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 지갑에 1천원짜리 지폐는 몇 장일까? 1만원짜리 지폐만 두툼하게 있다면, 당신은 1천원 지폐를 잘 쓰지 않는 고소득층임이 틀림없다. 지폐가 한 장도 없고 카드만 있다면, 당신은 최고 소득층이거나 빈곤층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지갑 안에 1천원짜리가 몇 장 들어 있다. 택시를 탈 때, 아침 출근길 슈퍼에서 휑한 눈으로 ‘컨디션’을 살 때, 동네 가게에서 담배 한 갑을 살 때 1천원 지폐는 손에서 손으로 건네진다.
1천원 지폐는 ‘서민경제학’의 화폐 단위다. 1천원이 갖고 있는 심리적 마지노선 때문이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1만원짜리는 비싼데 1천원이 모자란 9천원짜리는 싼 느낌이다. 2만원은 비싼데 1천원이 모자란 1만9천원짜리 물건은 마음 놓고 산다. 1천원의 마술이다. 단 1천원 때문에 서민들은 마술에 걸린다.
지난해 2월부터 1천원의 마지노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1천원의 가치가 깨지면서 서민경제도 따라 무너지고 있다. 단돈 ‘1천원의 행복’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현상을 통해 서민경제를 되짚어봤다. 우울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도와가며 희망을 찾는 서민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영철버거’도 원재료 인상에 항복1년 전쯤만 해도 달랑 1천원 지폐 하나로 고픈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김밥, 1천원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먹을거리였다. 밥뿐만 아니라 김에 햄, 계란, 당근도 들어 있었다. 김밥에 공짜로 따라 나오는 국물도 있었다. 토스트 빵 사이에 채소와 어우러진 계란부침과 새콤달콤한 케첩 맛이 일품인 길거리 토스트 역시 1천원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2월 김밥과 토스트는 1천원에서 1500원으로 오른다. 무려 50% 인상이다. ‘500원의 반란’이자, ‘1천원의 굴욕’인 셈이다.
원래 김밥의 대체재는 토스트와 햄버거였다. 대체재는 경제학 용어로 커피와 홍차, 쇠고기와 돼지고기처럼 서로를 대신해 쓰이는 물건을 말한다. 즉, A 물건 값이 오를 경우 B 물건 판매가 늘어나면 A와 B는 대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난해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김밥 한 줄 값이 1500원으로 오르자, 700원짜리 삼각김밥이 김밥의 대체재로 등장했다. 삼각김밥이 불티나게 팔린 것이다. 편의점 GS25가 지난해 1~11월 전국 3300여 매장에서 판매된 즉석 먹을거리(삼각김밥·김밥·도시락·샌드위치·햄버거) 수량을 조사해본 결과 700원짜리 삼각김밥인 ‘뉴전주비빔밥’이 1위를 차지했다. 2007년 가장 많이 팔렸던 1천원짜리 ‘참치햄샐러드김밥’은 2위로 밀려 순위가 뒤바뀌었다.
1천원짜리 먹을거리의 원조 격은 서울 안암동 고려대 근처 ‘영철스트리트 버거’. 길쭉한 핫도그 빵에 돼지고기·양배추·양파·청양고추·케첩·머스터드소스가 듬뿍 들어가 있다. 1천원만 내면 콜라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 2000년부터 이영철 사장이 직접 개발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영철버거 가격은 지난 9년 가까이 1천원이었다.
‘영원한 약속’이라고 광고했던 영철버거는 지난해 2월1일 끝내 1500원으로 올랐다. 그때 영철버거 본점 유리문엔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안내문’이 붙었다. 원유·곡물류의 가격 인상으로 불가피하게 가격을 인상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값을 올리자 곧 고객이 떨어졌다. 값을 너무 올렸다고 화를 낸 사람도 있었다. 이영철 사장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고민고민하다 값을 올렸다. 하루 매출액이 60%로 줄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난해 초 밀가루값 인상으로 빵값도 따라 20%나 올랐다. 국내산 돼지고기값도 30% 올랐다. 양배추값도 뛰었다. 매일 16~17시간 동안 점포에서 일했지만 공짜 콜라, 직원 3명, 임대료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남는 게 없었다.”
이 사장은 가격을 올린 이유 중 하나로 카드 수수료도 들었다. 그는 “요즘에는 1천원짜리를 먹더라도 카드를 낸다. 우리 가게의 카드 수수료율은 2.7%다. 시장에서 재료를 살 때는 현금을 줘야 한다. 그런데 카드는 당일 현금이 들어오는 게 아니어서 돈 회전이 안 됐다. 그래서 카드 결제를 몇 번 거부했더니 고발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조그만 가게에서 왜 그렇게 카드 수수료를 떼가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드 결제를 거부하면 ‘1천만원 미만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는 것을 대부분의 영세 사업자는 안다. 하지만 대형마트보다 더 비싼 카드 수수료를 내야 하는 이유는 알지 못한다. 영세 자영업자들은 카드 결제를 거부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비싼 수수료 때문이라고 호소한다. 신용카드 업체들은 전체 가맹점을 13개 업종별로 나눠 수수료율을 책정한다.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 대형 가맹점은 판매가의 1.5~2%를 수수료로 내지만 영세 자영업자나 중소업체들의 카드 수수료율은 2.2~3.4%에 이른다.
두부 한 모·과자 한 봉지 못 넘봐김밥뿐이랴. 설렁탕과 냉면, 자장면, 숙박료, 목욕료 등도 500~1천원씩 올랐다. 지난해 주부 이효주(38·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씨는 동네 시장에 두부를 사러갔다 끝내 사지 못했다. 두부 한 모가 1천원에서 1500원으로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발길을 돌려 또 다른 두부가게로 갔지만 그 집 역시 한 모에 1500원을 받았다. 그때쯤 회사원 오영식(39)씨는 친구와 함께 시내 자장면집에서 자장면 곱빼기 2그릇을 시켜 먹었다. 오씨가 자장면값으로 1만원을 내자, 주인은 1천원만 거슬러줬다. 오씨가 “곱빼기 두 그릇 값은 8천원이 아니냐”고 묻자, 주인은 “밀가루값이 올라 자장면은 3500원에서 4천원으로, 곱빼기는 4천원에서 4500원으로 올랐다”며 오씨를 힐끗 쳐다봤다.
1천원짜리로 과자 한 봉지 사먹을 수 없는 시대가 됐다. 포카칩·스윙칩·오레오초코크림·칙촉 등의 과자는 이미 1천원을 훌쩍 넘었다. 월드콘·구구콘·설레임 밀크쉐이크·부라보콘 등 아이스크림도 1500원까지 치솟았다.
원자재 가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학원비, 이발소·미용실 요금도 덩달아 올랐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메뉴코스트 가설’이라고 불렀다. 메뉴코스트 가설은 물가가 오르내려 가격 인상 요인이 생겨도 인상분이 메뉴판을 바꾸는 데 드는 비용보다 낮으면 굳이 가격을 바꾸지 않는 현상을 뜻한다. 하지만 요즘엔 반대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원재료 가격이 급격하게 오르면 더 오를 것까지 감안해서 가격을 올리는 것이다.
1천원의 굴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외국 화폐에 대해서도 쓴맛을 보게 된다. 지난해 3월17일 원-달러 환율은 1천원을 돌파했다. 지난 2007년 연평균 929원을 기록했던 환율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당시 947.2원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500선 중반까지 치솟았다. 새 정부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위해 집권 초부터 일정 정도의 환율 상승(원화 약세)을 내세웠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상승폭은 통제가 불가능해져버렸다.
고환율이 1천원숍에 직격탄지난해 자녀를 외국으로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들에겐 시름의 계절이다. 유학생이 많이 나가 있는 지역은 미국·캐나다·유럽·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일본·중국 등이다. 이들 국가의 통화 대비 원화는 전반적으로 약세였다. 지난 1년 동안 원-달러 환율은 50%가량 급등했다. 원-엔 환율은 지난해 초 100엔당 838원에서 최근 1500원대로 80% 정도 폭등했고 같은 기간 중국 위안은 약 50%, 유로는 약 30% 올랐다.
현재 다른 나라 돈과 비교한 1천원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2월26일 환율 기준으로 1천원을 달러로 바꾸면 66센트다. 엔화는 65엔이다. 중국 위안화로 바꾸면 5위안이다.
2007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만달러를 넘어섰지만 환율 상승과 경기 부진을 감안할 때 지난해에는 2만달러를 못 넘고 다시 1만달러 시대로 고꾸라질 것으로 보인다.
치솟은 환율은 서민에게 인기를 끈 1천원숍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1천원숍 제품은 대부분 중국산과 일본산, 파키스탄산 등에서 만들고 있다. 환율이 크게 오르면서 1천원짜리 물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천원숍은 물류공장에서 550∼600원에 물건을 받아와 1천원에 판매했으나, 환율이 오르면서 원가가 1천원 가까이 뛰었기 때문이다. 일부 1천원숍은 가격이 조금 높은 DC생활용품 매장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1천원숍 체인점인 다이소에서 파는 물건 가운데 절반가량만 1천원이다. 나머지는 2천~3천원이다. 안웅걸 다이소 이사는 “매장을 찾는 사람들이 지난해 대비 30% 늘었으나 전체 매출은 크게 늘지 않았다. 5천원어치 살 것을 3천원어치로 줄이거나 끝내 지갑을 못 여는 고객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이소는 최근 샴푸와 보디용품 등을 선보였는데,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기초·색조·기능성 화장품까지 내놓는다고 한다. 립스틱 효과다. 불황일수록 여성들이 립스틱을 많이 사는 현상을 일컫는다. 최소 비용으로 화려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아이템이 립스틱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4분기 국내 화장품 업체들의 실적만 봐도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의 영업이익이 각각 25.2%, 16.7%씩 늘었다.
2월27일 오후 서울 남대문시장. 쌀쌀한 바람이 불 때는 겨울 같다가 바람이 그치면 봄날 같은 날씨였다. 노점상에서 또는 옷가게에서 주인과 손님이 주고받는 1천원 지폐를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침체의 단면을 가장 잘 드러내보이는 현장이기도 했다. 한국은행 본점 맞은편에서 가방가게를 하는 김아무개(39) 사장은 오후 2시가 넘어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마수걸이를 하고 먹으려다 점심이 늦어졌다고 했다. 경기를 묻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젊은 사람들이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되니 서류 가방이 안 팔리죠. 환율이 너무 올라서 해외여행을 안 가니 여행용 가방도 안 팔리죠. 이마트 같은 곳에도 가방을 할인해 팔지. 죽을 맛입니다.”
‘점포정리 세일’ ‘왕세일’ ‘3장 1천원’ ‘창고 대방출’ ‘무조건 1천원부터’ 등의 광고 팻말이 곳곳에서 보였다. 일본말이 곳곳에서 들릴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요구르트 아줌마의 1천원 경기남대문시장에서 요구르트를 파는 정옥순(60)씨는 1천원 지폐를 세고 있었다. 그가 오늘 요구르트와 우유를 팔아 번 1천원 지폐는 53장. 5만3천원이었다. 1년 전만 해도 1천원 지폐를 100장 넘게 세었다. 10만원 넘게 번 셈이다. “불경기다 보니 요구르트를 많이 끊었어요. 옷가게에서 많이 끊었죠. 옷 장사가 가장 경기를 많이 타는 것 같아요.” 요구르트 아줌마가 인심 써 건네주는 요구르트를 끝내 뿌리치고 남대문시장을 떠났다.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지다 보니 1천원으로 수십억원을 벌겠다는 사람도 늘고 있다. 로또 한 장 역시 1천원이다. 편의점 업체 세븐일레븐이 지난해 9월 로또를 판매 중인 150개 점포의 로또 매출 현황을 조사해보니, 로또가 2천원에서 1천원으로 가격이 낮아진 2004년 8월 이후 2005년 12.2%, 2006년 -22.6%, 2007년 -12.5%로 판매량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하지만 물가 상승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지난해 4월부터 오히려 감소세가 둔화되면서 7월과 8월에는 2007년 같은 기간에 견줘 각각 4.7%, 8.9%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올해도 로또 인기는 꾸준하다. 지난 1월 전국적으로 판매된 로또복권 액수는 총 2383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판매된 로또복권 액수 2081억원보다 300억원가량 늘어났다.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5060분의 1이다. 하지만 경기침체가 극심한 요즘 같은 때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로또가 일주일을 기다리는 희망이다. 그런데 하루 1천원씩 매일 보통예금에 저축하면 10년 뒤엔 얼마가 될까? 국민은행에 물어보니, 보통예금 이자 0.1%로 복리 계산을 하면 10년 뒤 365만6227원(세후)을 손에 쥔다고 한다. 돈 벌 확률은 어느 쪽이 높을까?
1천원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그리 많지 않지만 1천원으로 그 몇십 배,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가치의 행복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해 구세군 자선냄비는 33억2천만원을 모금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기업과 단체 등의 기부는 지난해보다 줄었지만 1천원 지폐가 대부분인 개인 기부가 늘었기 때문이다. 구세군 홍보부 안건식 사관은 “15년 전에는 100원 동전이, 10년 전에는 500원 동전이 가장 많았다. 지금은 1천원 지폐가 가장 많다. 1천원 지폐가 전체의 80%를 차지한다. 장수로 따지면 300만 장쯤 되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행복을 함께 사는 1천원의 힘
1천원의 자동응답전화(ARS) 한 통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한국방송 는 1997년 10월부터 방송돼 지난해 12월까지 640억원을 모았다. 지금까지 질병과 빈곤에 시달리는 4만2천 명에게 의료비와 생활비가 지원됐다.
미시경제학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나눔에 적용해보자. 부자의 1만원과 가난한 사람의 1만원은 숫자로는 같을지 모르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느끼는 가치는 분명히 다르다. 부자가 1만원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경우 부자에게서 없어지는 1만원의 가치보다 가난한 사람이 얻게 되는 1만원의 가치가 훨씬 더 크다. 서민들은 자신의 1천원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줌으로써 훨씬 더 큰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1천원의 굴욕이 아니라 ‘1천원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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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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