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역사인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 세상에 일어난 사건 중 가장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사태가 발발한 나라는 ‘조용한 아침의 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였다. 물론 그곳에 사는 당사자들에게 이런 사태는 새로운 느낌의 아이러니는 아니었다. 사실 1천 년 전부터 이 조용한 아침의 제국은 ‘하늘의 제국’(중국)과 ‘태양이 떠오르는 제국’(일본)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유럽에서 놀라움을 가지고 바라보는 이러한 사태가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익숙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한국은 늘 전쟁의 피해를 보는 데 익숙해 있었다는 의미-역주). 사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시적인 표현은 점점 더 복잡하고 위험한 느낌을 내포한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다. 과거,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요한 가교 구실을 하는 지역일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은 둘로 나뉜 전세계 양 진영 사이의 최전방 충돌 지점이 된 것이다.
지리학적 요인으로 항상 북에서 남으로이 나라에서 역사는 지리학적인 문제와 깊이 연결돼 있다. 왜냐하면, 역설적이기는 한데, 유럽이 동구와 서구로 불리면서 서로 맞닥뜨리고 있다면, 한쪽 방향만을 가진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해졌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 김일성 장군이 일으킨 침공 방향도 절들이 있는 위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그것은 1천 년 전에 있었던 불교의 전파와 같은 흐름으로 이뤄지고 있다. 역사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중국 문화는 항상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해졌다. 그것은 또한 한국 전역 여기저기를 통과하는 유일한 길과 철로의 방향이기도 하다. 한국의 북쪽에는 만주가 있고, 그 북쪽은 시베리아다. 남쪽으로는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를 왕래하는 페리호의 체류장이 있는 섬나라, 일본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파리에서 기차표를 사면, 서울을 거쳐 도쿄로 가게 되는 것이다. 최소한 ‘추상적인 철의 장막’이랄 수 있는 38도선이 없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 가려면 도쿄로 먼저 가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가는 것이 더 편리한 상황이다.
한국에 도착하면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하늘들 중 하나와 그 파란 하늘 아래 점점의 금빛 섬들이 있고, 그 섬들 뒤로 들쭉날쭉한 해안선들과 엷은 보라색 산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정경이다. 북한군들이 두 번째 침투 고지로 밀고 들어온 강릉 지역도 이와 비슷한 풍경을 보여준다. 한반도의 섬들을 모두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이 나라의 방어를 위한 손쉬운 해결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섬들은 해적들의 소굴로 사용됐고, 오늘날에도 중국 배들이 나일론 허리띠에서 라이터 그리고 아편에 이르기까지 각종 물품들을 밀거래하는 거처이기도 하다. 이런 밀수입의 규모가 너무 커서, 미국은 일본에 해양경찰 초계정 부대를 다시 만드는 것을 허용해야만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비행기는 서울 근교의 비행장인 김포에 착륙한다. 김포에서 수도까지 연결된 도로는 매우 훌륭해서, 사람들은 이 길을 지나가며 한국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현대화돼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한국은 그다지 현대화돼 있지는 않다. 이 길은 남북을 잇는 철로 길과 함께 실제적으로는 이 나라의 유일한 도로이기 때문이다. 다른 길들은 거의 모두 진흙 길인데다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는데, 그것은 농부들이 논에 물을 대기 위해 개울이나 도랑을 끊는 일을 제멋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적 도로와 오래된 전통 길 사이의 이 대비는 한국 전체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젊은 한국과 옛 한국이 혼재
이런 대비적 느낌은 바로 두 개의 한국이 있기 때문이다(일본이 만들어놓은 ‘젊은 한국’과, 중국이 만들어놓은 ‘옛 한국’). 한국만의 한국이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한국의 대도시를 보면, 이 두 양상은 서로 이웃하고 있고, 그로 인해 극렬한 대립적 형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서울이라는 제국 도시는 안남(Annam·안남은 고대 베트남을 가리키는데 주로 프랑스인들이 베트남을 식민화했을 때 사용하던 명칭이다. 기자의 이러한 비교는 안남의 수도에도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문화와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문화가 극명하게 대비되며 공존하고 있다는 예를 들어 한국의 상황을 프랑스 독자들에게 쉽게 알리려 한 의도로 볼 수 있다-역주)의 수도 위에처럼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는 완전히 순수한 중국식 도시였던 것이다.
18세기에 유럽의 소국왕들이 자신들의 작은 베르사유궁전을 갖고 싶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모든 군주들은 자신들의 수도를 작은 베이징처럼 만들고 싶어했다. 서울에는 용무늬와 신기한 석상들로 치장된 많은 사원들이 벚나무에 둘러싸여 연못 속 연꽃 사이에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황궁 앞에는 큰 길이 나 있었는데, 축제날이면 그 길에서 백성들은 왕좌에 앉아 있는 자신들의 국왕을 주시할 수 있었고 칭송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일은 오늘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서울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황궁을 상징하는 가장 중심 자리에 현대식 건물을 세웠다. 물론 더 이상 이 나라에 황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궁들이 남아 있음에도 한국의 수도는 점점 더 유럽 도시 변두리와 흡사해져 가고 있다. 좀더 근대적인 외형을 보여주고 있지만, 훨씬 더 지저분한 모습으로….
한국에서는 도로라든지 공장, 의상, 정치 예절 등 현대적인 모든 것들이 일본식이다. 그 외에는 모두 중국에서 온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중국적 이미지는 사실 중국에서조차 더 이상 거의 존재하지 않고 고고학자들을 위해서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급격한 현대 문물의 침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기원으로만 따져서 1950년이 되었을 뿐이지만, 한국인은 이미 4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난방 시스템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시골 사람들은 나무와 벽토로 지어진 초라한 집에서 살고 있다. 이 집들은 만주에서 불어오는 혹독한 겨울바람에 저항하기 위해 대나무와 오리목으로 보호하고 있는데, 겨울 기온이 영하 25도까지 내려간다. 이 집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붉은색 초가지붕들이 거의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렇게 붙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름이면 그 초가지붕 위에 고추를 널어 쉽게 말릴 수 있다. 대부분 이 초가집들은 U자 형태를 띠는데, 센 바람이 돌아나가게 하는 구실을 한다. 문 위에는 보통 악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요란스러운 색깔을 한 무시무시한 형상의 전사들이 그려져 있다. 나무 땔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의 난방 시스템은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경제적이다. 그것은 바닥에서 이뤄지는 시스템이다. 나무로 된 이 바닥은(이 글을 쓴 기자는 한국의 방과 마루에 대한 구분이 확실하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한국의 방바닥이 나무로 돼 있다고 썼다-역주) 평평한 돌이 아래에 깔려 있고, 그 위로 큰 노란색 종이가 붙여져 있는데, 이 종이는 마치 가죽 같은 느낌을 준다. 난로 구실을 해주는 것이 바로 이 바닥돌이다. 여름이면 40도까지 기온이 올라가는데, 이때 이 돌들이 한국의 집들이 찜통이 되는 걸 막아준다.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은 날씨에도 발을 따듯하게 할 수 있다. 시골 사람들은 이러한 시스템의 바닥 위에 요를 깔고 잠을 잔다. 또 다른 종류의 이불들이 있는데, 계절에 따라 각기 편한 게 사용된다. 한국에서 잠을 자는 것은 크레프(서양식 빈대떡)를 잘 붙이는 기술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크레프의 한쪽 면이 잘 구워지면 뒤집어서 다른 면도 잘 구워지게 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즉, 잠을 잘 자야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이뤄져 삶의 리듬을 찾게 되고 그 리듬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은 한국의 얼굴에 깊이 각인된 중요 문제들 중 하나다. 우선, 불은 제사의 대상이거나 종교적 객체라고 할 수 있고, 최소한 미신적 대상인 것은 확실하다. 모든 한국인은 ‘열 세대 이상’ 이전 세대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성한 불꽃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최소한 그 세월 이상으로 불이 후세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절대 그 불꽃이 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그 불이 꺼진다는 것은 그 집안의 가장 안 좋은 재앙의 전조가 되고, 다른 하나는 그 불을 다시 지피는 것 또한 매우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성냥은 아직 사치스러운 수입품 중 하나고, 라이터는 거의 밀수품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산들이 있지만 건조한 바람으로 황량하고, 벌판은 다시 경작하기 힘들 정도로 나무가 벌채된 조용한 아침의 제국은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음에도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나라 의복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사치스러운 의복 중 하나를 입는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의 한국 의복은 기원전 1950년 중국인들의 의복이다. 흰색이 지배하고 있다. 남자들은 비단이나 가벼운 순면으로 된 깨끗한 긴 옷을 입고 있다. 마디가 있는 지팡이를 들고, 중국식 긴 파이프 담배를 물고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특히 그들이 머리 위에 쓴 말총으로 만든 신기한 ‘새집’ 같은 모자는 호박(琥珀)으로 장식된 끈으로 턱에 매여져 있는데, 긴 옷과 함께 이 모자를 쓴 모습은 마치 되는 대로 걸어가는 중국 고관의 위엄을 보여준다. 한국에 기독교 전파가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원뿔형 모자를 통해서였다. 사실, 1910년까지 한국인들은 정체가 드러나는 기독교 선교사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섬나라로 향하는 중국 배에서 내린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미션을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나라 방식대로 의복을 입는 것이었다.
이 옷들은 1년 내내 같은 방식으로 입는다. 겨울에는 비단이나 면으로 된 솜뭉치를 넣은 같은 종류의 겉옷을 입을 뿐이다. 저녁이면 그 솜옷을 떼어내고, 아침이면 다시 붙여 입는 식이다. 한국 여성은 자신의 남편이 우아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해주는 다리미질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은 다리미질을 다듬이질로 대체하고 있다. 겉옷을 떼어내 빨래를 한 뒤, 그 옷을 편편한 돌 위에 깔아놓거나 나무 원기둥 같은 데에 감아놓고 몽둥이 같은 것으로 옷 위를 두들긴다. 그렇게 한 뒤 겉옷을 다시 옷 위에 붙이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런 식의 의복 관리에 드는 시간이면 ‘해가 뜨는 나라’(일본을 지칭)를 위해 더욱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녁 이후의 빨래와 다듬이질을 금지하려고 했다. 땅딸막하고 촌스러우며 실용적인 의식을 지닌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의 흰색은 사치로 여겨졌던 것이다. 한편, 몸맵시가 좋고 키가 큰 순박한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절대로 필요했다. 이 점에 한해서, 일본의 식민화는 완벽한 실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을 ‘곡창’이라고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남한은 지금까지 한국인들을 제외한 모든 주변 국가에서 차례로 곡식을 가져가는 일종의 창고였다. 일본인들은 고작해야 수수나 조를 남겨두었지만, 그 생산량으로는 한국인들이 골고루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인들의 식량에는 유일한 식단인 김치가 있는데, 김치는 1년 전에 준비해둔다. 가끔 잔치 같은 특별한 날에 약간의 생선이 한국인들의 식단에 곁들여지기도 한다. 김치 요리법을 소개해본다. 큰 토기 항아리(어떤 항아리들은 무늬로 장식돼 있다) 안에 썰어놓은 오이와 배추를 넣는다. 그리고 고추와 마늘, 으깬 새우와 식초를 더 넣으면 끝난다. 항아리 입구를 밀봉해 겨울 내내 담근 상태로 놔둔다. 봄이 되면 그 밀봉을 여는데, 이때에는 뚜껑을 열자마자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것이 중요하다.
이승만 호놀룰루 억양과 ‘국모’ 간주에 거부감한국의 주요 재원으로 뽕나무 경작이 있다. 뽕나무의 누에고치에서 추출한 비단은 미국에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또 다른 주요 재원은 인삼이라는 약용식물의 재배이다. 인삼은 검은 무의 일종으로 초가 같은 작은 지붕으로 덮어서 경작하는데, 그 경작지는 마치 작은 마을의 축소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인삼은 강장 효과가 기나피(강장제인 키니네의 원료)보다 더 우수해서 활력을 유지해주는 강력한 보조약으로 취급된다. 이렇게 생산되는 모든 인삼은 전부 중국으로 넘어간다.
경제적인 면과 마찬가지로, 한때는 융성했으나 지금은 피폐해진 제국인 한국은 종교적인 면조차 몰락의 징후를 보인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초췌해진 국가가 된 것이다. 4세기 말께, 이 나라는 극동으로 통하는 중국 문명의 가장 원대한 대로였다. 수많은 건축물과 동상들, 도자기와 그림들이 당시의 부흥을 증명하고 있다. 그처럼 이 거대한 조각 동상(불상)들이 개성의 38도선 앞에서 오늘날에도 보초를 서고 있다. 당시 일본의 가장 뛰어난 건축가들은 한국인이었다. 한국은 전체적으로 보아 불교국가였다. 그리고 이론상으로 아직도 불교국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2천만 백성 중에서- 정확하게 우리가 숫자 통계를 가지고 있는 곳은 남한뿐이다- 절에 항상 다니는 불교 신자는 8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수천 명의 그리스도 신봉자와 얼마간의 신토이즘(천황에 대한 신앙) 초기 신자들, 그리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도 활동에 의해 개종한 약간의 신자들, 일본 경찰에 의해 의무적으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한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미신을 잘 믿는 동시에 무신론적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미신에 쉽게 빠지는 물신론자들이다. 그들은 천장에 걸어놓은 작은 흰나무 제단을 통해 자신들의 조상을 숭상하고, 터줏대감 신들이 자신들의 초가집을 떠나지 못하도록 작은 항아리 속에 가둬놓고 있다. 그들은 액일을 두려워하며, 상중일 때는 감히 뱀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하는데, 뱀뿐만이 아니라 빈대같이 작은 곤충을 포함한 어떤 동물도 죽이지 못한다. 시골에 가면 한 쌍으로 되어 서 있는 토템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것은 2m 높이의 나무 말뚝으로 기괴하게 조각된 머리에 갓을 쓰고 있고, 요란한 색이 더덕더덕 칠해져 있다. 그 말뚝 중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몇cm 더 큰데,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큰 말뚝에는 ‘천하대장군’, 작은 말뚝에는 ‘지하여장군’. 마을 노인들은 이 말뚝들을 경외하고, 젊은이들은 더 나이가 들기를 기다리면서 그 옆을 지나칠 때 말뚝들을 보지 않는다.
조용한 아침의 제국은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다지 발달돼 있지 않다. 1910년 일본의 침략 때 피신했던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라는 의미 있는 단어와 함께 1945년 미국인들의 뒤를 따라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조국에 남은 사람들과 거의 접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고국의 언어와 관습들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이같은 경우의 큰 예로 이승만 대통령을 들 수 있는데, 그가 한 연설문에서 스스로에게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붙일 때, 그의 호놀룰루식 억양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을 실망시켰다. 같은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아내(오스트리아 출신의 이스라엘 여자)를 ‘국모’(國母)처럼 간주하며 말을 했는데, 그와 같이 아내를 내세우며 소개하는 것은 아시아에서 거의 무례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이승만이 자신들의 아버지고 그의 아내가 자신들의 어머니라면, 자신들은 잡종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통해 분단과 억압 그리고 침략당하는 역사를 가져온 이 백성을 감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슬로건은 공산당을 무찌르는 방법을 잘 아는 것으로 귀결돼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가 단일화되게 하는 것이다. 그 외의 나머지는 아무 소용이 없는 말들이었다. 한국인들이 항상 알고 있는 정부 형태라고는 오직 ‘경찰국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미국의 민주주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습은 예전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간 이외에는 동물을 포함한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두 가지 분류법밖에 없었던 이 나라에서, 농민들은 여전히 가축처럼 취급됐다. 이전에 도시는 일본인들에 의해 각 집들을 묶어놓는 식으로 구분됐고, 그렇게 묶인 동아리의 대표가 정치적 책임을 맡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이 시스템을 해체시키려 노력했지만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었고, 일본인들의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이장·면장·읍장 등으로 아무리 작은 마을 단위라도 대표제로 구성됐음을 말한다-역주).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애국심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정치 문제가 모든 한국인들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라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미군과 소련군의 군사작전 대치점에서 만들어진 38도선은 마치 삽질로 지렁이를 정확하게 절단내듯이 이 나라를 남과 북으로 절단낸 상태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모든 광산자원이 집중돼 있고, 그중 90%는 석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북한은 풍요로운 나라이다. 일본인들이 그 전에 이 나라의 중요성을 알리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곳의 금광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전문가들이 평가한 바에 따르면, 이 금광들이 현재 개발됐다면(세계대전 중에 일본인들이 이미 다 파헤쳐버렸다) 북한은 세계에서 세 번째 금 생산국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북한 사람들은 지금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쌀과 다른 작물들은 남한에 집중돼 있다. 그 결과 먹을 것을 찾아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고, 전기 부족으로 인한 추위와 암흑을 피해 남한에서 북한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3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공산당의 갑작스러운 침략은 모든 한국인들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사실 1년 전부터 38도선으로 갈라진 양쪽에서는 작은 국지전으로 인해 하루 평균 2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1년이면 45일간의 홍수가 범람하는 우기에 시작됐다. 그때까지 나라 전체는 거의 의무적인 오침이 요구되는 (40도까지 기온이 올라가는) 더위 때문에 모두 그늘 속에서 쉬고 있어야 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성스러운 휴식을 파괴하면서,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은 혁명가 김일성은 거의 국가적 신성모독 행위를 범한 것이다. 이제 38도선은 한국의 땅만을 둘로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혼까지 갈라놓고 있었다. 철의 장막은 그들의 신(神) 위에까지 떨어진 것이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당시 파리 주재 한국 외교관 관련 기사
<font size="3"><font color="#006699">영사관서 전보 받고 전쟁 발발 알아</font></font>
프랑스에 파견된 유일한 한국 외교관은 전쟁 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자신의 사무실 문 아래에서 발견한다.
파리 주재 한국 외교관은 공사직을 맡은 손평식씨 1명이 있었는데, 그는 몇 주 전 갑자기 직에서 물러난 공아무개씨의 대리인 자격으로 와 있었다. 팔레 도르세(Palais d’Orsay) 234호에 한국의 영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 사무실은 한 사람이 사용하기에 충분히 넓은데다, 실내 배치도 잘 돼 있었다. 한국 영사관은 한국과 프랑스 정부 사이에 관계된 업무들과 파리에 거주하는 자국민들(25명)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손평식씨는 일요일 내내 영사관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영사관에 도착한 손씨는 사무실 문 아래에 놓인 전보(사진)를 발견하게 된다. 그 전보는 한국이 지난밤 공산당의 침략을 받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알려준다.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번역 유현준 프랑스 리모주 법원 번역·통역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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