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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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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라이터 불량 검수하다 백혈병… 산재신청했지만

산재신청 뒤 1년, 사망 뒤에 역학조사 나와… 질병 산재 신청 뒤 결과 받는 데 걸리는 기간 점점 늘어 235.9일
등록 2024-07-13 15:29 수정 2024-07-15 11:50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장예지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장예지 기자


공장 문턱을 밟자 가스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공장 안에는 일회용 라이터를 만드는 기계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노동자들이 그 기계에서 라이터를 만드는데, 바로 옆에는 라이터에 가스를 주입하는 기계가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 완성된 수백 개의 라이터에서 불꽃이 일시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불이 제대로 켜지나 시험 작동을 한 것이다. 경기 양주시에 있는 일회용 라이터 제조공장 ○산업사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공장 문턱에서부터 끼치는 가스 냄새

이 공장 노동자였던 김경심씨는 2023년 7월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라이터를 만들며 부탄가스에 일상적으로 노출됐기 때문이다. 손꼽아 산재 신청 결과를 기다렸으나 1년 가까이 근로복지공단 역학조사조차 진행되지 않았다. 경심씨는 2024년 5월 숨지고 말았다.

2024년 7월로 산재보험 제도가 설립 60년을 맞았는데, 제도는 되레 퇴행하고 있다. 질병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가 평균적으로 결과를 받는 데 걸리는 기간이 점점 줄어들어야 하는데 되레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에는 182.0일이었는데, 2023년에는 214.5일, 2024년 3월에는 235.9일이 됐다. 경심씨도 제도 퇴행의 피해자 중 한 명이다. <한겨레21>은 2024년 6월27일 ○산업사 근처에서 경심씨의 딸 강은채씨를 만났다.

“엄마가 늘 하시던 말버릇이 있어요. 속상한 일 말하면 ‘어잇, 괜찮아’ 그러시거든요. ‘어잇’은 추임새 같은 거고요. ‘괜찮아’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 말을 들으면 신기하게 다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래서 힘든 일 있으면 꼭 엄마한테 이야기하곤 했어요.” 은채씨가 말했다.

경심씨는 평생 일했다. 어려서는 동생들을, 결혼해선 자녀를 부양하려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2011년부턴 ○산업사에 자리를 잡았다. 냉난방 시설조차 없는 공장이지만 휴일에 쉴 수 있어 그나마 만족한다고 했다. 경심씨는 그 공장에서 꼬박 12년을 일했다.

○산업사는 매년 대한민국 인구만큼 일회용 라이터를 만든다. 라인마다 1초에 1개씩, 연간 6천만 개의 라이터가 생산된다. 플라스틱 라이터 통에 부탄가스를 주입한 뒤 불량품을 걸러내고 완성품을 출하하는 공정이다. 직원 50여 명이 공정을 나눠 맡는다. ○ 산업사의 2018~2020년 당기순이익은 연간 80억여원. 많이 벌진 못해도 꾸준히 수익을 냈다.

2024년 6월27일 경기 양주 일회용 라이터 제조공장 ○산업사에서 일회용 라이터가 기계에서 나오고 있다. (왼쪽) 가스주입기계가 일회용 라이터에 가스를 주입하고 있다. 회색 은박으로 싼 국소배기장치가 연결돼 있지만, 바닥이 뚫려 있어 가스 확산을 원천 차단할 순 없다. 이종란 노무사 제공

2024년 6월27일 경기 양주 일회용 라이터 제조공장 ○산업사에서 일회용 라이터가 기계에서 나오고 있다. (왼쪽) 가스주입기계가 일회용 라이터에 가스를 주입하고 있다. 회색 은박으로 싼 국소배기장치가 연결돼 있지만, 바닥이 뚫려 있어 가스 확산을 원천 차단할 순 없다. 이종란 노무사 제공


경심씨 업무는 라이터 불량품 검수였다. 라이터에 주입된 가스가 정량인지 확인하고 가스가 너무 많거나 적게 들어간 건 걸러냈다. 그러다보니 늘 가스주입기계 옆에 바싹 붙어 앉아 라이터를 들여다봐야 했다.

작업장에선 가스 냄새가 자주 났다고 한다. 경심씨는 생전에 노무사와 상담할 때 “가스주입기 주변에 서리 내린 것처럼 돼 있으면 가스가 샌 건데,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4~5년 전부터는 가스 냄새가 너무 심해져 속이 메슥거릴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럴 땐 가스를 잠그고 직원을 불러 고쳤지만, 이미 들이마신 가스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부탄가스 유해물질’ 관리 대상 미포함

라이터에 다 들어가지 못한 가스가 공기 중에 퍼졌을 가능성이 크다. 2016년 8월 ○산업사의 작업 공정을 취재한 와이티엔(YTN) 사이언스 기사 ‘편리한 점화도구, 라이터 제조 과정’ 편을 보면, “1 개 라이터에 주입되는 가스양이 2~2.5g이나, 주입 과정에서 가스가 날아가 실제 들어가는 가스는 2.3g 정도”라고 했다. 회사도 이를 고려해 환기장치(팬)와 국소배기장치를 설치했다. 다만 배기장치 아래쪽이 열린 구조라 공기 중 확산을 완전히 차단하진 못한다.

경심씨 유족 쪽은 부탄가스의 불순물인 ‘1,3-부타디엔’이 발병 원인일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1,3-부타디엔은 그간 원유 정제업과 타이어제조업 등에서 백혈병을 일으키는 물질로 알려져왔다. 부탄가스에도 이 물질이 포함돼 있는데, 현재는 함유량이 0.1% 이상이면 1급 발암물질로 본다. 2019년 유럽연합 등과 규제 수준을 맞춘 결과다. 다만 그 전까진 함유량 기준이 0.5%로 선진국보다 느슨했다. 5년 전만 해도 현행보다 5배는 많은 1,3-부타디엔이 포함될 수 있었단 뜻이다. 가스주입기 바로 옆에 앉아 하루 종일 라이터를 들여다본 경심씨가 이 물질에 상당량 직접 노출됐을 거라고 유족 쪽은 주장한다.

○산업사 쪽은 직업병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제조사가 부탄가스를 공급할 때 1,3-부타디엔 함유량이 0.1% 이하라고 밝혔고, 부탄가스를 취급하는 사업주도 의무적으로 추적·관리할 의무가 없다(관리·허가 대상 유해물질이 아님)는 이유다. 국내에 부탄가스로 인한 백혈병 발병 사례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도 근거로 든다. ○산업사 관계자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부탄가스가 백혈병으로 문제가 됐으면 제조사나 작업환경 측정 기관이 벌써 조치했을 것이다. 30년 넘게 사업하면서 생산량이 지금의 두 배일 때도 백혈병 사례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류에 적힌 1,3-부타디엔 함유량만을 기준으로 유해 여부를 따지는 건 현실과 안 맞는다는 지적도 있다. 김신범 녹색병원 산하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1,3-부타디엔은 불순물이라 부탄가스를 어떻게 제조하느냐에 따라 함유량이 계속 변한다. 제조사가 그 함유량을 일정하게 맞추기 어렵다는 뜻이다. 더구나 재해자처럼 가스를 가까이서 계속 마신 경우라면 0.1% 미만이라도 안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사 1,3-부타디엔 함유량이 낮은 부탄가스라도 사업주의 관리는 필요하다. 고용노동부는 하루 8시간 작업 기준으로 노동자가 800ppm 이상 부탄가스에 노출되면 인체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짧은 시간 고농도로 노출되면 백혈병이 아니라도 부탄가스 중독 등 위험이 있다. 그러나 ○ 산업사는 공기 중으로 퍼져나간 가스 농도를 따로 측정하거나 관리한 적이 없다. 

2022년 9월, 경심씨는 갑작스러운 근육통과 잇몸 출혈을 호소했다. 치아 문제인 줄 알고 발치했더니 지혈이 안 됐다. 혈소판 감소 증세를 보여 큰 병원으로 달려갔다. 결국 2022년 12월21일 은평성모병원에서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을 진단받았다. 정년을 불과 3년 앞둔 시점이었다.

“정년 마치면 동생네 부부랑 같이 괌 여행 가기로 약속했거든요. 꽃구경도 같이 가자고 그런 얘기 했는데, (진단받고) 세상이 다 원망스러웠죠. 엄마는 한평생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역학조사 처리 기간 평균 535.9일

가족력이 없는 경심씨가 백혈병이라니 은채씨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액화석유가스가 중추신경계를 건드려 림프성 질환을 일으킨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다. 그길로 산재 신청을 알아봤다. 2023년 7월9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를 통해 산재를 신청했다. “제가 ‘아무래도 산재 같다. 신청해보자’고 했을 때 어머니도 부정하진 않았어요. 한번 해보자고, 노무사님 찾아가서 상담도 했죠. 엄마한테는 (요양·휴업급여가) 간절했어요. 혹시 여생을 투병하며 살아야 한다면 최소한의 생활비가 필요하니까요.”

투병하던 경심씨는 딸에게 종종 산재 진행 상황을 물었다. 은채씨는 답할 말이 없었다. 1년 가까이 아무런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4년 1월에 다시 문의했더니 ‘조사가 밀려 있어 6월은 돼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승인이 날지 안 날지도 모르는 걸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됐어요. 그동안 가족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에 갇혀 인내해야 하는데….”

조사가 길어지는 핵심 원인은 역학조사다. 노동자가 산재를 신청하면 근로복지공단은 직업병 연관성을 서면으로 따져보는 재해조사를 시작한다. 기존 선례가 많은 직종의 질병은 서면조사로 갈음하지만, 업무 연관성을 더 따져봐야 한다고 판단하면 역학조사를 의뢰한다. 역학조사 기관(직업환경연구원·산업안전보건연구원) 소속 연구원 20여 명이 연간 400여 건에 대해 논문을 검토하고 사업장도 방문하니 시일이 오래 걸린다. 질병산재의 단계별 처리 일수를 구체적으로 조사한 고용노동부 연구용역 보고서를 보면, 2022년 역학조사 전 산재 처리 기간은 평균 146.1일, 역학조사 처리에 걸린 기간은 평균 535.9일이었다.(<역학(전문)조사 처리절차·업무량 분석 등을 통한 개선방안 연구>, 2023년 7월 ) 서면조사만으로도 반년 가까이 소요되는데 역학조사를 추가하면 2년이 훌쩍 넘는단 뜻이다.

은채씨 가족은 급한 대로 모아둔 돈으로 항암 치료를 진행했다. 표적 항암 등 비급여 치료 없이도 연간 2천만원 넘는 치료비가 나왔다. 건강이 호전되는 듯했던 경심씨는 2024년 5월17일 갑작스레 병이 악화해 세상을 떠났다. 이미 산재 신청 10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2024년 6월27일, 직업환경연구원(직환연)이 뒤늦게 역학조사를 한다며 ○ 산업사를 찾았다. 현장을 돌아보며 작업 내용을 파악했다. 그러나 정작 원인으로 의심되는 공기 중 부탄가스 농도 측정은 다음 방문일로 밀렸다. 사업주가 관련 작업환경측정을 한 적이 없어, 조사를 하려면 장비를 갖추고 다시 와야 한단 이유였다. 직환연은 ‘공기 중 농도 외에 가스 원료도 측정했으면 좋겠다’는 은채씨 요구에도 “수입 장비가 필요하다”며 확답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강제성 없는 조사의 한계도 뚜렷했다. 직환연은 역학조사를 할 때 회사에 미리 일정을 통보한다. 수사권이 없다는 이유인데, 사업주에겐 미리 조사에 대비할 시간을 주는 통로로 쓰인다. 경심씨가 일한 회사도 전에 없던 가스주입기 쪽 가림막이 새로 만들어졌다.

유명무실 ‘180일 조사’ … 인원 늘려야

수많은 산재 피해자와 가족들이 오늘도 노심초사하며 심사 결과를 기다린다. 역학조사를 180일 이내로 마친다는 조사기관의 내부 규정은 이미 유명무실해졌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3년 10월 ‘180일 내 역학조사를 마치지 못할 시 국가가 선보상한다’는 내용의 산재보상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 법안은 제21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렇게 산재 심사가 지연되는 건 어쩌면 (당사자와 아닌 사람의) 입장 차이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처럼 똑똑한 사람 많은 데서 역학조사 단계를 줄이거나 조사 인원 늘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제도 개선을 하려면 충분히 할 텐데 (노동자 죽음이) 내 일이 아니니까 이렇게 방치해두는 것 아닌가 해요.” 은채씨가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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