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자신감을 되찾고 있다. 등 돌린 민심이 이제야 돌아오고 있다는 믿음이 자신감의 원천이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7월 이후 완만한 상승 곡선을 그린다. 과 한길리서치가 8월10일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39.8%로 나타났다. 한 달 전보다 9.5%포인트 오른 수치다. 8월6일 리서치앤리서치 조사에서는 40.5%를 기록했다.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40%를 넘긴 것은 지난해 촛불집회 뒤로 처음이다. 30%대를 오르내리는 지지도가 결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담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만(773호 정치 ‘지지율 30%대 MB가 버티는 이유’ 참조), 청와대는 지지도가 상승세라는 사실에 고무돼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상승의 주요 원인을 ‘친서민’ 행보의 강화에서 찾는다. 최근 생계형 범죄 사면과 ‘취업 후 등록금 상환제도’ 도입 등 정부가 내놓는 서민 친화형 정책이 공감을 얻으며 이 대통령의 지지도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대통령은 내친 김에 광복절 기념 축사에서도 중도실용에 바탕을 둔 친서민 정책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래저래 민생 현장을 찾아 ‘서민’을 강조하는 이 대통령의 발걸음이 한층 잦아질 전망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서민을 겨냥한 ‘현장 정치’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논두렁에 앉아 모내기를 마친 농민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는 ‘소탈한 서민 대통령’의 이미지로 박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포항제철을 세울 때 13번이나 직접 현장을 찾았다는 사실이나,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현장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충훈 부총리를 경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현장 정치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집착은 해외로까지 이어졌다. 1964년 독일에 광산 노동자와 간호사를 파견한 뒤 그는 함보른 탄광을 직접 찾아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불렀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6년에는 파병 장병을 위로하기 위해 베트남까지 날아갔다.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도 충남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장이었다.
‘땡전뉴스’라는 희비극을 만들어낸 전두환 전 대통령도 현장 정치의 신봉자였다. 모내기 철이 되면 밀짚모자를 쓴 채 농촌으로 달려갔고, 점퍼를 입고 양로원이나 보육원을 자주 찾았다. 방송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내내 그의 동정을 첫 뉴스로 전하기에 바빴다. 대한항공 여객기가 러시아 상공에서 격추됐던 1983년 8월31일에도 한국방송 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서울 모처를 찾아 시민과 함께 거리 청소에 참여한 장면을 가장 먼저 소개했다.
권위주의 정권의 정치 기반 강화용그러나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최진 소장은 역대 대통령의 현장 정치에는 권위주의 코드가 감춰져 있다고 지적한다. 권위주의 정권일수록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해 현장 정치와 친서민 행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해석이다. “박정희·전두환 두 정권은 군사정권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서민을 끌어안는 이벤트를 많이 시도했다. 박 전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계획된 현장 정치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면, 전 전 대통령은 민생 현장을 수시로 찾아 직접 민원을 듣는 모습을 연출하며 친서민 이미지를 연출했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는 둘 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의 속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을 쓴 서병훈 숭실대 교수는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인민(혹은 서민)의 정치·사회적 권리를 누구보다 강조한다. 문제는 이를 실천하는 과정이다.
포퓰리스트는 대개 이성적 논리보다는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정치로 서민을 동원하려 시도한다. 미디어 활용에 능한 이들은 ‘단순해서 이해하기는 쉽지만 정작 현실 속에서 구체화하기는 어려운 해결책’을 대중에게 제시한다. 감세안이 대표적이다. 포퓰리스트는 대개 ‘세금은 나쁜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의 반복으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면서도, 세금을 거둘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필요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이에 대한 논리적 도전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식으로 몰아붙인다. 결국 포퓰리즘은 서민의 정치·경제적 자립을 이끌어내기보다 오히려 부작용만 양산한다.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운 지도자 중심주의의 확립과 논리적 토론이 실종된 ‘민주주의의 후퇴’가 바로 그것이다.
‘정치쇼’ 우려한 노 전 대통령 ‘탐방’ 꺼려서민을 겨냥한 대통령의 민생 탐방은 김영삼 정부 출범 뒤 눈에 띄게 줄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래시장이나 농촌을 찾는 민심 탐방이 ‘정치적 쇼’로 비칠 우려가 있다며 현장 방문을 꺼렸다. 참여정부 핵심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은 영세 자영업이나 농촌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구조 전반에 대한 대대적 손질이 필요한데, 이를 대통령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며 “그런 상황에서 시장이나 농촌을 찾아 기념사진을 찍고 오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실질적 도움이 되겠느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진 소장은 “정통성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김영삼 정부 이후 대통령이 직접 민생 현장을 찾는 일이 줄었다”며 “사회가 다원화되고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대통령 개인의 민생 탐방이 실제 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크지 않다는 사회적 인식도 현장 정치의 퇴조에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의 친서민 행보가 이런 역사적 경험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서민 복지문제를 제도적으로 접근하기보다 현장을 방문해 즉흥적으로 대책과 지시를 내리는 이 대통령의 스타일은 오히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를 닮았다. 내년부터 도입하기로 한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도’를 홍보하는 정부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월24일 충북 괴산고를 방문했다. 당시 대학 등록금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 앞에서 이 대통령은 “학자금 대출금은 내가 봐도 갚기가 힘들다”며 “졸업하자마자 갚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2~3년 뒤 좋은 일자리를 구해 수입이 생길 때 갚아나가는 대여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도와 기숙형 고교 기숙사비 경감 대책은 괴산고 방문 직후 나왔다.
이 대통령은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도에 대해 설명하는 간담회를 여는 등 “이제 더 이상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니는 사람이 없도록 할 것”, “학부모들은 자녀 대학 등록금 걱정을 안 해도 되고, 학생들은 등록금 걱정 없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는 식의 논리를 앞장서 전개했다.
하지만 ‘돈 걱정 없이 대학 다닐 수 있다’는 이 대통령의 단순 논리는 두 가지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우선 한 해 1천만원을 넘을 정도로 치솟고 있는 대학 등록금의 정상화 문제다. 학생과 학부모의 근본적인 걱정은 높은 등록금인데, 이 구조는 그대로 놔둔 채 대출 제도만 손본 뒤 ‘돈 걱정 없이 대학 다닐 수 있다’고 여론을 몰아가는 것은 포퓰리즘 그 자체라는 지적이다. 안진걸 참여연대 사회경제국장은 “정부가 ‘취업 후 등록금 상환제’ 도입을 통해 대학생과 학부모의 고통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서도 “반면 매년 가파르게 치솟는 초고액 등록금을 어떻게 잡을지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대졸자를 더 큰 등록금 빚더미 시대로 내몰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도 도입을 위한 재원 확보 문제도 마찬가지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제도 도입을 위해 내년에 6천억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인데, 기획재정부는 난색을 표하는 상황이다. 기획재정부는 3천억원 이상은 곤란하다는 계산이지만,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생색은 대통령이 내지만 뒷감당은 공무원의 몫이다. 기숙형 고교 기숙사비 경감대책은 아예 재원조달 방식도 제시하지 않았다.
보수 진영과 여권 내부에서조차 이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유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는 포퓰리즘에 불과하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보수 진영의 대표적 지식인인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학)는 이 대통령의 민생탐방 행보를 ‘자장면을 팔아야 할 중국집에서 스파게티를 파는 것’에 비유했다. 대선 당시 보수우파의 가치인 성장과 경쟁, 효율을 내세우다 집권 1년6개월이 지난 지금 서민정치와 중도강화론을 내세우는 것은 정치도의적 차원에서 당당하지 못한 태도라는 주장이다.
“돈 걱정 없이 대학 다닌다”는 홍보의 이면박 교수는 8월4일 뉴라이트 계열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대학 입학사정관제 확대와 150만 명 규모의 광복절 특별사면, 서민 감세 등을 차례로 언급하며 “이것은 포퓰리즘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법치, 공정한 경쟁 등을 통한 선진화를 표방했던 이명박 정부가 ‘대중추수주의’에 빠져 이념적 정체성과 맞지 않는 부조화의 정책을 내놓고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지적이다.
한나라당 내 대표적 경제통으로 통하는 이한구 의원은 정부의 ‘재정 포퓰리즘’을 문제 삼았다. 정부가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에 맞춰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도’와 맞벌이 부부 보육비용 지원, 기숙형 고교 기숙사비 경감 등 선심성 정책을 내놓는 데 대해 이 의원은 “지금 재정 포퓰리즘이 너무 세게 나가는 것 아니냐”며 각을 세웠다.
이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를 둘러싼 본질적 우려는 결국 ‘진정성’과 ‘지속성’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돼 있다. 이 대통령이 강조하는 ‘친서민’ 구호 속에 정말 서민이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정치권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 행보가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서민 복지를 시스템으로 접근하지 않고 일회성 이벤트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며 “예컨대 소득별 범칙금 차등부과 등의 정책은 생색용으로는 적당할지 모르지만 서민 보호를 위한 근원적 처방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보수 진영 안에서도 “포퓰리즘” 비판이 대통령이 말로는 서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보건복지가족부가 기획재정부에 낸 2010년 예산 요구안을 보면 기초생활보장 등 취약계층 보호를 위한 예산은 올해보다 4300억원가량이나 깎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식이라면 ‘친서민’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다시 서병훈 교수의 의 한 대목이다. “포퓰리스트들은 현상 타파적인 개혁 노선으로 인민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구두선에 지나지 않는다.” 겉으로는 현상 타파를 주창하지만 가난한 보통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의존하거나, 그들의 이익만 배타적으로 고려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을 거듭하는 기회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포퓰리스트의 특징이라는 이야기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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