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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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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선일을 죽이지 않았다”

등록 2004-07-14 00:00 수정 2020-05-03 04:23

이라크 저항세력 지도자 단독 인터뷰… “외국서 유입된 이슬람 세력의 비겁한 소행으로 보여”

▣ 아르빌= 김영미/ 분쟁취재 전문 프리랜서 PD

이라크 저항세력을 발로 찾아나섰다.

우선 고 김선일씨 살해 사건에 대해 따져묻고 싶었다. 필자는 먼저 저항세력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팔루자의 저항세력 근황부터 알아봤다. 그동안 이라크에서 오랫동안 취재 활동을 하면서 인터뷰에도 응해주고, 때로는 괜찮은 정보도 몰래 건네주던 팔루자의 한 저항세력을 찾기 시작했다. 김선일씨 피랍 사건이 발생했을 때 팔루자에 들어가려다가 미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입구에서 차를 되돌려나온 적이 있어 이번에는 직접 가지 않고 먼저 사람을 보내 연락을 취했다.

알고 지내던 저항세력 가족은 몰살하고…

하지만 필자에게 돌아온 소식은 끔찍했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하루 전 미군의 공습으로 그의 집이 파괴됐고, 그의 아내는 물론 아이들 4명까지 모두 사망했다는 비보였다.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그의 이름은 ‘아부 압달라’이고 나이는 고작 38살이었다.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장교 출신이고, 한국에도 그의 인터뷰를 방송한 바 있다. 그는 “미군을 몰아내고 이라크 사람이 중심이 되어 이라크를 되찾겠다. 미군을 포함해서 어떤 나라 군인이라도 이라크에 오면 반드시 죽이겠다”고 핏발을 세우던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지난해 11월, 저항세력과 접촉하기 위해 한달 가까이 취재망을 가동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혼자 팔루자 저항세력 소굴로 뛰어들었다. 거기서 필자는 미군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으면서 우연히 그들과 만났다. 필자는 겉보기에 무시무시한 저항세력을 처음 만난 탓에 극심한 공포심으로 울다시피 했다. 그들은 필자를 여자라서 불쌍하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저널리스트 신분이라서 안심했는지 나중에는 따뜻하게 대해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특히 그들은 공포에 떠는 필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일부러 데리고 와서 필자 옆에 있게 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는 매우 무서웠으나 아부 압달라는 의외로 착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의 도움 덕분에 필자는 아부 압달라 저항세력의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또 이라크 저항세력들은 다른 도시의 저항세력들과도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비공식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다. 그래서 그의 소개로 몇 차례 다른 지역의 저항세력들까지 만나 인터뷰하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다시 수소문해서 그가 죽기 전에 소개해주었던 다른 지역, ㄷ시의 저항세력을 찾았다. 다행히 그는 살아 있었고 가족도 무사하다고 했다. 약속은 7월 초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이뤄졌다. 그들을 만날 때는 주로 그들의 차를 타고 간다. 그날 아침에도 필자는 그들이 제공한 차로 이동했고, 또 그들이 데리고 나온 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몇달 전과 다른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의 집 문 앞뿐만 아니라 다른 집 문 앞에 분홍색 리본이 걸려 있었다. 미군이 수색을 하고 갔다는 표시라고 했다. 그가 사는 마을도 미군의 공습으로 안전하지는 않아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아부 마지드(가명)는 필자를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의 세 딸도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그는 ㄷ시에서 가장 큰 저항세력 그룹의 리더였다. 최근 “바그다드로 원정(?)을 많이 나갔다”는 그는 여전히 건장해 보였다.

그는 “죽은 아부 압달라는 훌륭한 이라크 군인이었다. 우리는 그를 잃은 것을 무척이나 애통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도 필자도 아부 압달라의 죽음을 애통해했지만 필자는 고 김선일씨 사망으로 더 충격을 받았던 터라 먼저 희생당한 한국의 젊은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뜻밖의 주장을 했다. 시종일관 느린 목소리로 “이 사건은 외국에서 유입된 이슬람 세력이 저지른 짓이다. 우리는 미군과 그 동맹국의 군인들하고만 싸운다. 민간인들까지 죽이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 사건에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진지했고, 가족들도 옆에서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간에 거실로 이라크 보안군 복장을 한 낯선 남자가 불쑥 들어왔다. 순간 너무 놀란 건 둘째치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더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인터뷰하던 아부 마지드와 그 보안군 남자가 서로 뺨에 키스를 하며 “쉴로낙?”(잘 있었어요?)이라고 인사를 나누는 것이 아닌가. 얼떨떨해하는 필자를 보고 그의 아내는 웃으며 “브러더, 브러더!”라고 말했다. 그 둘은 형제였다. “우리들은 연락할 때 주로 이메일을 이용한다. 그리고 바그다드로 가면 휴대전화를 이용한다. 군인 시절 우리는 암호를 사용하는 것이 익숙해 완벽하게 작전을 수행한다. 물론 내 동생이나 그 밖의 친척들이 다 도와준다. 우리는 다 같이 이라크를 미군에게서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아부 마지드의 말이었다.

형은 저항세력, 동생은 보안군

형은 저항세력의 리더로, 동생은 보안군으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이라크판 를 보는 듯했다. 아부 마지드의 동생은 형을 존경하며 사담 후세인 시절 정복 차림을 한 형이 참 멋있게 보였다고 회상한다. 보안군으로 있지만 자신도 저항세력의 일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도 김선일씨 사망 사건에 대해 형과 같은 견해를 내놓았다. “이라크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미국 때문이다. 이라크는 이제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라며 절망스러워했다.

미국은 이렇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그들이 일으킨 전쟁에 이라크 말고도 한국을 비롯해 또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희생을 당해야 하는지 안타까운 노릇이다. 김선일씨가 희생된 뒤에도 아랍권 뉴스는 연일 무장세력에 인질로 잡힌 사람들의 협박 비디오를 방송하고 있다. 김씨 피살 장면을 접한 필자는 지난 시간의 끔찍했던 기억들에 몸서리가 쳐진다. 최근 중동에서만 30여년의 특파원 생활을 했고, 바그다드와 저항세력 취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의 수석 기자인 에드웨드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 희생자의 경우는 참 특이한 사건이다. 전례 없는 일이기에 관심이 간다. 취재 경험에 비춰보면 20대 초반 또래의 젊은이들이 지나친 애국심과 잘못된 종교관으로 저지른 짓이 아닌가 추측된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인질 사건은 계속 벌어질 것이다. 특히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에 대한 저항세력의 공격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수니삼각지대뿐 아니라 이라크 전역에서 더욱 거세질 것이다. 이제 이라크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지금 이라크에서는 저항세력에 의해 바그다드가 곧 함락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새 정부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국가보안법’을 발표했지만 약발은 거의 없어 보인다. 지금 이라크 정부는 몇몇 인사들이 세운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으니 법과 제도가 힘을 발휘할 리 없다. 오히려 미군이 개입할 구실만 제공할 뿐이다. 지금 이라크는 하루에 평균 200여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대규모 교전에 미군이 안 보인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런 대규모 교전에 미군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통상 이 정도의 교전이면 미군이 탱크를 이끌고 나와 저항세력을 진압한다. 하지만 미군은 보이지 않고 이라크 보안군들만 저항세력과 전투를 벌인다. 이제 이라크는 주권을 넘겨받은 새 정부가 이끄는 나라이니만큼 미군은 뒷짐을 지고 있겠다는 자세다. 다만 새 정부가 국가보안법에 따라 간곡히 개입을 요청하면 그때 나서겠다는 것이다. 미 군정 1년2개월간 각종 인권유린 시비에 휘말리던 미군은 이제 합법적으로 저항세력을 색출하고 인권유린에 나설 예정인 것이다.
이라크는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다. 필자는 그저 팔루자라도 하루빨리 안정되어 미군 공습에 힘없이 스러져간 아부 압달라와 그의 가족들 무덤에 시든 꽃 한 송이라도 바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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