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국경을 가다 7회- 미국 · 멕시코]
목숨을 건 미국행을 시도하는 중미인들… 빈곤에 내쫓기고 미 이민국에 다시 내쫓기고
시우다드 후아레스(멕시코)= 글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멕시코시티에서 북부 국경도시 시우다드 후아레스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반이 걸렸다. 멕시코시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행기 아래로는 황량한 사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막의 끝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는 그냥 사막 위의 활주로에 착륙했다. 멕시코의 첫 자유주의자 대통령이며 인디오 출신인 베니토 후아레스의 이름을 딴, 인구 150만명의 그 도시는 그렇게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둔 두 도시의 풍경
시우다드 후아레스의 북쪽엔 리오브라보강이 멕시코 동부해안을 향해 긴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강폭은 30~50m. 요즘은 건기라 비가 오지 않아 물이 흐르는 곳의 넓이는 10m에 불과하다. 이 강이 바로 미국과의 국경이다. 한 경찰관은 “강 한가운데를 넘어가면 미국”이라고 말했다. 세계에서 유일한, 제1세계와 제3세계가 만나는 곳. 그러나 아이들에게 리오브라보는 그저 놀이터일 뿐이다. 아이들은 거기에서 뱃놀이를 하거나 수영을 하고 놀았다. 운이 좋으면 뱀을 잡아 팔아 몇푼의 용돈을 챙길 수도 있는 곳. 강 건너편에 미국쪽이 설치한 높다란 철조망과 높은 망루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가끔씩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미국 국경순찰대의 차량만이 그곳이 국경임을 깨닫게 한다.
리오브라보의 맞은편엔 미국의 도시 엘패소가 있다. 엘패소는 말끔하게 정비된 거리, 잘 닦인 고속도로, 높고 깔끔한 빌딩들로 한눈에도 시우다드 후아레스와 모습이 다르다.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엘패소로 가려면 리오브라보 위를 지나는 4개의 다리 중 하나를 건너야 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다리는 ‘산타페 브리지’다.
25센트를 내고 “즐거운 여행을”이라고 쓰인 입구를 지나 다리 한가운데에 이르면 국경을 표시한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미국쪽으로 넘어서자 다리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보호철망도 훨씬 촘촘해진다. 달라지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거친 강을 뜻하는 리오브라보는 이제 리오그란데로 이름이 바뀐다. 리오브라보의 강둑엔 사회운동가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글귀로 가득하다. ‘국경을 지우자’ ‘라틴아메리카는 자유다’. 최근에 쓴 듯한 글도 있다. ‘부시의 전쟁은 단지 이라크에 맞선 전쟁이 아니라, 세계에 맞선 전쟁이다’ ‘전쟁 반대’.
사람들은 산타페 브리지를 부지런히 오갔다. 다리 위엔 과자를 파는 사람도 있고 구걸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깔끔한 옷차림을 한, 30대 초반의 여성 루스 마리아는 10살쯤 돼 보이는 딸과 함께 엘패소로 가고 있었다. 그는 “옷을 사러 간다. 방문비자를 갖고 한달에 한번가량 다녀온다”고 말했다. 시우다드 후아레스 기술연구소 대학과정에 다니는 로켈리오(19)도 “엘패소에 옷을 사러 갔다 오는 중”이라고 말했다. 멕시코에서도 살 수 있지만, 직접 가서 사면 싸다는 것이다. 그는 “건설현장 감독으로 일하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방문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로켈리오는 “미국에서 6개월 정도 산 적이 있다. 졸업하면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20번 잡히고 1년 징역 살고…
엘패소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에스키엘 멘도사(34)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초등학교는 멕시코에서 나왔지만, 고등학교는 미국에서 졸업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등에서 일하다, 지금은 엘패소의 한 주차장에서 관리인이 돼 있다. 그는 “나는 시험 봐서 회사에 들어갔다. 여기 멕시코 사람들보다 4배가량 많이 번다”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은 모두 방문비자나 노동비자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미국인 여성 로사(53)는 달랐다. 그는 시누이와 함께 엘패소에서 시우다드 후아레스로 건너오고 있었다. 국경을 건너 멕시코로 올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여권뿐이었다. 국경검문소는 미국에게는 눈이 크고, 멕시코인에게는 눈이 고운 일종의 ‘체’였다. 로사는 “약을 사러 왔다. 멕시코에서 10~15달러에 살 수 있는 항생제가 미국에서는 30~40달러 한다”고 말했다. 보험이 있으면 싸게 살 수 있지만, 자신은 보험이 없어 멕시코로 자주 건너온다는 것이었다. 엘패소의 미국인들은 치과치료를 받기 위해 시우다드 후아레스로 넘어오기도 한다. 평일 낮의 치과병원에는 늘 미국인들로 넘쳐난다. 산타페 브리지 근처에 약국과 병원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치와와주 이민국에 따르면, 엘패소에서 멕시코로 넘어오는 미국인은 한달에 사업가가 2500여명가량이며, 여행객도 하루 150명에 이른다.
산타페 브리지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국경을 넘을 때 비자가 필요한 사람과 비자가 필요없는 사람. 전자는 멕시코인이고 후자는 미국인이다. 그러나 멕시코인 중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제한돼 있다. 돈이 많거나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 택시운전사 헤수스 오르테가는 “비자를 신청하려면 은행 계좌에 3천~4천달러가량 있어야 하고, 많은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짜 비자를 만드는 데는 600~1000달러가 든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비자를 갖고 합법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가는 통로인 산타페 브리지에는 국적에 따른 차별은 있더라도 거기엔 적어도 평화가 있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리오브라보의 잔잔한 물결은 산타페 브리지 바깥의 다른 국경지대에서 벌어지는 목숨을 건 ‘월경’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산타페 브리지 옆 강가는 미국으로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미국 국경순찰대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자주 찾는 곳이다. 멕시코의 제2도시 과달라하라에서 왔다는 한 젊은이는 “이쪽은 어렵다. 저 아래 ‘미욘’이란 곳을 통해 오늘밤 넘어가려 한다”고 말했다. 강에서 수영을 하고 있던 다비드 에아레(29)는 벌써 스무번은 미국에 갔다 왔다고 했다. 초등학교 3년을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1989년 열네살 때 처음으로 국경을 넘었다. 미국에서 살던 치카나란 이름의 멕시코 여자가 시우다드 후아레스에 놀러왔다가 돌아가면서 ‘같이 가자’고 한 말이 그를 움직였다. 당시 멕시코에서 주당 5달러밖에 벌지 못하던 그는 미국에서 미장과 내부 장식 일을 하며 한주에 20~30달러를 벌었다. 그는 멕시코에 한번 가면 대개 3년씩 머물렀다. 물론 그동안 미국 경찰에 20번이나 잡혔고, 3번은 감옥에도 갔다. 그는 뉴멕시코의 토마토 농장에서 일하다 2002년 1월에 또 붙잡혔다. 벌금을 낼 돈이 없어 그는 텍사스의 한 감옥에서 1년 징역을 살았다.
그렇게 많이 미국에 갔다 왔으면 돈도 좀 모으지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1992년 결혼 전까지는 돈 벌면 춤추고 노는 데 다 써버렸고, 결혼한 뒤에는 살림에 쓰는 정도라고 했다. 그에게는 12살과 9살짜리 아들이 있다. 아내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아이들을 놔두고 가출해버렸다. 에아레는 “다시 가서 돈을 벌고 싶다. 하지만 이번에 갔다가 잡히면 10년은 감옥에서 살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잡히지만 않는다면 다시 간다”고 말했다.
“미국 경찰도 게임을 하는 거다”
며칠 뒤 같은 장소에 기에르모 팔마(39)가 서성이고 있었다. 지저분한 옷과 덥수룩한 수염에 가방을 맨 그의 차림새는 한눈에도 그가 국경을 넘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우다드 후아레스시가 속한 치와와주의 주도에서 4주 전에 집을 떠난 그는 벌써 세 번째 국경을 넘다가 붙잡혀 추방당하기를 반복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그는 요리사 보조원으로 치와와에서 1주일에 100달러를 벌었다. “호텔이 많은 미국의 콜로라도에 가면 500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콜로라도에 가면 멕시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가짜 증명서를 만들 수 있다”고, “거기서 한 1년 일해 6천~7천달러만 벌면 그것으로 작은 식당을 하는 게 꿈”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사흘간 사막을 걸어 도착한 미국의 한 마을에서 그는 붙잡혀 추방당했다. 그와 이야기하는 동안 미국쪽 국경에는 경비차량 5대가 몰려들어 망원경으로 우리를 살폈다. 그는 얼굴을 감추지도 않았다. 팔마는 네 번째 잡히면 6개월간 감옥에서 썩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도, “한번은 더 시도해볼 것”이라고 이를 악물었다. “철조망만 넘으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 그들(미국 국경경찰)도 안다. 게임을 하는 거다.”
19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스칼라브리니아노선교회는 이곳 시우다드 후아레스에 ‘이민자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민자의 집은 멕시코 북부 국경지대에 4곳, 그리고 중미인들이 많이 들어오는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의 타파출라에 1곳이 있다. 멕시코인이든 중미인이든, 국경을 넘으려는 자든 잡혀 추방당한 자든, 이민자의 집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민자에게 잠자리와 식사 등을 제공한다. 최대 1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하루 평균 35~40명이 머무는 이곳에는 늘 도움을 얻으려는 이민자들이 몰린다.
이민자의 집 앞에서 만난 로렌소(34)는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왔다”고 했다. 시우다드 후아레스가 속한 치와와주 출신인 그는 캐나다로 가는 데 필요한 여비 1천달러를 벌기 위해 납땜도 하고 목공도 하는 등 닥치는 대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눈가는 어디엔가 찢겨 꿰맨 자국이 선명했다. “캐나다에 갈 거다. 거기서 어부로 일하려고 한다. 6개월 일하면 7천달러를 벌 수 있다”고 그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비자는 어떻게 받을 것이냐고 묻자, “비자가 뭐가 중요하냐?”며 “관광비자로 들어가서 그냥 일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온두라스에서 미국까지 눈물의 행로
이민자의 집을 찾는 이들 가운데는 과테말라나 온두라스에서 온 외국인들도 적지 않다. 카를로스 아우스토와 셀레스티나 곤살레스는 중년의 부부다. 그들은 과테말라에서 식당을 했다. 하지만 마피아, 경찰, 공무원들에게 뜯기는 돈 때문에 염증을 느끼고 5명의 자식을 시부모에게 맡긴 채 고향을 떴다. 6개월간 지도를 보며 길을 연구한 뒤, 그들은 전통복장을 입어 토착인인 것처럼 꾸미고 한번도 검문을 받지 않고 이곳 국경까지 왔다고 했다. 카를로스는 이등석 버스의 매표원으로, 셀레스티나는 여성복 만드는 회사에서 임시로 일하고 있다. 그들은 불법 이민을 피하고 되도록이면 1년간 돈을 벌어 합법적으로 미국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민자의 집 통계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01년 사이 이민자의 집에 머물다 간 사람은 모두 2만6800명이며, 이 중 외국인은 온두라스 출신이 871명, 과테말라인이 422명, 엘살바도르인이 297명의 차례로 많았다. 후아레스시 이민국 부국장 헤수스 모레노는 멕시코에 불법 체류하다 붙잡힌 외국인들을 가둬두는 이민국 보호소가 얼마나 인도적으로 운영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이 보호소에는 1년에 3800명이 거쳐간다. 이 중 90%는 중미인들이고, 여자도 400명가량 된다고 그는 말했다.
온두라스 출신 아르만도 라모스(28)는 지난해 12월20일 고향 마을을 출발해 과테말라를 거쳐, 치아파스주의 타파출라를 통해 멕시코로 들어왔다. 거기에서 화물열차에 매달려 이곳 시우다드 후아레스까지 오는 데 19일이 걸렸다. 그가 달려온 거리는 자그마치 5천km가 넘는다. 그는 3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주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는 동생(18)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온두라스에서는 하루 4달러를 번다. 닭튀김 한 마리에 5달러가 넘으니, 정말 살기 어렵다. 미국에 있는 동생은 하루 60달러를 벌어 우리에게 보내주는데, 그것으로는 겨우 먹고살 뿐이다. 나는 7형제의 맏이다. 애인이 있고 두 아들도 있지만, 돈이 없어 아직 결혼식도 못했다. 일어서려면 미국에 가야 한다.” 그는 부모도 애인도 자신의 미국행을 위험하다고 말리지만 “더 이상 가족들이 고통받지 않게 하려면 가야 한다”고 말했다.
미 이민국의 인권침해 흔한 일
중미에서 온 이들은 미국 국경을 넘기 전 멕시코에서도 불법 체류 외국인으로서 큰 어려움을 겪는다. “자식 다섯을 공부시키려면 인생을 바꿔야 한다”며 미국에 가기 위해 온두라스를 떠나온 호세 도밍고(32)는 2100페소(20만원가량)를 가지고 고향을 떠났다. 그는 과테말라에 들어오자마자 강도를 만나 대부분의 돈을 뺏겼다. 그는 멕시코로 들어와서도 국경도시의 강을 건너다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군인들은 그에게 돈을 요구했다. 그는 남부 국경의 타파출라로 가는 길에 다시 경찰들에게 붙잡혀 돈을 뜯겼다. 타파출라에 도착했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겨우 25페소가 남아 있었다. 그는 타파출라에 경찰이 너무 많아 기차를 타지 못하고 12일 동안 걸어 치아파스주의 도날라라는 마을까지 온 뒤 기차를 탔다. 그러나 기차가 출발하려던 찰나, 군인 200여명이 나타나 총(공포탄)을 쏘아대는 바람에 다시 뛰어내리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1달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는 국경을 넘기 위해 준비하면서 호두농장에서 하루 100페소씩 받고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다. 미국에 가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오직 그 신념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고 말했다.
치아파스주에서 온 야미로 미야레알(21)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이민국 직원에 이끌려 이민자의 집에 들어오는 참이었다. 그는 큰아버지와 사촌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1인당 700달러씩 내고 코요테(불법 이민 중개업자를 말한다)의 도움을 받아 국경을 넘었다. 여자가 3명이 포함된 이들 일행은 사막을 넘고, 코요테가 가져온 차를 타고 애리조나주의 메사까지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코요테의 도움을 받다 미시시피의 옥스포드로 가는 도중 뉴멕시코의 알부르케르케에서 미국 이민국 직원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야미로는 “이민국 직원들은 우리를 의자가 없는 순찰차의 뒷자리에 태운 채 뜨거운 바람을 틀었다. 물도 주지 않고 화장실에도 보내주지 않았다”고 분노했다. 야미로는 “이번에는 코요테 따윈 필요 없다. 우리끼리 꼭 넘어가겠다”고 말했다.
이민자인권센터 소속 법률간사인 디아나 모랄레스(35·여) 변호사는 야미로 일행이 받은 것과 같은 인권침해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카탄 출신인 루벤 데술트가 2003년 4월2일 미국에 불법 입국했다가 붙잡혀 아랍인으로 오인받아 미국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에게 ‘테러리스트라고 자인하라’며 발로 차이고 주먹으로 맞는 등 고문당했다는 증언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 8월에는 미국 샌디에이고에 맞붙은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아나에서 국경을 넘던 라미로 라미레스(25)가 국경순찰대가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도록 강요하는 건 빈곤
그러나 오늘도 멕시칸들과 중미인들은 리오브라보를 건너, 애리조나와 텍사스의 사막을 넘어 미국으로 넘어간다. 연간 30만~40만명이 그렇게 불법 이민을 떠난다. 물론 대부분이 붙잡히고 일부만이 국경을 넘는 데 성공하지만, 미국에 체류하는 중미인들의 수는 늘 비슷하다. 국경을 넘는 데 성공한 수만큼의 장기 불법 체류자들이 새로 붙잡혀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리오브라보 너머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불법 이민자들은 결코 꿈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쫓기는 것이었다. 애착의 뿌리를 뽑아 내던지고 자신의 땅을 떠나도록 강요하는 것은 다름 아닌 ‘빈곤’이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화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집을 개조한 프리다 칼로 박물관엔 칼로의 화장한 유해가 단지에 담겨 전시돼 있다. 그의 유해 옆엔 오늘도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넘어가는 이민자들을 눈물짓게 하는 글귀가 이렇게 쓰여 있다. “자기가 태어난 그 집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살인의 다른 이름 ‘게이트 키퍼’ |
“당신의 목숨을 지켜라. 꿈찾기가 당신에게 최악의 악몽이 될 수 있다.” 멕시코 이민국 포스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러나 ‘최악의 악몽’은 과거에는 없던 일이었다.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836년 이전에는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가 모두 멕시코 땅이었다. 20세기 들어서도 농업이민이 필요했던 미국은 캘리포니아 지역의 농장 수확기에 멕시코 농업이민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미국이 남부 국경의 통제를 강화한 것은 1994년부터다. 당시 캘리포니아주는 9%라는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다. 정치인들은 남부 국경을 넘어오는 이민의 통제를 요구했다. 이른바 ‘게이트 키퍼’ 작전이 시작됐다. 국경감시 예산이 늘어나고, 국경 펜스가 설치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뒤 불법 이민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다. 현재 미국에 있는 3200만~3400만명의 히스패닉 가운데 800만명이 불법 체류자로 알려져 있다.
국경 통제 강화는 단지 이민자들이 국경을 넘는 장소가 험난해서 경찰이 지키기 어려운 곳으로 옮기도록 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불어난 강물을 건너다, 물 없는 사막에서 탈진하거나 밤의 추위에 얼어서 혹은 야생동물의 공격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994년 불법 월경 중 사망한 사람은 23명이었으나 1999년에는 145명으로 늘었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국경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국경 경비 예산을 늘리고, 2000년 8500명이던 남부 국경 순찰요원의 수도 1천명 더 늘렸다. 이민국, 세관, 농업부에서 파견된 인력도 늘렸다. 그 결과 또한 죽음을 늘리는 것뿐이었다. 9·11 테러 이후 멕시코 북부 국경을 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연간 400명으로 늘었다. 미국의 게이트 키퍼 작전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국경을 넘다 죽은 사람은 2800~3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민자의 집 프란시스코 펠리사리 신부는 “어이가 없다. 테러를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합법적으로 미국에 체류 중이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미인들의 이민을 막기로 미국과 약속한 멕시코 정부는 남부 국경지대에서 미국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2001년 6월 이른바 ‘남부플랜’을 발표했다. 멕시코 남부의 가장 좁은 지역, ‘테우안테펙 지협’에서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 불법 이민자를 체포하겠다는 것이었다. 멕시코 정부는 한해 17만명가량의 중미인 불법 체류자를 붙잡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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