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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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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기억해주십시오

등록 2007-10-19 00:00 수정 2020-05-03 04:25

이명박 후보의 교육정책비전에 대한 밀양 고등학교 선생님의 간절한 부탁

▣ 이계삼 밀성고 교사 ygs0720@hanmail.net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나는 경남 밀양에 있는 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일한다. 우리 반에선 스물네 명이 오순도순 살아간다.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는 아이도 있지만, 틈만 나면 컴퓨터 게임을 하려는 아이도 있고, ‘슬기샘’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학교 도서실에서 대출해온 책에 푹 빠진 아이도 있고, 가끔은 바깥에서 사고를 치는 아이도 있다. 내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아쉬운 점이란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고, 청소에 서툴고, 물건을 잘 간수하지 못하는 점이다. 나는 이런 기초적인 습관을 바로잡아주려 갖은 애를 쓰지만, 잘되진 않는다. 방황하거나 사고를 친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야단치지 않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다 보면, 한동안은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생활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더러 이 녀석들에게 제 부모님들 고생하시는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녀석들은 눈물을 비치기도 한다.

그나마 남은 이 소도시의 평화는…

나는 이 아이들이 좋다. 아이들의 삶에 진정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주진 못하지만, 저들과 내가 우정으로 서로 교류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래도 선생 노릇 하는 기쁨을 느낀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앞 분식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닭꼬치나 핫도그를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참 흐뭇하고 행복하다.

이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농사를 짓거나, 작은 가게를 하면서 말 그대로 ‘그럭저럭’ 사시는데, 20여만원이 되는 수학여행비나 1년에 네 번 등록금을 낼 때면 힘겨운 기색이 역력해 뵌다. 그래도 이 아이들은 졸업을 하고 대학생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스승의 날에는 꽃을 들고 한껏 차려입고 학교에 와서 옛 스승들에게 인사를 한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지만, 그래도 한국의 학교 교육이 이나마 지탱되는 건, 아이들이 이 고통스런 멍에를 지고 살면서도 그 나잇대의 고유한 선함과 싱그러움, 그리고 스무 살 이후에 만날 세상에 대한 동경만큼은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늘 미안하다. 왜냐하면, 나는 20년 전에는 저 자리에서 수업을 받는 학생이었는데, 그때보다 지금 저 아이들의 삶의 조건이 훨씬 더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힘들게 공부를 해도, 결국 저 아이들 대부분은 ‘88만원 세대’의 전사로,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결국 제 선함을 희생하고, 제 영혼을 팔아야 할 것이다. 이미 이 세상이 있는 힘껏 강퍅하게 자신을 다스리고 누군가를 짓밟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도록 빚어져버렸고, 별로 나아질 전망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전교조 활동가로서 ‘이게 아닌데’ 하는 회의 속에서도 꾸역꾸역 전교조 일을 하는 건 전적으로 저 아이들과의 우정 때문이고,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에서 저 아이들을 살게 하고픈 소망 때문이다.

현재로선 당선이 가장 유력해 보이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지난 10월9일 교육정책비전이라는 교육 공약의 큰 밑그림을 펼쳐 보였다. 지금껏 나는 쏟아지는 예의 그 ‘말폭탄’으로부터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애써 그를 외면해왔지만, 교육 정책만큼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그의 기자회견문을 내려받아서 프린터로 출력해 두 번을 읽고 마음이 먹먹해서 세 번을 읽었다. 그가 만약 당선이 된다면, 내가 이 소도시의 작은 학교에서 누리고 있는 이만큼의 평화도 사라질 게 분명해 보였다. 지금껏 우리 공교육은 쉼 없이 팔이 비틀리고 다리가 분질러져왔지만, 이제는 아예 숨통이 끊어질 차례가 된 것 같다.

이명박 후보가 발표한 교육정책비전을 두고 일각에서는 우리 교육을 30년 전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라고 비판을 한다. 이것도 어폐가 있다. 그건 30년 전보다는 지금이 그나마 낫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아이들의 삶은 지속적으로 고통스러워졌고, 그들이 감당해야 할 학습노동량과 빼앗긴 자유의 크기는 30년 전보다 끔찍하리만치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처지에 이명박 후보의 교육정책비전이 현실화됐을 때, 어떻게 될까? 이건 평균 이상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문제일 터이다. 모르긴 해도 교육 현장은 전쟁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촌놈들 좋은 등급을 인정할 수 없다?

이명박 후보의 교육 5대 프로젝트를 읽어가다 4번 ‘영어 교육’과 관련한 부분에서는 쓴웃음이 나왔다. 그는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세심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을 텐데, 굳이 한글날인 10월9일에 한국의 학교들을 영어학원으로 바꿔놓겠다는 발표를 한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날이 한글날임을 잊었음이 분명하고, 달리 말하면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로 수업이 가능한 교사 3천 대군을 양성해서 이제는 수업도 영어로 시켜보겠다는데, 대단히 안타깝지만, 이 공약 때문에 영어 조기 유학을 포기할 부모는 별로 없을 것 같다. 최근의 조기 영어교육 바람을 잡아주진 못할망정 아예 기름을 드럼째 부어주는 격이다.

이명박 후보는 전체 고등학교의 20%에 가까운 300개 고등학교를 기숙형 공립고, 자율형 사립고, 마이스터 고교 따위로 재편하겠다 한다. ‘20 대 80’ 이론에 맞추려고 숫자까지 계산을 한 모양이다.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 수가 부족해서 거기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니 아예 왕창 짓고 보자는 발상이다. ‘초6병’ ‘중3병’이 새로 생길 것이고, 아이들은 12년 내내 시험 준비를 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이 미친 시험 열풍에 맞서 아이들이 죽음으로 저항할 것이 두렵다.

그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시간 동안 정권은 상위권 대학들의 그 눈물겨운 ‘부잣집 학생 데려가기 프로젝트’에 ‘3불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어깃장을 놓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화끈하게 풀어줄 테니 알아서 데려가라 한다. 우리 지역 아이들 일부가 그나마 ‘인 서울’(In Seoul)해서 ‘지하철 2호선’을 탈 수 있었던 것은 내신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내신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강남, 특목고 출신 아이들과 그럭저럭 경쟁이 된 것이다.

대학 입시를 대학에 맡기면, 상위권 대학에서 내신이 홀대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이야기, 내 교육철학에는 정말 안 맞지만, 내신 1등급과 수능 1등급과 본고사는 각각 측정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의 준거가 다르다. 내신 1등급을 받기 위해 본고사 수준의 지적·논리적 직관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높은 내신 등급을 위해 3년 내내 기울여야 할 성실성과 꾸준한 정리, 흐트러짐 없는 자기관리는 그 자체로 고등 학문 탐구에 매우 긴요한 지적 자질이다. 내신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수능이나 논술로 입학한 학생들보다 대학 성적이 우수하다는 보고도 잇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내신을 이토록 홀대하는 것은 단 하나, 촌놈들, 가난한 집 애들도 좋은 등급을 받는 것이니, 그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고교 평준화는 지역별로 콕콕 박혀 있는 자립형 사립고와 특목고, 그리고 서울의 상위권 대학들의 내신 홀대와 비강남, 비특목고 차별로 인해 거의 해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이명박 후보의 이번 발표는 아예 그 거추장스런 속곳마저 벗어던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에는 기초학력 진단고사라는 일제고사를 치러서 ‘지진아’를 솎아내겠다 한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학교별 성적을 낱낱이 공개해서 일렬로 줄을 세운다. 그래서 국민들의 ‘알 권리’도 충족해주고, 덩달아 집값과 땅값도 조절해주고, 주거지의 등급도 확실하게 매겨주고, 학교끼리 전쟁을 치르게 한다. 이만하면 공교육이라는 이름 대신 ‘정글의 교육’이라는 이름을 쓰는 게 맞다. 그리고 공교육의 깃대는 뽑아버리는 게 맞다.

어디건 학교에 직접 찾아가보시길…

대통령 선거를 두 달 남짓 앞둔 지금, 이명박 후보가 한껏 만끽하는 대세론이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달리 다른 수가 안 보이니, 웬만하면 될 것 ‘같기도’ 한” 이른바 ‘같기도’ 대세론이다.

군에서 전역한 뒤 한 달가량 건설 현장에서 인부 노릇을 해본 나로선 ‘건설 사장님’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사장 노릇하기 쉬운 직종이 어디 있을까만, 체력과 카리스마, 무데뽀 정신까지 두루 겸비해야 하는 건설 사장님은 ‘사장 중의 사장’이라 생각한다. 바로 그 건설 사장님계의 선동열쯤 되는 이가 이명박 후보니,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 서울시장실에서 반바지에 샌들을 신은 제 아들을 히딩크 감독과 기념 촬영을 시켜주었던 ‘자상한 학부형’이기도 하다.

그가 교육정책비전을 발표하던 10월9일, 그날이 한글날인 것은 잊었겠지만, 교육 부문이니만큼 천하의 사장님도 긴장되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거울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물었을 것이고, 거울은 “당신은 모랫바람을 맞으며 열사의 중동 사막을 누비던 사장님이었고, 자식을 위해 위장전입을 마다 않던 학부형”이라고 대답해주었던 것 같다. 그는 이제 확신을 갖고 기염을 토한다. “불도저 운전석엔 제가 앉았습니다. 강남 학부형님들, 조·중·동 나으리들, 그동안 교육 때문에 힘들었던 거 제가 다 압니다. 이제 저만 따라오세요!”라고.

이명박 후보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우리 교육 현장에는 강남과 특목고와 거기에 갈 만한 아이들과 그들의 학부모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강남 아이들이건, 특목고 아이들이건, 조기유학을 떠나는 아이들이건, 그들은 세계화 시대의 전사로 살아갈 ‘인적 자원’이기 이전에 우선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지금 당장 놀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삶의 의미 앞에서 방황하는 바로 그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곳 시골 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까지 이명박 후보가 집권했을 때 펼칠 교육 정책으로 인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아니, 그저 이 나라 어느 고등학교건 직접 찾아가서 피곤에 절어 엎드려 자는 아이들을 단 몇 분만이라도 곁에 서서 지켜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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