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폭탄’이 떨어지고 있다. ‘늬우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이 폭탄은 재래식이다. 예술대학에서 이론을 공부하는 과정을 ‘세뇌’라 부르고, 일방적 정보 주입과 정권 홍보·선전을 ‘늬우스’라 말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대통령은 국적을 상실해버렸다. 다른 나라로 국가 설정을 바꿔 올려야만 했을 게다. 바로 현 정권이 인터넷 실명제 요구를 하면서 자초한 일이다. 진작부터 권력과 자본에 반대하는 글줄은 죄로 엮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발가벗긴 채 십자포화를 맞고 투옥된 게 ‘미네르바’다.
말이 감옥에 가는 시대다. 그 정점에 미디어법이 자리잡고 있다. 이 법을 만들겠다는 진짜 의도는 반대 의견을 묵살하는 걸 넘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것이다. 역사에 비춰보면 이는 파시즘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날치기로라도 법이 통과되면 언론 대신 홍보와 선전, 비판 대신 ‘미디어 폭탄’이 안방을 폭격하게 될 게다. 대화를 기피하고 햇볕 아래 나서지 못하는 광장공포증, 지독한 자기애와 피해의식이 합작한 은밀한 광증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침묵의 평등, 압제된 평화가 민주주의나 법치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집행되고 있다. 근대를 성립시킨 핵심적 가치들이 피를 흘리면서 박물관을 향해 포복해가고 있는 것이다. 말은 길을 잃고 가치가 전도된 채 통용되고 있다.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가 중심이 되어 만든 정당 이름이 ‘민주정의당’이었을 때 민주와 정의는 끔찍한 걸음새로 뒤틀려야 했다. 이 두 가지 말을 되찾는 데 ‘10년 세월’이 필요했다. 말들은 오늘 그 시대로 퇴행하고 있다.
앞으로는 버겁게 사는 일을 하소연하고 푸념하고 괴로워할 때도 세금을 추가로 내야 할지 모른다. ‘술과 담배에 세금을 더 붙일 수 있다’고 떠보고 있는 참이 아닌가. 기독교계에서는 다분히 ‘죄악세’라고 부르고 있는데, 정작은 ‘빈민세’라고 해야 옳다. 싼 술과 담배의 소비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면 간단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문화생활은 TV 보기, 인터넷, 술과 담배가 거의 전부랄 수 있다.
이들이 가장 몸서리치는 건 자식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신산스런 삶을 후대까지 연장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이들이 자식 교육에 매달리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공교육을 벗어나는 순간 교육과 문화는 가진자들의 독점적 수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현실은 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특목고 증설 등 ‘교육 폭탄’은 부의 세습을 넘어 지적 세습을 제도화·관습화하려고 한다.
어린이들에 책 읽어주고 수백 권 기증한 권씨교양과 지식 습득 기회를 박탈하는 일만은 막아 평등과 기회 보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가난한 성장 세대에게 오직 하나뿐인 ‘출구’이자 ‘미래’인 터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도서관’이다. 도서관이라는 상상 공간이야말로 최고의 민주 공간이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 종교, 편견도 도서관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그런데 얼마 전 그곳에서 ‘권양숙’이 사라졌다. 전남 순천 ‘기적의 도서관’에 자리잡고 있던 ‘권양숙문고’ 팻말이 창고에 처박힌 것이다. 권양숙이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을 이른다. 그는 순천에 처음 문을 연 기적의 도서관을 방문해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몇 백 권의 책을 기증했다. 팻말은 목각을 하는 이가 기부한 것이다. 서체는 이철수 판화가의 것이다. 이철수는 전국 기적의 도서관들 이마에 붙인 모든 글씨를 새겨주었다.
기적의 도서관이 말하는 ‘기적’은 책 읽기 왕도나 족집게 과외 효과가 아니다. 이 기적은 한마디로 시민참여에 있었다. 방송(문화방송 )을 통해 선정한 책을 시민이 읽고 거기서 생기는 이익금 일부를 독자들에게 다시 돌려주자. 이 제안은 일찍이 볼 수 없던 폭넓은 공감을 얻으면서 도서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기적의 도서관은 지역마다 설계와 시공, 책, 페인트, 벽지, 책걸상, 문 손잡이, 유아용 변기 하나까지 전액 또는 부분 기부를 통해 곳곳에 들어설 수 있었다. 책을 정리하고, 이름표를 붙이고, 어린이들을 안내하는 일들 모두 거룩한 시민참여를 통해 도서관이 꼴을 갖춰나갈 수 있었다. 도서관을 짓는 일보다 중요한 건 창조적 참여에 있었다고 해도 결코 그릇된 말이 아니다. 분명한 건 정부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부와 관의 타성적 간섭에서 자유로울수록 문화는 자생적 힘을 키워가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 공간에서 ‘권양숙문고’가 사라졌다. 더구나 어린이 도서관에서. 권양숙씨가 참여한 것은 전적으로 대통령 부인 자격이었다. 팻말이 사라진 일은, 그 남편의 죽음과 함께 널리 알려지면서, ‘노무현 지우기’를 넘어 문화 파괴로 읽혔다. 도서관이라면 기부자를 찾아 문고를 늘려가야 마땅하지 이를 숨긴다는 건 해괴한 일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광범한 대중의 힘으로 세운 도서관에까지 정치적 영향력이 심각하게 미치고 있다는 참담한 증거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려는 허무의 시대순천 지역신문에 따르면, 권양숙문고가 사라진 것은 지난 4월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곳 도서관을 방문하는 시기와 일치했다고 한다. 도서관 쪽에서 알아서 없앴든, 외부의 압력이 있었든, 권력에서 자유롭기 위해 정부 지원마저 뿌리치고 세운 시민 주체의 도서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건립 취지를 훼손해버린 사태이자 폭거다. 도서관 쪽에서 알아서 기었다면 이는 더 심각한 일이다. 권력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면화된 굴욕으로 복종하는 ‘괴벨스적 상황’이 도래한 것이 아닌가 싶은 터다. 순천의 도서관장은 얼마 전 시의회의 불신임으로 재임용에 탈락했다고 한다.
작금의 상황에 대해 권양숙씨 쪽에 물었다. 답이 없었다. 건립위원장을 맡았던 이도, 도서관의 서체를 맡았던 이도, 방송을 제작했던 이도 허무한 듯 말이 없었다. 이런 시대다.
기적의 도서관은 책을 읽는 행위가 단지 개별적 지식 축적에 머무는 게 아니라 사회참여가 된다는 걸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줬다. 당시 그들이 보내주었던 뜨거운 관심과 환호는 어디서 찾아야 되는가. 지식재화란 나누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공공과 공익성을 스스로 빚어낸 헌신적 대중을 향해 감행된 이 능멸은 시민문화가 권력 아래 신음하는 형세가 아닐 수 없다.
기적을 빼앗아가는 자들은 누구인가. 빼앗긴 기적을 되찾는 방법은 하나다.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었을 때와 같이 높은 관심으로 자기 문화, 시민문화를 지키고자 결의해야 한다. 다시 기적을 만들어내야 할 때다. 시민의 힘이 바로 기적이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기적이 ‘늬우스’가 아님은 물론이다.
서해성 소설가·한신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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