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 트랙터가 2024년 12월22일 오후 서울지하철 4호선 남태령역 인근 집회 현장에서 한남동 대통령 관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윤석열 탄핵은 내란사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어야 한다. 더 나은 한국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과 방향, 밑그림, 과제 등에 대해 진보적 필자들의 연속 기고를 싣는다._편집자
2024년 12월21일, 동지. 전남, 경남에서 출발해 일주일 내내 서울을 향해 달려온 트랙터 대행진이 남태령에서 멈췄다. 경기도 경계선까지는 아무런 문제 없이 경찰의 호위도 받으며 올라왔던 트랙터가 서울에서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사방을 둘러싼 경찰차벽에 포위당했다. 장갑차와 군용헬기는 아무 제지 없이 서울 한복판을 활보했는데 농업용 트랙터는 마치 폭발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경찰은 위협적으로 농민을 진압하고 트랙터를 부쉈다. 그러자 어느샌가 청년 여성들이 비추는 응원봉 불빛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체감온도가 영하 10도 이하인 칼바람을 은박담요와 핫팩으로 버티면서도 절대 지치지 않았다. “경찰은! 차 빼라!”라는 구호가 시작됐다. 누군가 가져온 꼬마전구가 트랙터를 장식했고 그곳이 남태령의 시민 자유발언대가 됐다. 그리고 누군가가 보낸 뜨거운 음료와 식사 거리가 속속 배달됐다. 난방버스가 경찰차벽을 제치고 들어왔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내고, 싸울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싸웠다. 그리고 그다음 날 오후에 무려 10중으로 가로막았던 경찰차벽을 열고 트랙터와 시민들은 한남동 관저까지 행진했다.
2025년 3월25일. 남태령에 두 번째로 트랙터가 멈춰 섰다. 이번엔 지난번의 열 배는 넘는 경찰차벽과 병력이 왕복 8차선 양방향으로 빼곡하게 자리잡았다.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농민들의 평화시위가 얼마나 무서웠던 건지 서울시장이 직접 방문해 “서울 땅에 트랙터 한 대도 못 들어오게 하라”는 명령까지 내리고 갔다. 극우세력까지 진을 쳤다. 차가운 남태령을 또다시 시민들이 채워나갔다. 그러다 트랙터 한 대가 광화문으로 들어갔고 그 트랙터를 탈취하려는 경찰이 사람들을 물건처럼 집어 던지고, 밀고, 때리고, 가뒀다. 그런데 그런 경찰을 더 많은 시민이 가뒀다. 트랙터를 지키려는 깃발들이 파도처럼 다가왔다. 지게차로 트랙터를 질질 끌어서 견인하려니 사람들이 그 앞으로 달려갔다. 차벽을 세워 통행로를 차단하니 사람들이 사방팔방 골목으로 달려가 차벽 뒤 골목으로 나와 또 그 앞길을 막았다. 스크럼을 짜서 경찰들을 막고 그렇게 또다시 1박2일을 꼬박 농성하고 나서야 경찰들은 못 이기는 척 트랙터를 내줬다. 그 트랙터는 지난번처럼 아무런 방해 없이 너무나 안전하게 시민들과 함께 경복궁을 행진했다.
시민들이 일으킨 저항의 움직임은 남태령을 넘어 한남동 관저로, 그리고 경복궁으로 전진했다. 130년 전, 사람이 곧 하늘이며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뜻을 펼치고자 일어났던 농민들의 반봉건 투쟁이 의병 활동으로, 3·1 운동으로, 광복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굴하지 않고 흘러 내려왔다. 관군과 일본군의 합동공격으로 인해 우금티에서 육신은 흩어졌을지언정 영령들의 뜻은 끝내 살아남아 이어진 것이다. 독재의 꿈을 꾸었던 윤석열과 내란 잔당들의 봉건주의, 식민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이 130년을 지나 트랙터를 타고 실질적·상징적 ‘궁궐’을 행진하며 민중의 해방 서사를 완성했다. 반봉건의 정신으로 2025년의 민주주의를 지켰다.
2025년 4월4일 오전 11시22분.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이 육성을 듣겠다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나라는 파산 상태가 되었고 위상은 바닥 없이 추락했다. 혐오와 차별, 정치적 분열이 극에 달했다. 윤석열은 파면됐지만 내란 이후 파괴된 일상을 재건하는 작업은 이제 시작됐다. 내란 청산과 사회 대개혁이라는 구호가 아직 광장 곳곳에 남아서 메아리치고 있다. 다시는 이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내란사태 직후부터 굳건했다. 그 결심의 상징적인 신호탄은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의 평등수칙 공표였던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던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민주주의적 대원칙의 복구 작업이었다. 소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존중하겠다는 선언은 박수갈채와 함께 성숙한 광장의 문화를 열어냈다. 단지 그 수칙을 한 번 읽고 시위를 시작할 뿐인데, 누가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단속하는 것도 아닌데, 시민들은 경청의 태도로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무대에 오른 시민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해도 이전처럼 야유와 비난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드러내도 공격당하지 않는 공론장의 경험은 새로운 차원의 시민 행동을 이끌어냈다. 광장을 가득 메운 빛이 더 밝아졌고 활기차졌다. 내란사태에 대한 분노에 정신을 못 차릴 거 같다가도 이 사람들의 에너지를 보면 우리가 이기겠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연장선에 1차 남태령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밤샘 자기소개 자유발언이 펼쳐질 수 있었다. 내가 가진 약자성, 소수자성, 피해자 정체성을 밝히며 시작하는 조금은 마음 아픈 사연과 마음속에 숨겨왔던 용기 있는 고백은 사람들을 순간 몰입하게 했다. 무작정 농민들을 지키러 달려온 시민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해하는 어르신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그치지 않고 오롯이 존중하고 환대했다.
차별과 편견 없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사람에게 편안하고 소탈한 솔직함을 갖게 한다. 남에게든 나에게든 태도가 달라진다. 서로 존중하면서도 자유로운 대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스트레스와 고독감으로부터 각자를 해방시킨다. 내 고통은 타인의 고통과 연결돼 있으며 다름에도 불구하고 얼마든 연대할 수 있다는 깨달음,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농민이라는 이름의 이웃에게 연대하겠다는 다짐, 내란을 끝내고 사회를 바꾸겠다는 열망,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방해하는 공권력에 대한 분노. 한국에 이렇게 많은 명연설가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강렬했다. 당연히 모두가 달변의 연설가였던 것은 아니다. 덜덜 떨기도 하고 더듬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 들리는 발언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박수 치며 환호하고 기다리고 상황에 맞게 구호를 외쳐주었다. 동지라는 호칭과 투쟁으로 인사하는 전통도 전수됐다. 뼈가 시리게 차가운 밤, 뜨거운 자유발언은 사람들을 버틸 만하게 만들었다. 누구도 발언 내용이 맘에 안 든다고, 거기 있는 네가 싫다고, 내려오라고 하지 않았다. 경찰차벽을 넘어서 간신히 배달 온 팥죽은 자신이 들어갈 입의 자격이나 출신을 묻지 않았다. 핫팩과 보온용품, 난방버스의 좌석은 온기가 필요한 누구에게나 주어졌다. 돌려받을 계산 없이 오직 남태령에 있는 시민들 한 방향을 향한 그 마음들은 투쟁이 끝나고 난 뒤 후원물품으로 남아 버스 하나를 가득 채웠다. 이틀 밤 동안 트랙터 주변에 대동세상이 열린 것이다.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의 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화물트럭 등을 타고 상경하던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을 경찰이 막았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2024년 12월22일 오전 서울 관악구 과천대로 남태령고개 인근에 모여 따뜻한 음료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파면은 시작이다. 내란은 비상상황이었고 우리는 이제 막 비상해제를 한 것뿐이다. 이제 난장판이 된 나라를 재건해야만 한다. 내란 발생은 멀쩡하던 곳에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재앙이 아닌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안전망, 시스템의 파탄 혹은 부재 상태가 오래 방치돼왔다는 증거다. 최후의 보루, 마지막 남은 면역체계인 가장 평범한 사람들, 시민들의 연대가 목숨을 걸고 내란세력의 폭주를 일단 막아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운 이유를 상기해보자. 윤석열이 우리 목전에 총칼을 들이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않았고 시민들을 착취하고 분열시키고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엄동설한 매주 주말에 광장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대로 살 수 없다는 각자의 이유가 최소한 하나씩은 있고 그 이유는 다 다를 것이다. 광장에 나왔던 1천만 명의 시민이 합심해 공동의 목표를 달성했다. 이제 광장에 나온 진짜 원동력인, 마음속에 품어놓았던 자신의 절박한 소망을 꺼내놓을 시간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남태령에서 만난 대동세상을 떠올린다. 수천 명이 서로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모여 놀라운 포용성과 인내심을 발휘했던 곳. 오늘 처음 본 낯선 사람이지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아프지 않을까, 배고프지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활짝 열고 진심으로 공감했던 시간들. 당신이 누군지 캐묻지 않고 내가 누군지 거드름 피우지 않았던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직접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열린 공간에서 민주주의적 원칙을 지키며 ‘무지의 장막’을 드리운 채 나눈 성숙한 대화를 토대로 한 숙의와 토론의 기회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경청과 토의의 결과가 아래에서 위로, 시스템 곳곳에 침투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경로가 필요하다. 직접적 시민참여 숙의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주변부 이벤트성의 사회운동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 의견들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의 토대가 돼야 한다.
우리는 이번에 똑똑히 보았다. 내란과 퇴행의 폭주를 막은 것은 정부도 국회도 헌법재판소도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평등한 연대와 강경한 직접행동이 권력과 시스템을 견제하며 모든 것을 하나하나 싸워서 얻어낸 것이다. 우리가 잠시 권한을 빌려준 작자들이 국회 본회의장을 박차고 나오는 꼴을, 재판관들이 자기 맘대로 법을 주물러 권력에 복종하며 법치주의의 원칙을 박살 내는 꼴을, 시스템이 주권자를 배반하는 모습을 더는 두고만 볼 수 없다. 다시는 이 나라에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시민들의 얼굴 있는 준엄한 목소리가 일상적으로 우리의 대리인들에게 들려야 한다. 동짓날 밤 남태령의 시민 연대는 우리에게 희망의 실마리를 주었다. 앞으로 다가올 사회 대개혁의 세상, 우린 여의도, 남태령, 한강진, 광화문, 안국, 이 땅의 모든 광장에서 이미 먼저 열었다, 여러 번 활짝.
청년여성농부 김후주(트위터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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