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발의제 · 소환제 도입 논의 본격화… 사회적 약자들이 특정 쟁점을 정치적 의제로
이주영/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ylee0530@empal.com
지난 3월12일 온 국민을 분노케 했던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교과서에서 배웠던’ 국민발의·소환제에 대한 논의가 점차 뜨거워지고 있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온라인상에서 국민발의제·소환제를 도입하자는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고, 지난 4월7일에는 ‘국민발의권, 소환권 쟁취를 위한 네트워크’의 토론회도 열렸다. 그리고 며칠 뒤인 10일에는 발의권을 통해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려는 이들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모여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대표제가 민주주의라는 편견을 버려!
국민발의권은 헌법의 개정안과 법률의 제정·개정·폐지안을 국민이 직접 제안할 수 있는 권리다. 지금은 정부와 국회만이 입법을 발의할 수 있다. 국민발의의 결정 과정은 국민투표에 회부하도록 하는 ‘직접 발의’와 의회가 그 발의안을 부결한 경우 국민투표에 부치는 ‘간접발의’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소환권은 공직자의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해임시키는 권리로서 국회의원·지방의회의원·교육위원 등 대의기관의 공직자부터 대통령이나 임명직 공무원, 판사까지 소환의 대상범위는 어떻게 제도화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지난 3월12일 탄핵 사태가 이러한 흐름을 촉발시킨 것은 분명하다. 이날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사실은 국민을 대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환기시켰고, 민의에 등 돌리고 일부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법률을 ‘주물러온’ 국회의 오랜 관행에 대한 분노를 다시 일깨웠다.
고삐 풀린 대의정치를 주권자인 국민들이 통제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라크 파병동의안의 통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악, 호주제 폐지의 무산, 근로기준법의 개악,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안의 통과 등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무력감을 느껴왔던가.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더 진보적인 또는 개혁적인 정당의 많은 의석 확보가 하나의 방법으로 논의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대다수 국민들이 선거 때만 ‘주권자’일 뿐 일상적인 정책 결정 과정에선 ‘씁쓸한 관객’이거나 ‘동원되는 대중’일 수밖에 없는 지금의 정치구조가 바뀌지는 않는다. 발의권, 소환권 등을 통해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대의기관을 민주적으로 통제하자는 주장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선거권이 참정권의 전부이고, 대표제가 곧 민주주의라는 편견을 뛰어넘자는 것이다.
발의권, 소환권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작동하는지는 이러한 제도가 이미 도입된 스위스, 미국, 일본, 독일 등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발의권, 소환권, 주민투표권 등이 언제나 사회 진보에 기여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국민투표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결정이 나온 경우도 적지 않다.
정치권, 입장 구체적으로 밝혀야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약자 또는 덜 조직화된 집단들이 특정 쟁점을 핵심적인 정치 의제로 부각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를테면 1989년 스위스에서 ‘스위스사회주의청년단’이 발의한 ‘군대폐지안’의 경우, 비록 통과는 좌절됐지만 군비 축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부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또 지난 2001년 12월에는 5천프랑(3천달러) 이상의 모든 자본 소득에 대해 20%의 세금을 일괄 부과하자는 세금안을 스위스 노총이 발의해, 세계의 투기 자본가들 사이에 상당한 긴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거대 곡물기업들의 집중적인 홍보 전략에도 불구하고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경작과 동물 사육을 금지하는 법률이 주민 발의를 통해 통과되기도 했다.
또 발의권, 소환권 그 자체가 자동적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가져오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현실에 존재하는 대립적 관계와 모순을 더 투명하게 드러낸다. 공적 결정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관심과 의식을 높이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과정은 ‘소통과 교육의 과정’이자 시민들의 정치적 의식의 성장을 돕는 민주주의의 학교가 된다는 점을 다른 나라의 경험들은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일만은 아니다. 유권자는 국회의원과 같은 국민의 대표에게 유권자의 뜻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고, 우리 헌법은 이를 명문으로 금지하지 않고 있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도 국회법을 개정해 국회의원 소환의 근거를 신설하고 관련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국민소환제의 도입이 가능하다. 또한 국민발의제는 제한적이나마 우리나라에서도 헌법에 명문화됐던 적이 있다. 1972년 7차 헌법 개정 이전까지는 헌법에 국회 외에도 선거권자 50만명 이상의 발의로 헌법개정안을 제안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일단 한나라당을 제외한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자민련, 민주당이 국민소환권의 도입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최근 밝혔다. 그러나 소환의 사유와 대상 범위에 대해서는 입장이 분명치 않아 보인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국민소환제 도입이 주요 공약 중 하나이며 실행방안까지도 제시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소환 사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인권운동사랑방의 관련 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구체적인 국민소환의 대상은 공청회 개최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국회의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이라크 파병 등 정치적 결정에 대해서는 헌법소원 등 다른 방법으로 그 정당성을 묻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한편, 발안제(발의제)에 대해서는 4월10일 현재까지 민주노동당만이 도입 의사를 밝혔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국민발안제도에 대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필요한 제도이나 불순 세력의 개입 등으로 정국 불안의 소지가 있으므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치 환멸’을 스스로 치유한다
언제나 권리는 아래로부터 형성된 국민적 요구에 의해 얻어졌고, 발의권이나 소환권이라는 정치적 권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이나 스위스에서도 국민발의권이나 소환권은 특권층으로의 권력 집중에 대한 저항, 국회의 개혁 의지 부재와 확산된 빈곤에 대한 투쟁의 산물로서 도입됐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싹은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핵폐기장 유치 반대 투쟁 과정에서 부안 주민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실험을 꼽을 수 있다. 부안 주민들은 직접 발의한 주민투표를 지난 2월14일 높은 참여 속에 치러냄으로써 ‘자치민주주의’ ‘에너지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썼다. 부안에서는 주민소환제도가 발효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유권자 5만2천명 중 2만3천여명이 군수의 소환에 서명하는 한편, 군수 퇴진을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발의제와 소환제 도입은 일반 국민들이 정치에 대한 환멸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며, 민(民)이 지배한다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재확립하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사회적 약자, 노동자, 여성 등 현재의 정치구조에서 주변화된 개인과 집단들이 이러한 권리를 확보하는 운동의 과정에 가장 주축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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