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김치·깍두기 담기에 처음 도전했던 그해 여름, 짭쪼름매콤뿌듯한 그 맛!
▣ 권은주 기자
그해 여름. 마음 맞는 친구들은 아직 학생이거나, 백수거나, 외국에 있었고, 속칭 ‘고기 먹는 비구니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인정받을 정도로 오랜 ‘골드미스’의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여름휴가라고 어디 떠나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황금 같은 2박3일의 휴가가 너무도 아까웠다. 때마침 평소 내가 생활인으로서의 소양이 너무도 빈약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라면과 외식의 사슬을 끊고, 생활인의 밥상을 만들어보자는 데까지 생각이 나아가자, 밥상의 기본, 김치를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 김치. 그래 젊고 철없는 너희가 동해에서 희희낙락하는 동안 나는 생활의 지혜를 하나 마스터할 것이다. 뿌듯했다.
‘대·략·난감’한 엄마 대신 요리책을
문제는 레시피였다. 엄마의 레시피는 언제나 대략과 대충이 특징이었기 때문에 서점으로 갔다. 조리 과정이 가장 간단해 보이는 김치 관련 요리책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는 시장에서 장을 봤다. 배추 한 포기, 무 한 개, 새우젓, 멸치액젓, 파 반단 등등. 시장통에 있는 단골 오뎅집에서 아줌마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여쭤보니, 처음 하는 거면 배추를 통으로 절이지 말고, 썰어서 절이는 게 편하단다.
배추 머리에 십자로 칼집을 내고 네 조각으로 쪼갠 뒤 칼로 듬성듬성 썰어서 큰 볼에 넣고 소금 뿌린다, 팍팍. 평소 나의 작은 손을 생각해보니, 소금이 왠지 모자랄 것 같다. 소금을 조금 더 뿌린다, 팍팍. 하는 김에 깍두기용으로 무도 잘랐다. 무에도 소금을 뿌린다, 팍팍. 책에는 8시간쯤 기다리란다. 8시간 기다리면 새벽 3시니, 달밤에 김치 담그게 생겼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새벽 3시. 안심하고 배추가 담긴 볼을 봤는데, 그만 울 뻔했다. 너무 절여졌다. 포기로 절이는 것보다 잘라서 절일 때는 시간을 적게 잡아야 하는 것을 몰랐던 탓이다. 배추를 씹었더니 짜서 눈물이 난다. 무를 씹었더니 써서 눈물이 난다. 다시 마음을 다독이며 소금을 씻어내고 물에 담갔다. 속을 만들어놓고 배추와 무를 꺼내 다시 한 번 헹구면서 물기를 뺐더니 좀 무르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덜 짜다. 소쿠리에 건져놓은 배추를 보며 잠이 들었다.
조바심 때문인지 눈이 일찍 떠졌다. 새벽 4시쯤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아침 8시다. “이건 휴가도 아니고 철야도 아니여.” 배추를 먼저 버무리고, 깍두기를 버무렸다. 통에 옮겨담으니 생각보다 양은 적다. 떨리는 마음으로 맛을 봤다. 점수를 후하게 준다면 학생식당 김치보다 낫다! 절임의 실패를 이렇게 나쁘지 않게 마무리한 내가, 기특했다.
친구들아 매웠니, 미안
그 다음날에는 친구들을 초대해 조촐한 저녁 만찬을 나눴다. 김치 외에도 내가 생전 처음 만든 ‘회심의 요리’들로 메뉴를 짰다. 엄청나게 매운 닭감자조림이 주메뉴였고, 매운맛 카레는 선택메뉴, 반찬은 김치와 깍두기. 친구들은 생각보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마도 집에 가는 길 화장실에 몇 번쯤 들렀을지도 모른다. 김치 담그기와 함께했던 나의 2박3일 첫 여름휴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뒤로 네 번의 여름휴가와 셀 수 없는 수의 월차를 썼고, 된장국은 짭쪼름하게 콩나물국은 시원하게 끓일 수 있게 됐지만, 김치와 깍두기는 다시 담가보지 못했다. 내 인생 유일했던 김치들아, 너의 그 짭쪼름매콤했던 맛이 그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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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보세요, 초보 요리사
영국엔 제이미 올리버, 한국엔 나물이
밥숟가락 계량법의 대표주자 나물이(www.namool.com)는 엄마보다 나은 나의 음식 선생님. 강요하는 것도 고정된 틀도 없다는 것이 초보자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원동력. 책을 옆에 두고 보고 싶다면 (영진닷컴), (랜덤하우스중앙) 등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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