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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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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국경을가다5] 초원에 뻗어가는 제국의 그림자

등록 2004-04-15 00:00 수정 2020-05-03 04:23

미군과 러시아군이 근거리에서 노려보는 유라시아 전략벨트, 키르기스스탄 군사주둔지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글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키르기스스탄으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키르기스스탄을 향해 남쪽으로 뻗은 도로는 곳곳이 패어 차들은 구덩이를 피하느라 곡예운전을 하면서 ‘정면 충돌’의 위기를 수없이 넘겼다. 안개가 내려앉고 사르르 언 길 옆에서 우리는 가끔씩 뒤집힌 차들을 만났다.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키르키스는 국토의 80% 이상이 해발 1500m 이상인 산과 초원의 나라다.

GNP 차이로 형제국은 갈라지고…

귀가 먹먹해지며 몸이 먼저 그 사실을 알아챈다. 그리고 곧 거대한 파란 철제 지붕을 인, 새로 지은 유리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추이강이 조용히 흐르는 이곳이 북쪽의 카자흐스탄과 남쪽의 키르기스스탄을 가르는 국경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이 국경은 강을 사이에 두고 차단기 하나만 달랑 있을 정도로 간결했다고 한다. 10여년 전까지 같은 나라였으니 따질 것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권과 세관 검사가 심해져 짐을 잔뜩 실은 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카자흐스탄쪽 국경마을 코르다이에서 온 카이라트(33)는 “키르기스의 물가가 카자흐보다 훨씬 싸니까 1주일에 두번씩은 물건을 사거나 일을 보러 키르기스의 수도 비슈케크에 갔다 온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돈이 좀 있는 이들이고, 대부분 키르기스에서 감자나 과일, 옷 등을 가져다 판다. 오늘은 차를 수리하러 갔다 오는 길이다. 오랫동안 쉽게 오갔는데 지난해부터 갑자기 검사가 까다로워졌다. 2~3시간씩 기다려 통과한 적도 있다”고 말한다.

카자흐와 키르기스 국경이 나란히 있지만, 출입이 어려운 쪽은 카자흐 국경이다. 여기서도 돈이 이전의 ‘형제’ 공화국들을 가른다. 석유 등 자원이 풍부한 카자흐스탄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거의 2천달러인 데 비해 키르기스는 350달러. 인구의 50%가 최저생계비 이하의 생활비로 살아가며 일자리를 찾아 카자흐로 가고 싶어하는 수많은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을 대하는 카자흐 국경수비대의 콧대는 점점 높아진다. 또 남부에서 퍼져가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테러에 대한 공포, 키르기스와 카자흐를 거쳐 러시아와 유럽으로 퍼져나가는 아프가니스탄의 마약 때문에 검색이 점점 심해진다. 국경이 사라지고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세계화는 어찌된 일인지 점점 국경을 높이고, 세계화를 부르짖는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은 테러의 위험을 점점 높이면서 더 많은 군인들을 여기저기로 불러모은다.

이곳 키르기스스탄의 마나스 기지는 15만㎡의 넓이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군 주둔지다. 국경을 넘어 녹이 잔뜩 슨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을 인 단층집들이 늘어선 작은 마을들을 지나자 바로 수도 비슈케크이고, 그곳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20km 정도만 달리면 무장한 미군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는 마나스 공군기지에 도착한다. 입구부터 헤스코(Hesco)라고 불리는, 특수재질의 껍질 안에 모래를 가득 채워넣은 폭발물 방어장비가 3m 정도 높이로 겹겹이 쌓여 성곽처럼 기지를 빙 둘러싸고 있다.

‘성벽’ 사이로 깊숙이 들어가 또 한번의 검문소를 통과하니 300여개의 텐트가 줄지어 있다. 텐트라고 허술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단박에 깨진다. 자체 발전시설로 생산한 전기를 이용해 천막 안은 완벽하게 냉난방 시설이 되어 있고, 부대 전체에 자갈을 깔고, 텐트 바닥에는 나무판을 깐 위에 다시 천막을 씌워 우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거대한 식당과 자체 병원, 강당과 영화관람 시설, 피트니스 센터, 인터넷 카페가 있으며, 와이드 스크린으로 미국 스포츠 중계를 생방송으로 볼 수 있고, 기지 한쪽에는 미용실과 스파 시설까지 갖춰져 있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병사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초원의 리조트에라도 와 있는 듯 아늑하기까지 하다. 미군의 힘은 이런 것일까? 잘 지어진 막사와 시설은 돈으로 전쟁에서 이기고, 전쟁으로 다시 돈을 버는 미국의 현실을 실감하게 한다. 이곳 시설은 핼리버튼사의 자회사인 켈로그브라운 앤드 루트가 세우고 운영한 코소보의 캠프 본스틸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외곽의 마나스 공군기지. 대아프가니스탄 작전의 다국적군 기지로 세워졌지만 이제는 미군기지가 되었다. 성곽처럼 방어벽을 둘러친 기지 바닥에는 자갈과 나무판이 깔려 있고, 냉난방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텐트촌에는 피트니스 센터, 인터넷 카페까지 마련돼있다.

초원의 리조트, 미군들의 텐트촌

언뜻 보면 도대체 미군들이 무엇 때문에 멀고 먼 중앙아시아까지 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혹시나 그런 의심이 들까 싶었는지 부대 곳곳에는 친절하게도 ‘답안지’가 붙어 있다. 여기저기 걸린, ‘9·11 테러’로 불타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사진 밑에 ‘That’s Why’라고 쓰인 액자들이 그 답일 것이다. 이제 와서 보면 이 글은 ‘바로 이 때문에 (여기 와 있다)’로 읽어야 할지, ‘바로 이 핑계로 (여기를 차지했다)’로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어쨌든 이 마나스 기지는 미국이 ‘항구적 평화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이라 부르는 미군의 대아프가니스탄 작전을 지원하는 곳이다.

지난해까지 이 기지에는 미국이 주도하고, 프랑스·캐나다·한국·이탈리아·스페인·네덜란드·터키·폴란드 등 12개 나라의 군대로 구성된 ‘반테러 국제연대 다국적군’ 3천여명이 주둔했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 동안 마나스 기지에서 출격한 미국의 F-15E, F-16, F-18과 프랑스의 미라주-2000 등 다국적군 전투기들은 20여분 만에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도착해 공격에 나섰다. 또 KC-135 급유기와 C-5 수송기들은 전쟁물자를 수송하고 연료를 보충했다. 탈레반 잔당들이 아직도 활동 중이고 군벌들이 할거하며 마약 재배로 수입을 올리는 혼란스러운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지금도 이곳에서 많은 비행기들이 출격한다.

미군 376원정비행단의 공보장교 비달 대위는 “테러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업무는 대아프간 작전을 지원하는 것이지만, 이슬람 근본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한 키르기스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마나스는 ‘항구적 자유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출격한 비행기들의 중간 급유지이자 수송기지다. 여기 병사들은 4개월씩 근무하는데, 미군은 언제 어디서나 배치를 명령받으면 48시간 안에 짐을 싸서 세계 어느 곳이든 부임할 수 있는 신속기동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키르기스스탄 정부와 마나스 기지에 대한 임대 협상을 시작한 것은 2001년 ‘9·11’ 이후 한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해 12월16일 ‘간시 주니어 공군기지’라는 이름으로 기지 문을 열었다. 간시는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될 때 순직한 뉴욕소방대장 피터 간시 주니어의 이름을 딴 것이고, 새 이름 마나스는 의 20배 길이라는, 키르기스의 장대한 서사시의 주인공인 민족영웅이다. 그전까지 중앙아시아에는 공식적으로 미군이 한명도 없었지만, 이때부터 키르기스,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에 잇따라 미군 기지가 들어섰다. 미국의 외교정책 전문가인 찰머스 존슨 전 버클리대학 교수는 최근 내놓은 책 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를 당한 정부치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속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며 미국이 9·11 테러를 핑계로 삼기 전부터 중앙아시아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기며 이 지역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재편하려는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해왔음을 시사한다.

이제 다국적군은 하나둘씩 철수하고 마나스 기지에는 미국의 376원정비행단 소속 1천여명과 전투기 20여대가 남았다. 취재팀이 찾아간 2월25일과 26일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국의 동의부대(제924의료지원대)가 철수하던 날이었다. 이제 마나스 기지는 명실상부한 미국의 기지가 되었다. 미국은 애초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에는 이곳에서 병력을 철수하겠다고 했지만, 현재는 오히려 시설을 개조, 보수하며 장기주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처음에는 기지를 1년간 임대해주었던 아스카르 아카예프 키르기스 대통령도 필요하다면 기간을 계속 연장해주겠다고 미국 관리들에게 보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도 30km 거리 ‘칸트’에 기지 세워

1999년 미 국방부는 중앙아시아 관할을 태평양사령부에서 중부사령부로 겼다. 중부사령부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이란·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하나의 전략적 벨트로 묶어 관할한다. 동의부대의 철수식에 참가하기 위해 마나스 기지에 온 로버트 테일러 미 중부사령부 공군사령관은 “키르기스스탄의 지속적인 협력으로 우리는 최일선에서 세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대테러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이 민주적 자유국가로 거듭나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 한국군이 여기서 활약하면서 미국과 한국의 전략적 동맹관계는 어느 때보다 공고해졌다”고 강조했다.

키르기스스탄을 겸임해 관리하는 카자흐스탄 주재 한국 대사관의 관계자는 “미국이 굳이 이곳까지 와서 마나스 기지를 설치하고 장기 주둔 의도를 보이는 것은 이곳이 중앙아시아의 심장부이며 중국과 국경을 접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석유 패권을 장악하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올라오는 것을 막는 데 유리하며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뒤통수와 러시아의 명치를 장악할 수 있다. 세계지도를 보면 그림이 딱딱 그려진다. 서쪽부터 동유럽, 중동, 중앙아시아를 잇는 거대한 전략적 벨트를 형성하고 동쪽으로는 주한미군, 주일미군을 유지하며 미국은 중국을 꽉 에워싸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자 러시아 역시 뒤늦게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섰다. 지난해말 마나스 기지에서 동쪽으로 겨우 30여km 떨어진 공업도시 칸트에 러시아가 공군기지를 설치한 것이다. 2003년 10월23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직접 칸트로 날아와 기지 설립 기념식에 참석했다. 소련 붕괴 이후 곳곳의 기지를 철수하던 러시아가 해외에 새롭게 기지를 연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급격하게 확대되는 미국의 군사기지에 대한 러시아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한다. 칸트 기지에는 러시아군 500여명과 정비인력이 주둔하고 있으며, 수호이-27 전투기와 수호이-25 폭격기 등이 배치됐다. 칸트는 소련 시절 군용 비행장이 있던 곳으로 활주로 등의 시설은 마나스 기지보다 낡았다.

키르기스 정부는 이런 ‘기지 임대’를 통해 거액의 돈을 벌어들인다. 미국은 키르기스 정부에 거액의 기지 이용료를 낼 뿐 아니라, 한번 이착륙할 때마다 7천달러씩 주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헌법을 바꾸고 야당 지도자를 감금하면서 권력을 강화하고 있는 아카예프 키르기스 대통령은 마나스 기지에서 사용하는 군용기 연료를 자기 사위가 소유한 석유회사 다트카(DATKA)에서 공급하도록 하는 등 주변인들에게 특혜를 주고 있다.

무시당하는 나라의 반미 감정은?

이뿐만 아니라 경제원조 등의 명목으로 해마다 엄청난 미국의 달러가 키르기스 정부로 흘러들어가지만 가난한 국민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런 한편에서 기지 주변 마을 사람들은 비행기 소음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미군 차량이 민간인 여성을 치어 중상을 입히기도 했고, 농민들의 중요한 재산인 가축을 치는 사고도 일어났다. 이곳에서도 ‘공무상 일어난 사건의 재판권은 미국에 있다’는 조항 등 주둔군지위협정(SOFA)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불공정하고, 이미 일어난 사건에서도 가해 미군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알려진다 해도 먹고 살기가 너무나 힘겨운 이곳 사람들은 아직 목소리를 높이거나 뚜렷한 반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현재 키르기스인들의 평균 생활비는 최저생계비의 50%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서 들어오는 달러가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분노의 입을 막는다. 다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군이 계속 장기 주둔을 하게 되면 반미 감정이 고조될 가능성은 높다. 취재진이 마나스 기지에 찾아갔던 날 한국 대사, 국군군의학교장 등 한국의 귀빈들이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기지 정문을 통과하는 옆에서 미군은 주둔국인 키르기스의 유가이 국방차관 일행의 차를 몇십분 동안 이 잡듯 뒤지고 있었다. 일찍부터 온 차관 일행은 한국인들이 통과한 뒤 한참 뒤에야 부대에 들어올 수 있었고, 동행한 키르기스 취재진들은 모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주둔국에 대한 미군의 고압적인 태도가 느껴졌다.

부대에서 나와 비슈케크 시내에서 소련 시대 만든 지굴리 택시 10여대를 줄이어 세워놓고 기다리는 택시 기사들을 만났다. 손님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택시 기사인 노르벡(46)은 “택시 한대에 손님은 하루에 2명꼴이다. 우리 9명은 서로 순서를 정해놓고 하루 종일 함께 손님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마나스 기지에 주둔하는 데 별로 불만도 없고 나와 상관도 없다. 러시아군이 들어온 것도 마찬가지다. 우선 마음 편히 돈 벌고 가족이 별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 수만 있으면 좋겠다. 미군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별로 없지만 정부에 돈을 많이 준다니까 좀 낫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공포 역시 이곳 사람들이 미군 주둔을 현실로 인정하는 이유다. 1990년대 초부터 시아파 근본주의 새력은 오슈 등 남쪽 도시에서 이슬람 민족주의를 외치면서 버스 폭탄 테러, 길거리 암살 등 테러를 일으켜 1991년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접한 남쪽 국경은 지금도 불안정하다. 때문에 자체 국방력이 취약한 현실에서 당장은 미군과 러시아에 의존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상당수 키르기스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독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른 나라에 다시 땅을 빼앗기는 것 아니냐는 불만, 이후 러시아와 미국이 충돌하게 되면 키르기스가 전쟁터가 될 것이라는 불안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비슈케크 인문대학에서 만난 외국어학과 학생 이밀르(22)는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게 외국 사람에게 팔려나가고 있다. 외국의 자본이 들어오는 게 좋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미국인이나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큰 문제다. 소련 시대에는 국가가 다 가져가더니 이제는 외국인들이 다 차지하고 국민들에게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 땅에 미군이나 러시아군이 들어와 있는 것도 싫다. 우리 땅인데 외국 땅이 돼가는 것 같다. 우리의 미래를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제국 · 정복 · 번영에는 끝이 있다네

키르기스에서 나오는 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초원 위에서 말을 탄 사람들이 양과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간다. 수천년 동안 키르기스인들은 활동적인 유목민이었으며 전사였다. 그러나 1920~30년대 소련은 토지개혁과 집단농장화를 통해 이들을 강제로 말에서 끌어내려 정주민이 되도록 강요했다. 말을 탄 이들도 이제는 유목민이 아닌 목동일 뿐이다. 한때 이들처럼 유라시아 대륙에서 여러 제국을 세우며 호령했던 많은 유목민들이 이제는 모두 ‘정복자의 말’에서 내려왔다. 제국, 정복, 번영에는 그렇게 끝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군에 감사해요”

[마나스 기지의 한국군]
지난 2월25일, 비슈케크의 마나스 기지에서는 지난 2년 동안 이곳에서 진료 활동을 해온 한국군 동의부대(제924의료지원대)가 그동안 사용하던 병원 시설과 의료장비, 의약품 2억2천만원어치를 키르기스스탄 국방부에 무상으로 기증하는 전달식이 열렸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동의부대는 2002년 2월부터 아프가니스탄 카불 근처의 바그람 기지에 본부를, 마나스 공군기지에는 파견대를 두고 다국적군과 현지 주민을 진료했다. 마나스 기지의 분대는 2월26일 4진 철수식을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났고, 동의부대 5진은 아프간에서만 계속 활동하고 있다. 한국군은 기지 사용료와 주둔 비용을 자체 부담하며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주둔한다.


이날 의료장비 전달식에서 고려인인 유가이 키르기스스탄 국방차관은 “중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키르기스의 안보는 아프가니스탄 상황에 큰 영향을 받고 있으며, 다국적군의 주둔으로 키르기스의 안보 위협이 줄어들었다. 한국군은 마나스 기지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큰 기여를 했다. 이번에 의료장비까지 무상으로 기증해주어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마나스 기지에는 군의관 등 동의부대원 39명이 다국적군과 현지 한국인 등을 진료해왔다. 기지 내 동의부대 야전병원은 컨테이너로 지어진 시설이지만, 유엔에서 지정한 2등급(level 2) 병원으로 기지 안에서 외과수술까지 할 수 있다. 일반외과를 비롯해 내과, 치과, 이비인후과, 방사선과, 마취과를 고루 갖추고 한방진료까지 하고 있다. 동의부대 부단장 임종모 중령은 “지난 2년 동안 다국적군 장병과 민간인, 현지 교민 등 9171명을 진료했다. 특히 부대 주변 마을 주민 650명을 진료하고 봉사활동에도 나섰으며, 부대원들이 돈을 모아 한국어를 전공하는 키르기스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키르기스 중앙일간지에 실려 키르기스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졌다”고 말했다. 마나스 기지 사령관 스티븐 켈리 대령도 “얼마 전에도 기지 밖으로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미군들이 동의부대의 응급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지는 등 한국 의료부대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강조했다.
동의부대는 또 아프가니스탄 바그람에서 현지 주민 진료에 주력해 지금까지 8만9천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동의부대 정훈장교 박진환 대위는 “마나스는 바그람에 비하면 천국일 정도로 아프간의 상황이 심각하다. 환경이 열악하고 생활이 힘들어 주민들이 질병을 달고 사는데다 곳곳에서 지뢰가 터진다. 하루 150~200명씩 우리 병원에 찾아와 부대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또 탈레반이나 알카에다 잔당들이 계속 활동하면서 민간으로 위장한 게릴라식 공격을 해 헬기가 추락하기도 하는 등 다국적군이 부상을 당하고 있다. 지역재건과 치안유지 활동을 하고 있는 다산부대도 로켓 공격을 받았다”고 험난한 현지 상황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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