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선 분쟁으로 뜨거운 한나라당 대선 주자들, 그들의 냉혹한 생존 계산법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우리 정당사에서 경선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본선에 나갈 대표선수를 뽑는 경선이 파열음 없이 치러지고 마무리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독자 출마· 경선 불복… ‘갈등의 역사’
1987년 양김(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열에서도 경선 갈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87년 10월22일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는 “국민과 전 당원의 여망인 후보단일화를 위해” 경선이 불가피하다고 제의했으나, 김대중 상임고문이 “정보·공작 정치 아래서 불미스런 사태가 우려된다”며 거부했다. 이후 임시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총재가 대선 후보로 지명되자 김대중 고문은 이에 반발해 탈당하고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동교동계 출신의 한 전직 의원은 “단일화가 실패한 데는 경선 대의원 구성 문제가 있었다. YS가 혼자 다 해버렸다”고 회고했다. 해보나 마나 한 경선에 출마할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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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엔 3당 합당(민정+통일민주+공화=민자당(민주자유당))의 후유증이 나타났다. 당시 민정계와 민주계는 치열한 세 대결을 벌이다 김윤환 의원을 주축으로 한 주류파가 김영삼 대표를 후보로 옹립하자 반김영삼 진영에서 진통 끝에 이종찬 의원을 경선 후보로 확정했다. 그러나 막판 세 불리를 느낀 이 후보가 일방적으로 경선을 거부했다. 김영삼은 그해 대통령이 된다.
1997년과 2002년엔 최근 민주당(박상천 대표)에 합류한 이인제 의원이 등장한다. 97년 신한국당 경선에서는 ‘9룡’이라 불렸던 9명이 출발선을 떠났으나 김윤환·이홍구·박찬종 고문이 잇따라 후보를 사퇴했다. 이인제 의원은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패한 뒤 국민신당을 창당해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2002년 대선 때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중도에 포기하고 딴 길을 간다.
열린우리당 완전국민경선제도 신경쓰이고…
2007년 한나라당의 경선 분쟁은 과거와 양상을 달리한다. 과거 대선에서는 씨름으로 치면 승부 중에, 혹은 승부가 가려진 뒤에 판을 뒤엎는 경우가 많았는데 현재는 샅바싸움을 하다가 판이 깨지게 생겼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경선 불참은 있을 수 있지만 경선 불복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2005년 개정된 공직선거법에 따라 당내 경선에 출마했다가 탈락한 후보는 대선에 출마하지 못한다. 당내 경선에 후보로 등록한 시점이 기준이다. 한 번 당내 경선에 등록한 이후 본선에 얼굴을 내밀려면 이겨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 또 하나는 예선이 곧 본선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따라서 경선 규칙의 유·불리가 치열한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실 2002년 이전에는 특정 정당의 대선 후보를 힘센 사람이 낙점을 하든, 가위바위보나 사다리 방식으로 결정하든 국민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3김이라는 ‘큰손’이 사라진 이후 민주적인 경선은 더욱 의미가 커졌고 이때부터 ‘민심’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의 박근혜·이명박 두 주자의 경선 규칙을 둘러싼 분쟁의 씨앗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대표 시절 당 혁신위원회(위원장 홍준표 의원)는 두 차례의 대선 패배의 교훈을 민심과의 괴리에서 찾았다. 그리고 ‘대의원:당원:국민:여론조사=2:3:3:2’라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의 경선이 ‘당원:국민=5:5’(실제 투표에서 국민 선거인의 참여는 저조해 실제 민심 반영률은 30% 안팎이었다)였던 데 비하면 비교적 복잡했다. 설계대로라면 민심과 당심의 비율은 5:5였지만 이때 전체 선거인 규모를 따로 규정하지는 않아 훗날 ‘룰’에 다시 손을 대야 하는 빈틈을 남겼다.
한나라당 혁신위의 안이 최초로 적용된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경선 규칙이 문제없이 작동했다. 문제는 2007년 대선이다. 2002년 절반의 국민참여를 보장했던 열린우리당은 완전국민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를 채택하면서 투표 참여를 원하는 국민에게 문호를 열어버렸다. 총선거인 수가 수만에 그칠지 수백만이 될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제도여서 그 파장을 가늠하기 힘들다. 지지율 두 자릿수를 넘어가는 변변한 후보가 없지만 후보선출 제도의 잠재력, 즉 흥행성과 폭발성은 한나라당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경선 규칙을 새로 정하지 않으면 총선거인 규모를 2002년 경선 규칙을 준용해 4만 명 수준에서 정해야 하는데, 이는 경쟁 상대가 전국을 ‘으으’하면서 돌아다닐 것과 비교하면 ‘체육관 선거’처럼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체 선거인단의 규모를 늘리자는 이 전 시장 쪽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고 지난 3월 양 주자는 “8월20일 이전에 20만 명이 참여하는 경선을 치른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선거인단은 대의원 4만 명, 당원 6만 명, 국민 6만 명, 여론조사 20%(4만 명)로 각각 2:3:3:2의 비율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때 원안에 처음 ‘손질’이 가해진 셈인데, 여론조사 결과를 선거인의 투표율에 연동해 후보들에게 표를 나눠줄 것인지, 여론조사 반영분 4만 표를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각 후보들에게 배분할 것인지 결정되지 않았다. 이것이 양쪽이 두고두고 싸우는 불씨가 됐다.
‘버티면 된다’와 ‘바꿔야 산다’
말로는 복잡해 보이지만 지난해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살펴보면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다. 2006년 4월25일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는 대의원·당원·국민을 합한 총선거인단이 9452명이었고 이 가운데 3839명이 투표에 참여(투표율 40.6%)했다. 여론조사 반영분 959표(3839/4)는 후보별 여론조사 득표율에 따라 오세훈(선거인단(대의원+당원+국민) 실제 투표 1343표)·홍준표(″1053표)·맹형규(″1443표) 후보에게 각각 624표, 172표, 163표씩 배분됐다. 오 후보는 현장 투표에서는 맹형규 후보에게 100표 뒤졌지만, 여론조사에서 65%의 몰표를 얻은 데 힘입어 361표 차로 역전승했다.
이때의 여론조사 결과를 표로 환산해 반영하는 방식은 현재 박 전 대표가 주장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여론조사 반영분 959표는 총 투표수 4798표(3839(선거인단)+959(여론조사 반영분))의 20%에 해당한다. 대선 경선에서도 실제 투표에 참여한 선거인단 수에 맞춰 여론조사 결과를 20% 반영하면 된다는 것이 박 전 대표의 주장이다.
따라서 실제 투표율과 관계없이 20%, 전체 선거인단을 20만 명으로 할 경우 4만 표를 반영해야 한다는 이 전 시장 쪽 주장은 이전 선거에서는 적용한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이다. 대선 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박 전 대표에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 전 대표가 여론조사 반영분을 높여 경선 규칙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의도였던 셈이다. 그렇게 해야 민심이 50%에 가깝게 반영된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박근혜 캠프 쪽에서는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새로 제안된 룰이 합의되지 않는다면 기존 관례를 준용할 테고 그러면 2006년 지방선거 경선 때 적용했던, 즉 박 전 대표 쪽 주장의 방식대로 경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판’인 강재섭 대표는, 지난해 7월 전당대회에서 박 전 대표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고 4·25 국회의원 재보선 이후 사퇴 위기에 몰렸을 때도 박 전 대표가 든든한 후원자가 돼준 바 있다.
그런데 믿었던 강재섭 대표가 뒤통수를 ‘쳤다’. 5월9일 발표된 강 대표의 중재안은 형식적으로는 양쪽 캠프의 중간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강 대표는 선거인단 투표율이 낮을 경우엔 66.7%(2/3)로 가정하고 여론조사 반영분을 각 후보에게 배분하는 방안을 5월21일 전국위원회 안건으로 상정하겠다고 밝혔다. 전국위원회는 1천 명가량이 참석하는 ‘미니’ 전당대회다. 일종의 최고의결기구인 셈이다. 여론조사 반영분을, 실제 선거인단의 투표율(2006년 서울시장 경선 당시 투표율은 40.6%였다)에 연동시키자는 박근혜 캠프의 안과 투표율을 100%로 가정한 이명박 캠프의 중간 정도의 수치를 선택했다지만 원안에 비해 이명박 전 시장에게 유리한 방안임은 분명하다.
민심뿐 아니라 당심도 ‘이명박’
게다가 지역별 순회경선 방식이 아니라 하루 동안 전국에서 동시에 투표하고 개표하는 방식은 이 전 대표 쪽이 줄곧 주장해오던 방안이어서 박 전 대표가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린 셈이 됐다. 이런 방식은 관전자의 재미마저 반감시켜 흥행 면에서도 문제가 있을 텐데, 강 대표는 큰 쟁점(여론조사 반영분 분배 방식)을 처리하면서 이 전 시장에게 ‘덤’까지 안겨줬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2006년 한나라당 서울시장 경선 결과는 정치권에 ‘민심이 움직이면 당심이 따라온다’는 교훈을 남겼다. 노무현 후보가 ‘이인제 대세론’을 넘어 광주 경선에서부터 ‘노풍’을 일으킨 데는, 경선 며칠 전 발표된 한 방송사의 여론조사가 주효했다. 노 후보가 이회창 후보에 1.1% 포인트차로 이기는 가상 대결 결과였다. ‘오풍’ 역시 민심 덕분이었다. 정치적으로 훈련된 한나라당의 당원과 대의원들은, 다른 두 후보들에 비해 경선에 늦게 뛰어들어 대의원과 당원들의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오세훈 후보를 선택했다. 당심은 ‘본선 경쟁력’에서 나오고 본선 경쟁력의 바로미터는 민심이다. 정치권의 상식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 전 시장은 민심에서, 박 전 대표는 당심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는 게 한나라당 안팎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이 전 시장은 현재 당심에서도 더 이상 불리하지 않게 됐다. 가 5월8~9일 한나라당 대의원 1201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은 각각 44.3%, 42.3%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부터 실시한 네 차례의 같은 조사에서 이 전 시장은 늘 2~5%포인트의 우위를 지켰다. 게다가 이 전 시장은 일반 국민 대상의 여론조사에서 확고부동한 우위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민심이 5:5로 반영되든 7:3으로 반영되든 불리할 게 없다. 물론 여기엔 별다른 변수 없이 현재의 지지율을 경선 때(8월20일께)까지 이어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불확실성을 없애고 싶은가
그런데도 왜 이명박은 박근혜를 밀어붙일까. 그는 불확실성을 없애고 싶어한다. 박 전 대표는 궁지에 몰리더라도 탈당하지 못하거나 탈당하더라도 세력으로서의 의미는 없을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경선을 하면서 일말의 불확실성을 남겨두는 것보다는 경선이 없더라도 확실하게 후보가 되는 쪽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본선은 그 다음의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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