 닫아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불확실성과 위험을 깨닫지 못한 채 모두가 거품 속으로 빠져든 ‘비이성적 과열’을 위기의 근원지로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위기가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적 단계에서 큰 획을 긋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보는 시각도 제기된다.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돈벌이만 된다면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허풍과 거품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언젠가 허풍은 불가피하게 폭로될 것이고, 그때 시장에서 신뢰는 갑자기 사라지고 경제는 폭발하게 된다는 얘기다. 실러 교수는 “규제받지 않는, 속박 없는 자본주의가 가장 좋은 경제적 성과를 낸다는 주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위기가 초래되는 과정을 고려해볼 때 잘못된 경제이론”이라며 지난 30여 년간 ‘고삐 풀린 시장’과 ”규제 없는 금융 자유화’를 외친 주류 경제학계는 반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와 관련해 는 지난 4월 초 런던에서 열린 선진·신흥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대해 “프랑스와 독일이 영미식 시장자본주의를 상대로 유럽식 자본주의 모델의 승리를 선언한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미국과 시장의 역할이 줄어든 새로운 세계경제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 자유화 외쳐온 주류 경제학계 반성해야”

그러나 이런 논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전세계 50여 명의 글로벌 리더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각국 정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독에 감염돼 병을 앓던 부실 금융회사를 구제금융으로 인수하고, 파산 위기에 처한 산업자본에는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듯 시중에 막대한 재정을 지출하고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는 등 ‘과감하고 신속한 대응’ 이후 전세계 경제는 수습 국면으로 가고 있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대두하고 있다. 이미 지난 3월 말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위기는 해소되고 경제는 곧 정상적인 상태로 복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린스펀은 “주가가 우리에게 경기 회복의 길을 보여준다”며 “역사는 공포가 시장을 마비시키는 깊이와 기간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적 후퇴는 무한정으로 지속될 수 없다”고 말했다. 공포가 증폭되고 있지만 경기 침체 속도는 점차 느려질 것이고, 그래서 공포 수준이 점차 줄어들면서 주가는 다시 오르고 이것이 경기 회복의 중요한 모멘텀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폭풍의 한복판에 있는 미국 경제가 최악의 국면을 지나 서서히 회복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신호도 나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7월에 내놓은 ‘세계경제 전망’에서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세계경제 -1.4%, 선진국 경제 -3.8%, 신흥시장국 1.5%로 제시했다. 또 내년에는 세계경제가 2.5%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서고, 선진국 경제는 0.6% 플러스 성장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올 2분기에 세계은행(WB), 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은 일제히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정책 대응으로 금융시장이 다소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더 나은 경제적 세계는 무엇일까

이처럼 미약하지만 회복세가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이 쏟아지면서 ‘긴박하고 공격적인 위기 대응’에서 철수할 타이밍을 찾아야 한다는 논란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의 장래를 놓고 논쟁할 때가 아니라, 과도하게 풀린 유동성을 거둬들이고 인플레이션 촉발을 수습하는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른바 ‘출구 전략’(exit strategy)을 둘러싼 논쟁이다. 자연히 위기의 근원을 자산 가격 거품보다 훨씬 더 깊은 곳, 즉 자본주의 경제 모델의 취약성 혹은 탐욕적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에서 찾던 ‘대전환 논쟁’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에 대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은 “신뢰의 붕괴가 위기를 초래했고 회복은 매우 더딜 것이다. 시장경제가 자기조절 능력을 갖고 스스로 잘 작동할 수 있다는 믿음이 붕괴되고 있다”며 “새로운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논쟁하기보다는 시장경제의 가능성과 한계를 고려하면서 열려 있는 자세를 가지고 더 나은 경제적 세계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병을 앓고 있는 자본주의는 지금 대공황 이후 제2차 위기를 겪고 있다.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재정 지출 속에 부실 금융기관들이 국유화되고, 침몰한 GM마저 사실상 국영기업이 되는 등 전세계적으로 국가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전면에 재등장했다. 출구 전략이 준비되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 경제가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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