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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전 입법전쟁’ 공수 바꿔 재연

한나라, 이번에도 보수층 결집 효과 노려… 민주당, 정체성 혼란 속 또 병살타?
등록 2008-12-26 13:03 수정 2020-05-03 04:25

전쟁은 반복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4년 전엔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을 놓고, 이번엔 여야가 바뀌어 ‘이명박표 개혁입법’을 두고 국회 상임위 회의장 점거와 대치 등 극한 대결을 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폭주하는 다수 여당’과 ‘발목 잡는 소수 야당’이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경제 살리기’와 ‘지지층 결집’이라는 전쟁의 엇갈린 명분이 드러난다.
2004년 12월30일. 유인태 전 의원을 비롯한 당시 열린우리당 중진 의원들은 그해 하반기 정국을 격랑 속으로 밀어넣었던 국가보안법 폐지안 대신, 한나라당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대체입법 중재안을 내놨다. 핵심 쟁점이던 국가보안법 2조 반국가단체 조항에 ‘정부 참칭’ 대목을 삭제하고, 7조 찬양·고무죄를 선전·선동죄 조항으로 바꾸기로 한 내용이었다. 중진 의원들이 이런 중재안을 내놓은 것은, 법 개폐 논란이 이듬해까지 이어질 경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밝힌 ‘경제 살리기 중심의 국정운영’이 불가능해진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 날치기 상정한 12월18일 낮, 민주당 당직자들이 집기들로 막힌 회의장 출입문을 뜯어내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 날치기 상정한 12월18일 낮, 민주당 당직자들이 집기들로 막힌 회의장 출입문을 뜯어내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보안법 자충수로 열린우리당 분열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다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이미 폐지안 상정을 막으려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회의장·위원장석 점거, 한나라당 소속이던 최연희 법사위원장의 기습 산회에 맞선 최재천 열린우리당 법사위 간사의 기습 상정 논란, 여야 의원 사이의 물리적 충돌 등이 계속되던 상황이었다. 그만큼 사회적 논란도 컸다. 이 때문에 여당 중진들이 나서 ‘소모적 전투’를 끝내고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를 뒷받침하자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열린우리당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국가보안법 폐지안 연내 처리”를 공언한 천정배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자리를 내놔야 했다. “2005년 2월 임시국회 때 논의하자”던 한나라당과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국가보안법 폐지안은 물론 대체입법조차도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열린우리당 출신의 한 민주당 당직자는 “국가보안법이 처리되지 않으면서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를 만든) ‘난닝구(실용파)-빽바지(개혁파)’ 논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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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이 지난 지금, 한나라당이 국회 운영 과정에서 보이는 ‘오만함’의 명분도 결국 ‘경제 살리기’다. 한나라당은 12월1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의 출입마저 막은 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 상정했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연말까지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모든 관련 법령은 국회에서 처리해야 한다. 어떤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법안과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민주당과 법안 처리를) 협의해도 안 될 때는 국회법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다”며 “내년 2월 임시국회 때도 민주당이 관련 법안을 처리해줄 가능성은 제로다. 기다렸다간 시간만 끌고, 경제 살리기도 못한다”고 강조했다.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산업 스파이에 의한 산업 기밀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며 국가정보원법과 통신비밀보호법마저도 ‘경제 살리기 법안’이라고 강변했다.

한나라당은 이런 배짱에 민심이 호응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하다. 서울의 한 3선 의원은 “국민들도 올 한 해는 ‘촛불’ 때문에 정부가 아무 일도 못했다는 데 공감하는 것 같다. 내년 경제 상황이 더 나빠질 것으로 예상되므로, 한시라도 빨리 관련 법안을 처리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당 안에선 “중점 처리 법안을 ‘경제 살리기 법안’으로 포장했기 때문에, 당이 무리하게 추진하더라도 여론은 이쪽으로 올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나온다.

데자뷔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열쇳말은 ‘지지층 결집’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놓고 1년여 동안 줄다리기를 벌였다. 특히 2005년 중반부터 지지율이 10%대로 주저앉은 열린우리당은 ‘개혁 세력’을 끌어안으려고 필사적이었다. 2005년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2월9일. 마침내 김원기 당시 국회의장이 개방형 이사제 도입을 뼈대로 하는 사학법 개정안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했다. 개정안은 154명이 표결해 140명 찬성으로 가결됐다.

격렬한 몸싸움도 불사하며 법안 처리를 막았던 한나라당은 표결에 불참하는 대신, 맵찬 겨울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섰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전교조에 (아이들을) 못 맡긴다’는 어깨띠를 두르고 “열린우리당이 날치기한 것은 우리나라의 교육, 우리 아이들의 미래, 그리고 헌법 정신이었다”고 주장했다. 보수적 사학재단과 종교단체는 탄원서 제출, 사학법 개정 무효화 서명운동 등을 벌이며 한나라당의 전략에 폭발적으로 호응했다.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은 해를 넘겨 53일 동안이나 이어졌고, 2006년 1월30일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북한산에서 연 ‘산상회담’에서 사학법 재개정을 약속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사학법은 결국 2007년 7월 재개정됐다. ‘대선 후보 변수’와 맞물려 그사이 한나라당 지지율은 40~50%를 넘나든 반면, 열린우리당 지지율은 한 자릿수까지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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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도 못 막고 여론도 안 받쳐주고”

지금 172석을 가진 ‘공룡’ 한나라당의 보수층 결집 전략은 더욱 단순하고 선명해졌다. 국가정보원법·테러방지법·집시법 개정안 등 ‘이념 법안’이 쏟아지고, 재벌 편향이라는 비판을 받는 금산분리 완화·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도 강행할 태세다. 종합부동산세 개정안 등 ‘부자감세 법안’은 이미 강행 처리했다. 수도권의 한 중진 의원은 “한나라당 지지층 사이에선 ‘잃어버린 10년’ 동안 좌편향된 사회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다. 대통령 지지율이 반등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도, 당은 이런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 안에선 “막무가내 한나라당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탄식이 쏟아진다. 지지층 결집 전략을 구사하기엔 당의 정체성이 분명치 않다는 ‘반성’도 나온다. “민주당의 정체성은 그래도 진보에 가까운데, 18대 국회에 들어온 의원들이 17대보다 더 보수화됐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의 보수 법안 공세도 막지 못하고, 여론도 안 따라오는 것”이라는 얘기다. 한 재선 의원은 “10년 집권의 후유증으로 ‘야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국민의 정부 출범 뒤 야당으로 자리잡는 데 1년 반이 걸렸다던데, 우리도 야당으로의 변화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폈다.

이대로 가다간 상임위도 거치지 않은 법안들이 본회의에 무더기로 직권상정돼 처리되는 ‘상상 그 이상’의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는 이래서 나온다. 물론 김형오 국회의장 쪽은 “여야 합의 없이 쟁점 법안을 직권상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안에서도 “우리 뜻대로 법안을 밀어붙여도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으면, 내년 재보궐 선거와 내후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엄청난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변수는 여야 원내대표단 사이의 ‘물밑 채널’이지만 법안 처리 협의가 원활하게 진행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가능성은 20~30%라고 본다”고 잘라 말했다.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 쪽도 “한나라당의 태도는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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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권 한나라당 공보부대표는 “협의 가능성은 민주당에 달렸다”고 말했다. 반면 최재성 민주당 대변인은 “한나라당이 내놓은 법안은 협상을 통해 접점을 이끌어낼 만한 사안이 아니다. 법안 처리는 실력 저지하겠다”고 말했다. 벼랑 끝으로 치닫는 전쟁에서 웃을 사람은 누구일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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