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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 가면 쓴 사익의 얼굴

연쇄 살인 피의자 사진 공개한 <중앙일보> “조회 수 100만 건 돌파” 상업주의 자인한 셈
등록 2009-02-11 06:32 수정 2020-05-02 19:25

시작은 였다. 는 1월31일 새벽 1시52분 인터넷 조인스닷컴을 통해 7건의 살인을 저지른 강아무개(38)씨의 증명사진을 처음 공개했다. 중앙일보는 “2월2일치에서 2월1일 오후까지 단일 IP당 기사 조회 수가 106만 건”이라며 “단일 기사 조회 수가 100만건을 넘은 것은 조인스닷컴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밝혔다.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니 ‘알 권리’ 차원에서 공개했다는 얘기다. 1월31일치 는 강씨가 키우던 개와 함께 찍은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었다. 강씨의 ‘부드러운 표정’ ‘호감형 외모’를 강조하는 사진이었다. 이틀 뒤 문화방송도 강씨가 밥 먹는 사진 등 10여 장의 일상 사진을 공개하며 “잘생긴 외모에 숨은 살인마”의 면모를 강조했다.

<한겨레> 등 3개 일간지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7명의 여성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 강아무개씨의 사진을 전면 공개했다. 아무런 사회적 합의 없이 언론사 자의적으로 결정한 사진 공개는 “전형적인 상업주의 저널리즘”이라고 전문가들은 비판한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한겨레> 등 3개 일간지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7명의 여성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 강아무개씨의 사진을 전면 공개했다. 아무런 사회적 합의 없이 언론사 자의적으로 결정한 사진 공개는 “전형적인 상업주의 저널리즘”이라고 전문가들은 비판한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3개 일간지 빼곤 모두 공개

등 3개 일간지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강씨의 얼굴을 공개했다. 7명의 여성을 살해한 증거가 속속 밝혀지면서 언론은 강씨의 범죄 사실뿐만 아니라 ‘강씨의 각종 신상정보’까지 밝히느라 혈안이 됐다. 이는 5년 전 21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씨의 경우와 대조된다. 유씨의 얼굴은 마스크와 모자로 가려져 있었고, 그때도 ‘얼굴 공개’ ‘사형 집행’ 등의 주장이 일었지만 언론사들은 그의 ‘얼굴’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언론사들이 그 사이 ‘국민의 알 권리 추구’와 ‘공익’에 더 충실해진 걸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전형적인 상업주의 저널리즘”이라고 말한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헌법)는 “공익을 추구했다고 하기에는 공개의 ‘실익’이 아무것도 없다”며 “강씨가 이미 구속된 상황에서 사회 안전과 수사에 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원도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여죄가 있는 것 같다’는 판단이 들고 얼굴 공개로 추가 제보 등을 얻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지명수배 지침 등을 따라 공개할 수 있다”며 “체포 단계에서부터 신문·방송에서 얼굴을 무작위로 보여주자는 요구는 호기심에 부합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비평)는 언론사들의 이런 보도에 대해 “영국 황색신문 이나 가 다이애나비나 다른 귀족의 사생활을 폭로할 때 사용한 ‘국민의 알 권리’ 논리와 똑같다”며 “결국 판매 부수, 시청률, 광고 수주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상희 교수는 “기자나 방송사의 특종 욕심에 개인의 인격권과 그 가족의 인격권이 희생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의 사례를 거론하며 ‘공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도 근거가 미약하다. 영국 대법원은 2005년 아동성폭행범의 얼굴·이름 등이 보도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피해아동 및 가해자 가족의 신원이 노출되는 등 이들에게 중대한 해가 돌아갈 것을 우려해서다. 동거남에게 후천성면역결핍증을 고의로 감염시킨 가해자의 신원도 가해자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보도 금지했다. 유럽인권협약 8조 ‘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에 의해서다.

영국선 형 확정 전 공개하면 ‘법정모독죄’

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원은 “일부 언론에서 영국 등이 피의자나 중범죄자의 신원을 공개한다고 보도한 것은 잘못된 정보”라며 “영국에서는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 단계에서 얼굴 등 신상정보가 공개될 경우 ‘법정모독죄’에 해당하며, 보도금지라는 법원의 명령을 어기면 벌금형·구금형 등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미국은 피의자 신원 공개에 너그러운 게 사실이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헌법)는 “미국은 (신원 공개가 가능한) 공적 인물의 범위가 공무원에서 정치인, 유명 연예인에 이어 피의자와 피의자 가족으로까지 확대돼왔다”며 “그러나 이는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찬찬히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공개의 원칙에 관한 사회적 합의나 논의 없이 언론사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즉흥적으로 이뤄졌다는 지적이다. 표현의 자유를 높이는 차원에서 ‘얼굴 공개’는 언론사가 자체적으로 판단할 몫이라고 주장하는 박경신 고려대 교수(미국법)도 “현재 언론이 공익을 위해서 사진을 공개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밝혔다. 공익을 위해서 공개하겠다는 것은 강씨가 흉악범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인데, 이는 헌법이 정한 ‘무죄 추정의 원칙’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 상황에서 흉악범 얼굴 공개는 ‘과거 회귀’적이기도 하다. 는 1994년 지존파 사건 때는 얼굴을 공개했다며 15년 전 사례를 들어 공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경찰도 2월4일 ‘중범죄자에 관한 얼굴 공개 법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경찰이 2005년 이후 ‘인권 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을 만들어 호송 단계, 경찰관서 내 조사 단계 등에서 피의자·피해자의 신원을 노출시킬 수 있는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는 내부 지침을 정한 뒤 피의자들의 얼굴과 수갑을 가려주던 관행과도 반대로 가는 태도다.

피의자의 얼굴을 가리는 것은 국가가 형벌 권력을 행사하면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의무 사항이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정한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경찰이 검찰과 법무부 등과 협의해 ‘얼굴공개법’을 추진하는 것은 결국 국가의 최소한의 역할을 포기하는 셈이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헌법)는 “얼굴은 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신상정보인데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를 ‘흉악범’으로 전제하는 것, 혹은 형이 확실하더라도 그를 ‘인간이 아닌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예외 없이 초법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의 권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흔들리지 않는 원칙 논의할 때

경찰이 이런 법을 만들게 되면 뒤따르는 복잡한 문제도 생긴다. 도대체 중범죄자의 기준을 무엇으로 정하느냐의 문제다. 살인을 한 사람은 무조건 공개해야 하는지, 3명을 살해한 사람은 공개하지 않고 5명을 살해한 사람은 공개해야 하는지, 성폭행범은 어떻게 공개해야 하는지 등 너무나 많은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이다. 허일태 동아대 교수(형법)는 “한 번 그 원칙을 허물면 너무 많은 경우의 수에 따라 경찰이 일일이 대응하기 힘들어질 것”이라며 “경찰이 괜히 자승자박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백승호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팀장은 “이미 구속 수사하고 있는 강씨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도 공개의 실익이 없고, 중범죄 피의자였다가 무죄로 판결나는 경우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며 “그러나 공개를 원하는 여론이 높아 경찰에서 이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법 제정을 검토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언론사들의 자율 규제기구인 언론중재위원회(Press Complaints Commission)는 2000년 윌리엄 왕자의 사생활과 관련한 보도 지침을 마련하면서 “모든 사람은 사생활을 존중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언 브래디(1963~65년 5명의 아이들을 도끼로 찍어 죽인 연쇄살인범) 같은 연쇄살인범에게도 사생활은 존중돼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강조한 지침이다. 이번 강씨 얼굴 보도와 관련해, 우리 사회는 어떤 원칙을 갖고 있는지, 또 어떤 원칙을 가져야 하는지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분노와 격정은 잠시 내려놓고 말이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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