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보수파 ‘경제통’이 당 경제정책 독점… 민생문제 대안 모색할 시스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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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재정 건전성을 악화시키고 고소득층에게만 유리한 소득세 인하를 반대한다.”
열린우리당이 8월30일 노동자·개인사업자에 대한 소득세 1% 일률 인하 등의 내용이 담긴 경기 활성화 대책을 발표하자 참여연대는 다음날 위와 같은 제목의 성명을 냈다. 성명은 이런 요지였다.
당 ‘정체성’과 어긋나는 감세
“열린우리당의 안에 따르면 감세 혜택은 저소득층보다 고소득층에 집중될 것이다. 감세가 이뤄지더라도 이미 면세점 이하에 있었던 560만명의 근로소득자(전체 근로소득자의 47%)와 210만명의 자영업자(전체의 50%)는 수혜를 전혀 누릴 수 없으며, 소득세의 과표를 상위구간과 하위구간 모두 일률적으로 인하하는 것 역시 결국 고소득층에 더 많은 세부담 경감 혜택을 줌으로써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거기다 열린우리당이 특소세 인하 대상으로 거론하는 PDP TV나 프로젝션 TV 등은 가격이 최소 400만원대에서 1천만원대를 넘어 중산층이 소비할 것은 아니므로 이들에게 특소세 인하 혜택은 큰 의미가 없다.”
홍재형 정책위원장은 당시 “세출확대를 주요 정책으로, 감세를 보조로 하는 정책조합(Policy Mix)”이라고 설명했다. 세출 확대는 2005년도 정부예산 시안보다 2조5천억원의 세출을 늘려 △연구개발(R&D) 지원 △교육 △중소기업 △사회간접자본(SOC) △보육지원 등에 사용하려 한다고 그는 밝혔다. 세출 확대는 정부·여당이 경기활성화 대책으로 꾸준히 거론해오던 것이어서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세출을 확대하면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취업자보다는 실업자 △취업자 가운데서도 잘나가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보다는 비정규직에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열린우리당이 주장해온 ‘정체성’과 어긋날 게 없었다.
문제는 감세였다. 일률적 감세는 ‘세금을 깎아준다’는 점에서 외견상 솔깃해 보이지만 그 효과 면에선 빈부격차를 심화하는 정책으로 대개 평가된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과감한 감세’를 경기활성화 대책으로 제시해왔는데, 이에 열린우리당은 소득역진 효과가 있다며 반대해왔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뒤집은 것이다.
따라서 8·30 대책은 ‘중산층과 서민에 정책의 초점을…’ ‘경제성장을 하더라도 계층간 균형이 이뤄지는 따뜻한 성장을…’ 따위의 그동안 열린우리당 주장을 무색케 하기에 충분했다. 열린우리당 일부 당원들도 중앙당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정책결정의 이면을 의심했다. “세금은 소득 재분배 효과가 있기 때문에 많이 버는 자에게 세금을 많이 물려야 함에도 감세정책을 편다면 결국은 부자들의 버티기, 냉소에 무릎을 꿇은 격이다.”(ID=hansikey) “열린우리당이 그렇게 외치던 소득 재분배라는 것이 부자는 더욱 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군요.”(ID=cuby1265)
그들을 빼면 아는 사람이 없다?
8월30일 정책 발표 뒤 한주 동안 열린 공중파 방송사 텔레비전 토론에서도 기이한 양상이 빚어졌다.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골프채, 보석 같은 고가품의 특소세를 폐지해주는 게 누구를 위한 정책이냐”며 열린우리당을 공격했다. 얼마 전까지 한나라당이 감세를 주장하는 데 대해 열린우리당이 “그건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이라고 몰아붙이던 양상이, 정반대로 뒤집힌 것이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토론에서 궁색한 처지에 몰렸다.
그럼에도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외견상 잠잠하다. 지도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의원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라크 추가파병, 국가보안법 개폐를 둘러싸고 그룹을 지어 몰려다니면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것과 비교해 의아스러울 정도다. 열린우리당의 한 실무 당직자는 “감세 처방은 경제·민생 문제에서 당의 정체성과 직결된 사안”이라며 “386이며 재야 출신, 진보·개혁파 의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감세정책을 결정하게 된 과정을 보면 열린우리당의 구조적 문제점이 한층 실감난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7월부터 획기적인 경제처방에 관심을 두고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자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열린우리당은 홍재형 정책위원장, 강봉균·정덕구·안병엽·김진표 의원을 비롯한 전직 경제장관들, 이계안 제2정책조정위원장(전 현대자동차 회장) 등으로 비공식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 이들은 “열린 자세로 모든 수단을 검토한다”는 원칙 아래서 모두 세 차례 정도 모임을 열었다.
이들은 열린우리당에서 흔히 ‘경제통’으로 꼽히는 사람들이다. 경제부처 장관 또는 대기업 경영자 출신이라는 경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전직 경제장관들 가운데 장관 재임 중 ‘한국 경제를 일으켰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만한 사람은 꼽기 어렵다. 참여정부는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을 전임 정부에서 추진했던 부동산·신용카드 거품 드라이브의 ‘후과’ 탓으로 돌리는데, 이런 진단을 전제할 때 이들은 전임 정부의 정책 실패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운 인사들이었다.
문제는 이들을 빼고 나면 그마나 경제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열린우리당이 151명(김원기 국회의장은 당적 이탈)의 의원을 확보하고 있지만, 지난 총선에서 큰 폭의 물갈이가 이뤄져 초선이 108명에 이른다. 초선 의원들 가운데 재정경제위, 정무위 등 경제 분야 상임위에 들어간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은 아직 “나는 아직 좀더 공부해야…” 상태라고 한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경제를 주제로 한 텔레비전 토론에 출연할 의원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고민스럽다”며 “개혁 성향의 초선 의원에게 타진해보면 다들 자신 없다며 망설여, 결국은 ‘기존의 경제통’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초선 “뭘 알아야 얘기할 것 아니냐”
열린우리당의 한 386 초선 의원은 의 물음에 “감세정책이 꼭 들어맞는 것인지 의문스럽기는 하다”며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는 처지에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초선 의원은 “솔직히 경제 문제로 들어가면 ‘뭘 알아야’ 이야기를 할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이것은 ‘경제정책 결정의 소수 독점’ 문제로 요약된다. 홍재형 정책위원장은 8·30 대책을 발표하면서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셋째도 경제”라고 의제 설정의 우선순위를 밝혔다. 천정배 원내대표가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전에서 외쳤던 “첫째도 개혁, 둘째도 개혁, 셋째도 개혁”이란 구호를 패러디한 것으로 읽혔다. 그 패러디엔 나름의 선의가 담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에선 경제 문제로 들어가면 개혁·진보적 대안과 보수적 대안이 함께 제출된 가운데 폭넓은 토론이 벌어지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경제의 소수 독점’이 ‘보수 편식’을 가져오는 구조적 문제점인 셈이다.
8·30 대책에는 이와 함께 ‘졸속’의 문제도 엿보였다. 열린우리당은 ‘당 차원의 주도적 경제처방 제시의 기회’라며 8월30일 경제정책 대토론회를 진작부터 예고했다. 그런데 이렇다 할 ‘주도적 해법’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천정배 원내대표는 하루 전날에 이르러서야 홍재형 정책위원장에게서 ‘소득세 1% 일률 인하’를 최종안으로 보고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개혁 성향 실무 참모진에서는 “정체성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며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이 제안의 정당성과 효과, 정치적 부작용 따위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심지어 시간에 쫓기다 보니 정책 발표에 앞서 주무부처인 재정경제부의 동의마저 충분히 끌어내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계와 보수언론이 유포하는 경제위기론의 이면에 깔린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나름대로 꿰뚫고 그에 맞서온 편이다. 노 대통령은 9월5일 문화방송 프로그램 대담에서도 “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강조함으로써 재계가 자기한테 유리한 정책을 끌어내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럴 때 노 대통령은 ‘지도자로서의 담대함’ ‘기개를 갖춘 지도자’ 개념을 강하게 의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8·30 대책을 주도한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경제위기론에 따른 심리적 부담을 훨씬 강하게 의식한 것 같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대책을 발표하면서 “정부여당이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진력한다는 확실한 시장에 제공해야”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감세에 따른 투자 촉진 효과보다는 ‘심리적 처방’의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이때의 심리적 처방이 일부 보수·부유층을 겨냥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열린우리당의 일부 당원들이 “결국 부자들의 버티기와 냉소에 무릎 꿇은 것”이라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2, 제3의 ‘감세 쇼크’ 나올 수도
천정배 원내대표의 “첫째도 개혁, 둘째도 개혁, 셋째도 개혁” 구호는 참여정부 첫해 국정운영에 대한 나름의 진단을 담고 있었다. 즉,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 진영이 내세웠던 개혁과 진보 기조가 집권 뒤 몇몇 분야에서 흔들리면서 나타난 ‘지지층의 실망’ 흐름을 강하게 의식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에는 그의 “첫째도, 둘째도…” 구호를 뒷받침할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것 같다. 개혁·진보파 의원들이 이라크 파병, 국가보안법처럼 ‘알기 쉬운’ 이슈에는 매달려도 경제와 민생 문제의 새로운 대안을 조직적으로 모색하진 않고 있다는 점도 이런 맥락이다.
이에 따라 열린우리당에선 제2, 제3의 ‘감세 쇼크’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소수 기성 경제통에 의한 보수 편식’ 구조가 여전한데다, 심지어 일부 386 의원들은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해야 한다”며 친재벌 행보마저 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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