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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마피아’를 잠재우다

등록 2006-07-13 00:00 수정 2020-05-03 04:24

독일 축구계 실세 ‘바이에른 뮌헨’과 다투고 떠났던 클린스만의 감독 부활기… 수문장 올리버 칸 갈아치운 세대교체작업, 4강 진출로 절반의 성공을 거두다

▣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2006 독일 월드컵 개최국 대표팀을 이끌었던 위르겐 클린스만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독일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였다. 클린스만은 특히 1994년 미국 월드컵 예선전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이 3 대 2로 졌을 때, 2골을 몰아넣은 장본인으로 우리에게 유명하다. 1978년 14살의 나이로 독일 분데스리가 2부리그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클린스만은 슈투트가르트-인테르밀란-AS모나코-토트넘 홋스퍼-바이에른 뮌헨-삼프도리아를 거치면서 총 483경기 207골을 터뜨렸다. 1987~88년 분데스리가 득점왕,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1991년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인테르밀란), 1995년 영국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선수, ‘유로1996’ 우승 등 그는 1990년대 중반까지 독일 축구의 전성기를 이끈 최전방 공격수였다.

스포츠용품 회사 경영하던 아웃사이더

화려한 현역생활을 했음에도 클린스만이 전임 감독 루디 러에 이어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등극한 것은 다소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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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그의 뛰어난 골 결정력과 폭넓은 경기 운영 능력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는 현역에서 은퇴한 뒤 사실상 독일 축구계를 떠나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부진한 탓에 쫓겨나다시피 ‘삼프도리아’로 임대된 이후, 미국 ‘LA갤럭시’의 기술고문으로 잠시 있다 모든 축구 생활을 마감하고 스포츠용품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42살의 나이로 보아도 그가 2006 독일 대표팀 감독을 맡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독일 축구계가 클린스만을 독일 사령탑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한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클린스만은 독일 축구의 심장인 ‘바이에른 뮌헨’의 기준으로 볼 때, 분명 아웃사이더에 불과하다. 대부분 분데스리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서 마감하는 독일 대표선수들과 달리 그는 이탈리아-프랑스-잉글랜드 리그를 두루 거친 이방인이었다. 특히 그가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뒤 실망스런 경기를 보인 것은 바이에른 뮌헨 축구계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클린스만은 바이에른 팬들과 축구 관계자로부터 노골적인 비난을 받았고, 이를 참지 못해 이른바 ‘바이에른 마피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팀을 떠나버렸다.

주지하듯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빼고 역사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00년에 창단한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에서 20회 우승, 독일 축구협회(FA)컵 13회 우승, 유럽 챔피언스리그 4회 우승, UEFA컵 1회 우승 등 독일 클럽 역사에서 오랫동안 지존으로 군림했다. 1999년 리그에서 우승한 이래 2002년 도르트문트에 우승을 내주었을 뿐 모든 우승의 주인공은 바이에른 뮌헨이었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는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있고, 영국 프리미어리그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 ‘아스널’과 ‘첼시’, 이탈리아 ‘세리에A’ 리그에는 ‘유벤투스’와 ‘밀란’이라는 오랜 호적수들이 있지만, 독일 분데스리가에는 오직 바이에른 뮌헨과 바이에른 뮌헨이 아닌 팀으로 양분되었다.

독일 역사에서 바이에른주는 그 자체로 독립된 공화국을 유지했다. 분데스리가의 구도처럼 독일의 16개 주도 ‘바이에른주’와 그렇지 않은 주로 구분된다. 바이에른은 비스마르크 대제가 독일을 통합한 19세기 말까지 가장 크고 강력한 자치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인구 120만에 불과하지만 뮌헨은 현재도 베엠베(BMW)·알리안츠 등 독일 다국적 기업의 본사가 있고, 독일 경제와 문화의 중심으로 군림하고 있다. 바이에른 뮌헨의 시민들은 축구경기장에서 응원할 때도 독일 연방기보다는 자치주의 하늘색 기를 더 선호한다. 유럽에서 뮌헨 시민들을 만나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면 독일보다는 바이에른에서 왔다는 말을 더 많이 한다.

베켄바우어 대 클린스만

독일 안의 또 하나의 공화국 바이에른 축구의 심장인 바이에른 뮌헨에서 잠시 선수생활을 했던 클린스만이 바이에른의 계보를 거부한 것은 그 자체로 독일 축구계에서 파문을 의미한다. 지금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들은 피사로, 산타크루스, 사뇰, 루시우, 알리 카리미 등 다국적 선수들로 구성됐지만 통독 전까지는 순수 게르만 선수들이 압도적이었다. 클린스만은 독일 축구계가 바이에른 뮌헨 출신 마피아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바이에른 뮌헨 출신의 축구선수들이 독일 축구계를 장악한 상황에서 클린스만은 어떻게 감독으로 등극했을까? 클린스만이 감독이 된 것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선수생활을 할 때 감독이었던 현 독일축구협회 회장 마이어 보르펠더의 힘이 컸다. 사실 유로2004 이후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루디 러를 이어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 가장 유망했던 사람은 2000년대 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이끈 오트마르 히츠펠트였다. 더욱이 히츠펠트 뒤에는 바이에른 뮌헨의 구단주이자 2006 독일 월드컵 조직위원장인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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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펠더가 클린스만을 감독으로 낙점한 것은 물론 친분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젊은 클린스만을 통해 독일 축구의 세대교체를 원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이후 독일 축구는 배타적인 분데스리가 운영과 세대교체의 실패로 하락세를 거듭했다. 또한 바이에른 뮌헨 출신 선수들 중심의 대표 선발은 곧 독점의 폐해로 이어졌다. 클린스만 감독은 이러한 독일 축구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보르펠더의 부름을 받았다.

클린스만과 바이에른 마피아들의 마찰이 정점이 이른 것은 바로 바이에른 뮌헨 터줏대감 올리버 칸의 주전 수문장 탈락이었다. 클리스만은 독일 대표팀의 세대교체의 상징적인 시도로 대표팀 주전 수문장을 올리버 칸에서 아스널에서 뛰고 있는 옌스 레만으로 교체했다. 바이에른 축구팬들은 부실한 수비라인에 대한 질책과 함께 올리버 칸의 탈락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 갈등은 본의 아니게 그의 주거지와 가족 문제로 번지기도 했다. 축구협회와 언론의 질타는 계속됐고, 마침내 월드컵 조직위원장 베켄바우어마저도 뒷문을 튼튼히 지키지 못하는 클린스만의 용병술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여론이 베켄바우어 대 클린스만으로 집중되자 베켄바우어는 월드컵을 목적에 둔 상황에서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클린스만을 우회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독일 현지 방송은 독일이 월드컵에서 골을 허용할 때마다 레만과 칸의 얼굴을 교차해 보여주었는데, 이를 통해 독일 수문장 논란의 배경에 감추어진 ‘바이에른’과 ‘반바이에른’의 권력싸움을 읽을 수 있다.

이제 유로2008을 향하여

그러나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글린스만호는 예선전에서 승승장구했고, 16강전에서 난적 스웨덴을, 8강전에서는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를 연파하며 세대교체론의 힘을 받기 시작했다. 슈바인슈타이거, 루카스 포돌스키 등 신예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독일은 4강전에서 이탈리아에 연장에서 무릎을 꿇었고, 그의 ‘탈바이에른적’ 세대교체론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클린스만의 세대교체론 속에는 바이에른 축구 마피아들에 대한 무언의 항의와 ‘탈바이에른 정서’가 숨어 있다. 폐쇄적인 바이에른 축구 마피아의 블록을 넘어 평등한 독일 축구의 균형추를 찾고자 했던 클린스만호는 이제 ‘유로2008’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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